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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6화 (46/650)

46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바닥 다지기

한진영은 계약서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계약은 약정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진영에게 이득이 되는 계약이었다.

이런 계약을 마다할 리 없는 한진영은 계약서 조항을 꼼꼼히 살핀 뒤 새로운 계약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회사에서는 자네 같은 친구들을 더욱 우대하는 쪽으로 사업을 진행하려고 해. 능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더 좋은 기회를 주는 게 어찌 보면 옳은 일 아닌가?”

최준호는 한진영이 편하게 사인 할 수 있도록 계약서 종이를 잡아주며 말했다.

“나는 그게 맞는다고 생각해. 짜잘짜잘하게 1억, 2억 받아오는 친구들보다 자네처럼 통 크게 20억, 30억, 50억 받아오는 친구를 더 대우해줘야지.”

한진영은 계약서에 사인하는 자기를 향해 계속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최준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펜을 든 채 물었다.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어?”

최준호는 한진영의 질문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리 티가 났나?”

“티가 아주 많이 난 건 아닙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마침 사인하는 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잠시 멈췄다 하려던 참이었으니까요.”

한진영은 말대로 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펜을 이리저리 손에서 놀렸다.

이리 잡아보기도 하고 저리도 잡아보는 것이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준호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이야기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본사에 가서 사진을 한번 찍어주길 회사에서 바란다네. 뭐 올해 실적 1위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뜻인데…….”

한진영은 최준호의 말에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그러십니까?”

“큰일이지. 자네에게는 큰일이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는 큰일이야.”

최준호는 다급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큰일이 아니겠나?”

“지점장님.”

한진영은 몸을 바싹 당겨 앉은 최준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제가 이곳을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것 지점장님도 알고 계시던 것 아닙니까?”

“그게…….”

“그러니 제가 있을 때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으십시오. 제 덕분에 지점장님도 이런 계약서 하나 쓰셨을 텐데 말입니다.”

한진영이 웃으며 지금까지 사인하던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지점 영업직원이 새로운 성과급에 대한 계약을 진행했다면 지점장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진영은 신성증권 전국 1위의 실적을 올렸다.

그렇다면 지점순위에서도 시흥지점이 전국 1위 혹은 그에 근접하는 실적을 올렸을 것이 분명했다.

파격적인 제안으로 한진영이 성과급을 받게 된다면 최준호도 그와 비슷한 계약을 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너는…….”

최준호가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가서 너 회사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출내기라고 이야기하지 말아라.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을 정도니까.”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나 봅니다. 지점장님이 이리 웃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됐어. 그만해. 사인 다 했으면 어서 나가.”

한진영이 능글맞게 최준호를 바라봤다.

최준호는 손을 휘저으며 한진영의 시선에서 자기 얼굴을 가린 뒤 한진영의 등을 밀어 회의실 밖으로 쫓아냈다.

한진영은 지점장에 밀려 회의실 밖으로 나온 뒤 퇴근 준비를 하는 직원들을 살폈다.

‘이제 첫 단계는 완성했고…….’

조금 전 회의실 자리는 한진영이 계획하고 있는 일의 첫 단계가 완성됐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의미 있는 실적을 올려 전국에서 손가락에 드는 것.

이것이 본사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걸 조금 전 계약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이제 두 번째 계획은 본사로 자리를 옮기는 건데…….’

한진영은 가만히 시흥지점을 둘러봤다.

시흥지점에 미련이 있지는 않았다.

친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이성우와 최석영이 전부였다.

조금 더 쓴다면 최준호 지점장까지 봐줄 수 있을까 나머지는 경조사 초대 때 참석 여부를 고민해야 할 정도의 친분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내 기반이 부실할 것만 같다는 게 문제지.”

한진영은 가슴 속에 담겨 있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본사에 가는 것만을 생각했다면 지난 김정대 본부장의 제안 때 넘어갔어도 됐었다.

그러나 그때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뿌리가 아직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본사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바탕이 만족스럽게 다져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고…… 바닥 좀 다져야겠어.”

한진영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려 했다.

***

한진영은 진열장에 자리한 시계를 유심히 바라봤다.

손에 하얀 장갑을 낀 매장 직원이 한진영이 시계를 살피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야야.”

조용한 한진영과 매장 직원과는 달리 다른 사람이 시끄럽게 한진영을 불러댔다.

“아~ 왜?”

한진영은 감상을 망친 이성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또 왜?”

이성우는 날카로운 한진영의 목소리가 이제는 익숙한 건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진영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익스가 바뀌나 본데? 이거 새로운 버전이죠?”

이성우가 한진영 곁에 있는 매장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매장 직원보다 한진영이 먼저 대답했다.

“그거 아직 출시되기 전이라 모형이야. 바뀐 건 익스뿐만이 아니야. 서브마린도 이번에 다 모델체인지 이뤄질 거야. 뭐 둘 중에서는 익스플로어가 더 크게 바뀌기는 하겠다. 사이즈가 39mm로 바뀌는 거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와 매장 직원 모두 감탄하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특히 매장 직원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시계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이번에 새로 발표하는 거라 아직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직원도 있는데…… 바뀌는 사이즈까지 정확하게 숙지하고 계시는 게 놀랍네요.”

“시계를 좋아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진영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한 뒤 손가락으로 시계 두어 가지를 가리켰다.

“저거하고 저거 주세요. 그리고 이번에 모델체인지 하는 두 가지 모델 모두 예약 걸어놓고 싶은데요.”

매장 직원은 한진영의 말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하나에 천만 원에 육박하는 시계를 단번에 두 개를 사는 손님을 만나는 것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모델 또한 예약을 건다고 했다.

매장 직원은 보고 싶던 연인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살가운 표정을 건넸다.

“고객님.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시계를 직접 보면서 이야기 나누시겠어요? 사시려는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괜찮습니다. 우선 포장해 놓으세요. 하자가 있는지는 나중에 보고 말씀드릴 테니까요. 지금은 다른 곳도 둘러봐야 해서요.”

“다른 곳에 다녀오신다고요? 그럼 계산은…….”

싸놓으라고 해놓고 다시 오지 않은 고객을 한둘을 본 게 아닌 매장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진영은 그런 그녀에게 말이 아닌 카드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바로 결제해주세요.”

“어머.”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린 직원은 급히 한진영을 향해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했다.

그리고 한진영의 카드를 받아 냉큼 결제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런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성우는 한진영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기업 후계자는 내가 아니고 너인 거 같다. 혹시 너 어디 재벌가의 사생아. 뭐 이런 거 아니냐?”

“사생아 같은 소리 하네. 내가 한 달에 버는 돈이 얼마인데 이까짓 시계 사는 거 가지고 덜덜 떨어야 해?”

“그건 맞는 소리야. 한 달에 신입사원 연봉만큼 벌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게스츠름한 눈을 뜨고 말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안목만큼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 거거든. 그리고 한순간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돈을 쓸 때 머릿속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돈과 앞으로 벌 돈을 계산하고는 해. 그런데 너는 그런 게 없어. 마치 원래부터 돈이 많았던 것처럼 행동해. 이건 한 번에 바뀌는 게 아니거든.”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큰돈을 벌어 이런 류의 소비에 익숙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특히 상류층의 소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이성우에게는 더욱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성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에 지레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의심의 끝은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쪽으로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너 그냥 집에 가라. 괜히 물건 사는데 와서 신경 쓰이게 이리저리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내가 가긴 어딜 가?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이번엔 어디 갈 거야?”

한진영은 이성우를 바라보고 피식하고 웃고는 손가락으로 다른 매장을 가리켰다.

“저기.”

이성우는 한진영이 가리킨 곳을 보고 의아해했다.

“만년필?”

명품 만년필로 유명한 매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한진영이었다.

이성우는 명품 시계를 사다가 갑자기 명품 만년필을 사겠다고 나선 한진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움직이는 쇼핑 동선과는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 작가 에디션으로 새로운 한정판이 나왔거든.”

“정말 만년필 사러 가는 거야? 저기서 파는 뭐 지갑이나 액세서리 같은 거 사러 가는 게 아니고?”

“지갑을 산다면 저기로 왜 가겠냐? 만년필 가게에 만년필을 사야지. 떡볶이집에서 냉면 찾는 짓 좀 하지 마.”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고 웃었다.

“앞으로 사인할 일이 많아질 거야. 받을 일도 많아지고…… 그럴 때 저런 만년필이 필요해. 지난번에 계약서에 사인하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하나 내가 사서 가지고 다니려고.”

“뭐 얼마나 대단한 사인을 한다고…….”

“지금까지는 대단한 사인이 아니겠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거야. 그러니 너도 하나 마련해 둬. 얼마 비싸지 않다. 한정판으로 한 2~3백? 그 정도니까.”

한진영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명품 만년필 매장으로 향했다.

***

월급이 용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쇼핑할 때도 부담 없이 돈을 질러댄 한진영과 달리 다른 직원들의 분위기는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영업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휴. 다들 말도 아니다.”

최석영은 담배를 한 대 물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걱정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럴 땐 그냥 가만히 계세요.”

“그러는 게 낫겠지?”

“괜히 이해한다는 말이라도 했다 가는 사람들한테 어떤 소리 들을지 모르니까요.”

최석영은 한진영의 조언에 동의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객장 한쪽에 자리한 재떨이 근처에 서서 멀리 보이는 직원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런데 분위기 많이 안 좋기는 많이 안 좋나요?”

“많이 안 좋다 뿐이야? 지점장님이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이게 어디 보통 일이야? 자네 덕분에 고객이 늘어 많이 괜찮다지만 그래도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직원이 아직도 있어. 게다가 이번에는 석 달 동안 기준을 넘지 못하면 잘리기까지 한다며?”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박기수 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기억 속에 그가 사고를 쳤던 것이 떠올랐다.

한진영은 담배를 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 저 박 차장이 거하게 사고를 쳤었지.’

바뀐 규정으로 전국 지점에서 억지로 실적을 만들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결국 사고로 이어지고는 했다.

시흥지점에서는 바로 박기수 차장이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딱 좋네. 실적 1등만으로는 부족했는데 사고를 막았다는 훈장까지 달면 보기가 더 좋겠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여러 가지 훈장 중에 사고를 막았다는 훈장이 하나 더 달린다면 보기가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잔뜩 얼굴을 찌푸린 박기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최석영은 한진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시선의 끝에 박기수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박 차장이 왜?”

한진영은 박기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최석영에게 물었다.

“박 차장하고 친하세요?”

“박 차장하고?”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박기수하고는 친분이 없었던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별로 친하지 않아. 저 양반하고는 누구도 친해지기 힘들어. 성격이…… 까칠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한진영이 박기수를 바라보던 것을 거두고 최석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친해지셔야 할 것 같아서요.”

“누가? 내가?”

“네. 친해지세요. 앞으로 딱 이주만요.”

“어?”

한진영은 자기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최석영에게서 박기수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 정도만 친해지면 됩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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