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경륜장의 이변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잡힌 손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래?”
“오늘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알았어?”
“무슨 말을 들으라고…….”
이성우가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할 때 한진영이 이성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돔 경륜장 뚜껑이 날아갈 듯이 소리가 터져 나오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성우는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최석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최석영은 조금 전 한진영과 이성우의 행동에 잠시 놀라기도 했지만, 품속에 담겨 있는 돈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는 품속에 담겨 있는 돈 500을 연신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성우는 최석영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따라 돔 경륜장으로 들어갔다.
이성우의 말대로 전세금 매치인지 뭔지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람이 많은 것인지 돔 경륜장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경기가 펼쳐지는 벨로드롬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배팅을 하기 위해 무인 발급기로 향하는 사람 그리고 직접 직원이 앉아있는 발매창구로 향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구매표부터…….”
이성우는 돔 경륜장에 들어오자마자 구매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한쪽에 잔뜩 꽂혀 있는 구매표가 있는 곳을 발견하자 부리나케 달려가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구매표 한 움큼을 최석영에게 내밀었다.
“과장님. 얼른 받아서 칠하세요.”
“칠하라고? 뭘?”
“경주번호 17번에 단승, 그리고…….”
이성우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것이 맞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최석영에게 말했다.
“5번이요. 아셨죠? 17번 경주의 5번이요. 어서 칠하세요.”
“금액은? 여기…… 500만 원이 없는데?”
“아 참. 당연히 없죠. 법으로 10만 원 이상 배팅할 수 없게 돼 있어요.”
“그럼 500만 원을 어떻게 배팅해?”
“법으로 10만 원 이상할 수 없다고 해서 10만 이상 배팅 못 하면 경마나 경륜으로 망했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최석영은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법으로 10만 원 이상을 집어넣지 못한다면 경마나 경륜으로 망했다는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경마나 경륜은 주식만큼이나 망하는 사람을 많이 양산하는 곳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도 많이 일으켰고 정선과 함께 도박쟁이들의 안식처와 같은 곳으로 일반인들에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최석영은 그럼 어떻게 하냐는 눈으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50장 칠하시면 돼요. 그냥 한 장에 10만 원 이상 돈을 넣지 못한다 뿐이지 여러 장 사는 건 괜찮아요.”
“그게…… 괜찮아? 막지 않아?”
“한 사람당 10만 원어치만 달랑 팔고 말면 여기 경륜 공단은 뭐 먹고 살겠어요. 마찬가지로 도박쟁이들은 뭔 재미로 이거 하고요. 배팅하고 싶은 만큼 구매표 칠해서 가지고 가면 다 받아줘요.”
“진짜?”
이성우는 최석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뒤 바라봤다.
평소 사무실에서는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이곳에 와서는 물 만난 고기처럼 행동하는 이성우였다.
“저는 3천이에요. 제가 3천을 어떻게 집어넣으려 하겠어요. 500 가지고 놀라지 마세요. 야. 너도 좀 도와줘. 17번 경주에 5번. 알았지?”
“5번 배당률이 1.2냐?”
“어.”
한진영은 여기저기 걸려있는 TV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두 번째 배당률은 누구야?”
“그건 왜?”
한진영은 가만히 구매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성우를 바라본 채 손을 뻗어 이성우 앞에 놓여 있는 구매표를 끌어당겼다.
이성우는 이런 한진영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경륜에 관해서 만큼은 자기가 한진영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성우였다.
게다가 이번 전세금 매치에 관해서는 믿을만한 출처를 통해 얻은 정보였기에 자신감도 있었다.
본래 1.1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배당률이 1.2에서 형성된 것부터 이번 매치는 퍼주기식 경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이성우였다.
그런데 한진영이 돔 경륜장 앞에서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아직 3번째 경주가 진행 중이기에 시간이 많아 괜찮지만 그래도 300장을 칠하기 위해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시선을 건네는 것을 멈추고 구매표를 칠하기 위해 사인펜을 들었다.
턱!
한진영이 수표 네 장을 꺼내 구매표 옆에 놓았다.
구매표를 칠하기 위해 들었던 이성우의 사인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천만 원짜리 수표 네 장.
한진영은 4천만 원을 구매표 옆에 놓고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나는 다른 곳에 배팅해야겠다.”
“야 인마. 거기 아니야.”
한진영은 이성우가 칠하라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사인펜을 이용하여 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우는 갑작스러운 한진영의 행동에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다.
“진영아. 거기 아니라고…….”
“나는 여기에 배팅할 거야.”
“야 인마…… 거기는…….”
“성우야. 너도 내가 찍으라는 곳에 찍어라.”
“도대체 왜 그래?”
“과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찍으라는 선수 찍으세요.”
최석영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서로 다른 곳을 찍으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구매표와 사인펜을 든 채 이성우와 최석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지금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거야?”
“여기서 이 5번 선수는 우승을 못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출주표 봐. 5번 김정근 선수. 승률이 20%를 넘어. 게다가 나머지 선수 중에 높은 선수가 4%밖에 되지 않고…… 연대율은 볼 것도 없고 삼연대율 봐라. 미쳤어. 90%에 가까워. 특선급 SS에 평균득점과 종합득점까지…… 무조건 이 선수가 먹는 경기야. 그리고 이 선수가 먹으라고 나머지 선수들도 들러리로 뽑아 놓았고…… 그런데 우승 못 한다는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듣고 와서 그러는 거야?”
“성우야.”
“어?”
이성우는 말을 할수록 흥분이 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차분한 한진영의 부름 한 번에 흥분이 모두 가라앉음을 느꼈다.
한진영은 이성우를 바라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한 적 있니? 내가 이야기한 거에 틀린 것을 본 적이 있어?”
단순한 말에 이성우의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이성우의 입이 닫히자 다른 쪽 입이 열렸다.
“뭐야? 알고 있는 게 있어?”
조금 전까지 배팅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최석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빨리 말해봐. 뭔데?”
“오늘 이 경주. 누구나 1등이라고 생각하는 이 선수. 1등 하지 못합니다. 대신 2등으로 유력한 선수가 1등 할 거예요.”
“진짜?”
“들은 게 있습니다.”
이성우는 잠시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까지 너 여기 오는 줄도 몰랐잖아. 그런데 어떻게 들은 게 있다는 거야?”
“이곳에 올 줄은 몰랐지. 하지만 이 경기는 알아. 주식쟁이의 제일 첫 번째 덕목이 뭐야? 쓸데없는 정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정보는 주머니에 넣고 봐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 내 주머니에 들어온 정보 중에 이 경기가 있었다. 그러니 내 말을 믿어. 네가 찍으라는 선수는 1등을 못 해.”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은 결심한 듯이 사인펜을 들었다.
“진영이가 들은 게 있다면 그게 맞는 거지. 그럼 누구를 찍어야 해?”
“2등으로 들어올 것이 유력한 선수. 그 선수가 1등을 하게 될 겁니다.”
“2등이라고? 그럼 2등으로 유력한 선수가 누구야?”
최석영은 대답이 바로 들리지 않자 이성우의 옆구리를 찌르며 다시 물었다.
“왜 가만히 있어? 누구냐니까?”
“3번 선수요.”
“3번? 오케이.”
최석영은 시선도 이성우에게로 돌리지 않았다.
시험 볼 때 OMR 카드에도 이 정도로 열심히 칠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모습으로 온 힘을 다해 구매표에 색을 칠하는 최석영이었다.
이성우는 잠시 구매표에 손을 얹은 채 한진영을 바라봤다.
“진짜야?”
“내가 들어오기 전에 말했지? 내 말 들으라고…… 내 말 듣고 3번으로 찍어. 확실한 곳에서 들은 정보다.”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한진영의 모습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이런 모습에 긴가민가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도 확실한 루트를 통해 얻은 정보인데 한진영의 모습을 보니 그쪽이 더 정확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좀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인펜을 연신 움직이는 최석영을 전문가 투자대회 1등을 만든 한진영이었다.
게다가 그냥 1등도 아니라 압도적인 1등에 12주 연속 무손실이라는 전설 같은 기록을 쓰고 우승을 시켰다.
그래서 지점 직원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와 접점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는 했다.
그래서 지금 한진영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너도 빨리 적어. 우리가 칠해야 하는 구매표가 한두 장이 아니지 않냐? 나야 500이 땡이지만 너 3천 진영이 4천이면…… 경기 전까지 죽어라 칠해야 해.”
멍하게 한진영만 바라보고 있던 이성우는 최석영의 말에 사인펜을 다시 쥐었다.
***
“조금 뒤 벨로드롬에서는 17번째 경주가 있을 예정입니다.”
돔 경륜장 스피커를 통해 다음 경기를 안내하고 있었다.
한진영 일행은 이미 15번째 경기부터 관중석에 앉아 17번째 경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겠지?”
“걱정되냐?”
“돈이 문제가 아니야.”
“네가 돈 벌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도파민 샤워 하려고 이곳에 온 거잖아.”
한진영은 곁에서 세차게 다리를 떠는 이성우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하고 내기 하나를 더해서 도파민 샤워 강도를 더 강하게 할 생각은 없냐?”
“내기?”
“그래. 흥분을 더 끌어 올리기 위해서 말이야.”
“무슨 내기?”
흥분이 극도로 치밀어 올랐는지 이성우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제안했다.
“내가 말한 3번이 우승하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 반대로 네가 말한 5번이 우승하면 내가 네 부탁 하나를 들어줄게.”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너도 내가 무슨 부탁할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겠냐?”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곁에서 벨로드롬만 내려다보고 있는 최석영을 돌아봤다.
“과장님도 함께 하시겠어요?”
“뭐 하러? 무조건 진영이가 말한 3번이 1등으로 들어올 텐데.”
의심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최석영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모습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는지 한진영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좋아.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는 거로 하는 거다.”
“무슨 부탁이든 들어준다는 말은 내가 하고 싶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행동하는 이유는 과거이자 미래였던 곳에 있던 이성우를 통해 귀가 따갑게 이야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이성우는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이나 오늘의 일을 떠들고 다녔고, 한진영은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의 경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미리 알고 있었다.
“자자. 시작한다.”
최석영이 벨로드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벨로드롬에는 일곱 명의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리에 서서 몸을 가볍게 푼 후 출발선에 서서 총성을 기다렸다.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쏟아부은 돈이 7천이 넘어. 집중해.”
최석영은 구매권을 손에 양손으로 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벨로드롬을 바라봤다.
탕!
일곱 명의 선수와 유도원 하나가 총성과 함께 출발선에서 앞으로 나갔다.
유도원을 따라 천천히 달리던 경륜 선수들은 한 바퀴 반을 남기고 유도원이 빠지자 본격적인 경주가 시작됐다.
“달려! 달려!”
“6번. 이 새끼야. 밟아.”
한 바퀴 반을 도는 경주에 사람들의 흥분이 극도로 치달았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은 5번 선수를 연호했다.
“튀어 나가!”
“너만 믿는다. 가라!”
5번 선수 뒤를 3번 선수가 바짝 쫓았지만, 역부족으로 보이는 듯했다.
미세한 차이로 우승이 결정되는 경륜 특징상 코너 하나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자전거 하나만큼의 거리는 잡을 수 없는 격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날 것 같던 경주에서 이변이 생겼다.
우당탕탕!
“5번 김정근 선수. 넘어졌습니다.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우승은 3번. 3번의…….”
당연하게 우승할 것으로 여겨졌던 5번 선수가 코너에서 넘어지며 실격이 되었고, 뒤를 따르던 3번의 선수가 결승선을 선착하며 우승했다.
우승이 당연할 것 같던 배당률 1.2배짜리 선수가 떨어지고 배당률 7.4배짜리 선수가 기적과도 같은 우승을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