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4화 (14/650)

14화 첫 단추가 중요하다

다음 날 한진영은 최석영과 함께 최준호 지점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최석영과 함께 대경TV 전문가 투자대회에 참석하겠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최준호는 듬직해 보이는 한진영과 여전히 못 미더운 최석영을 번갈아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사람을 내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시간이 하루만 지났어도 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내보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한진영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최준호는 당장 사흘 뒤부터 시작되는 투자대회 준비를 잘하라는 말로 승낙 메시지를 전했다.

“진영 씨.”

지점장실을 나온 최석영은 한진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괜찮겠어?”

“뭐가 말입니까?”

“투자대회 생각보다 규모가 큰 거 같던데…….”

“지점의 대표끼리 하는 대회니, 규모가 작은 게 이상하죠.”

“그것도 그렇지만…….”

최석영은 아직은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있는 객장 한쪽으로 한진영을 끌고 갔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지점장님도 기대하고 계신 것 같던데, 정말 괜찮겠어? 이러다가 만약 꼴찌라도 하게 되면…….”

“과장님. 벌써부터 왜 이러십니까?”

한진영은 웃으며 최석영의 팔을 툭 하고 쳤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최석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여유로웠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최석영의 말에 대답했다.

“어차피 저와 과장님이 노리는 건 전문가 상담 코너 아닙니까. 그 자리에 앉으려면 투자대회에서 상위권에 진입해야 합니다.”

“그랬지…….”

“그런데 왜 꼴찌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

“과장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저 믿으시죠?”

한진영의 당당한 말투에 최석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경력 10년이 다 되어가는 과장을 보고 자신만 믿으라는 신입.

하지만 신입도 신입나름.

그간 감히 신입이라 볼 수 없을 행보를 보인 한진영이기에 딱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믿지.”

“그러면 이제 걱정 그만 하세요. 모든 건 제 계획 아래에서 순조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정말? 정말 자네는 계획이 다 있다는 거지?”

“일 시작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한진영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최석영을 뒤에 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최석영이 대경TV 전문가 투자대회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점심시간이 지나자 지점 내에 파다하게 퍼지게 됐다.

방송사 전문가 투자대회의 경우에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박아 넣고 진행되는 데다 투자수익률에 투자종목까지 낱낱이 공개되는 만큼 잘못됐을 때의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잘되면 돌아오는 보상이 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1등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시청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익률이라면 1등조차도 묻혀 버리는 게 전문가 투자대회였다.

최석영은 걱정 반 흥미 반으로 찾아온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최 과장. 정말 괜찮겠어? 괜히 나갔다가 망신만 당하는 거 아냐?”

“과장님. 그거 계륵으로 유명한 거잖아요. 소문에 우리 지점이 찍혀서 본사에서 우리 지점 직원으로 내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혹시 과장님도 지점장님에게 밉보인 게 있어서 지목당하신 거 아니에요?”

“석영 씨. 앞으로 집 주변 다닐 때는 모자 쓰고 얼굴 잘 가리도록 해. 얼굴에 증권사 이름하고 지점 이름까지 다 공개되는 거라 불편한 일이 꽤나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최석영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이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최석영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순수하게 걱정되어서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밑바탕에 깔린 거짓된 걱정으로 느껴졌다.

최석영은 다른 직원들의 말을 들은 뒤부터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그리고 이런 최석영의 혼란에 최준호가 불을 지폈다.

“대경TV에 연락했어. 아까 말한 대로 사흘 뒤부터 시작되고 내일까지 종목 선택해서 보내 달라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

“내일이요? 방송은 사흘 뒤인데 종목선정은 내일까지란 말인가요?”

최준호는 지점장실에서 나와 최석영 자리까지 찾아와 최석영에게 일정을 이야기했다.

최준호의 이야기를 들은 최석영의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다른 직원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최석영을 바라봤다.

“당연하지. 자네만 아니라 거기 참가하는 사람이 스무 명쯤 된다고 해. 그 사람들에게서 종목과 선정이유 다 받으려면 당연히 하루 텀은 둬야지. 잘해. 매주 1등 전문가는 전화 연결해서 시장 분석에 대한 평을 듣는다고 하니까 주간평가 1등으로 인지도 좀 쌓고…… 전체 1등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그냥 주간 1등이라도 한번 해서 실적 좀 올려보자. 어?”

최준호는 더욱 울상이 되어 가는 최석영에게서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최석영을 보고 있으면 얼마 가지고 있지 않던 자신감도 떨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걱정 마십시오.”

최석영 자리에서 떨어져 앉아 있던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석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태연한 얼굴로 최준호에게 말했다.

“지점장님께서 기대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보여드릴 테니 지점장님은 고객들 응대만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지점에 준비된 고객상담 자리도 좀 넓혀주시고요. 방송을 보고 찾아오는 고객이 늘어날 테니까요.”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래. 배포가 그 정도는 돼야지. 걱정하지 말게. 고객이 상담받을 자리가 모자라 돌아가는 일은 없게 만들 테니까. 그럼 기대하겠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한진영의 모습에 불안감에 휩싸였던 최석영도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

한진영은 잠겨있지 않은 지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하며 문을 열었던 한진영이었기에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에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왜 불이 꺼져 있지?”

그런데 어두운 지점 안에 유독 한 곳에서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진영은 이상한 생각에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깜짝이야.”

한진영은 다크써클이 무릎까지는 내려올 것 같은 최석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과장님. 뭐 하세요? 불도 켜지 않으시고요.”

“진영 씨 왔어?”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최석영이 한진영을 반겼다.

한진영은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올 것 같은 최석영을 뒤로하고 지점 불을 켰다.

최석영은 밝은 빛이 익숙하지 않았던지 눈을 몇 번이나 끔뻑거렸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후 물었다.

“집에는 들어갔다 나오신 거죠?”

머리에 잔뜩 기름이 끼어있었다.

얼굴은 퀭해 보였으며 퀴퀴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이 있기에 집에는 들어갔다 나왔을 거로 생각하여 물은 것이었다.

“아니. 여기서 밤새웠어.”

“밤새 회사에 계셨다고요?”

“어.”

최석영은 대답하자마자 한진영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가 밤새 정리한 건데…… 이것 좀 봐봐.”

두껍게 정리된 자료를 최석영이 내밀었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서류를 받아 들고 생각했다.

‘그래. 예전에도 성실하기는 했어.’

한진영이 최석영을 좋게 본 이유 중 하나였다.

능력이 부족했지만 성실했던 사람이 바로 최석영이었다.

한진영이 최석영을 선택했던 이유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지금 정부에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 있는 걸 염려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풀어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건설주들이 어떨까? 아니면…….”

최석영은 한진영이 내려다보고 있는 종이를 직접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여기. 썩어도 준치라고 해운주도 괜찮은 거 같아. 고점에서 거의 반의반 토막이 나 있는 상태니까 기술적 반등을 노릴 수도 있을 것 같고…….”

“과장님. 오늘 어떤 종목을 방송사에 넘겨야 할지 고민하느라고 회사에 밤새신 거예요?”

“어…….”

최석영은 기름이 잔뜩 끼어 있는 머리를 긁었다.

“퇴근할 수가 있어야지. 첫 단추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첫 단추부터 손실이 많이 발생하면 복구가 안 되잖아.”

“그렇죠. 무조건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 않는 게 중요하죠.”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태양광은 어떨까? 이것도 지금 기술적 반등 구간이라고 보여. 게다가 기름값이 회복되면 가장 혜택을 받을 종목이고…….”

최석영은 다시 한진영에게 자기가 뽑아온 자료와 차트를 한진영에게 보여줬다.

한진영은 최석영이 건넨 자료를 덮고 최석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제가 보고 있을 테니 과장님은 회사 앞 사우나에라도 가셔서 씻고 오세요.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요.”

“사우나에 가라고?”

“설마 이대로 고객 응대를 하실 생각을 하신 건 아니시죠? 양복 어깨 부근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았어요.”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털었다.

“하긴…… 좀 그렇겠지? 그래. 그럼 난 얼른 다녀올 테니까 보고 있어. 내가 중요한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해놨으니까 그걸 중점적으로…….”

“알았으니 다녀오세요.”

한진영은 최석영의 등을 밀면서 지점 밖으로 최석영을 쫓아냈다.

그리고 최석영이 건넨 서류들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출근하며 하는 루틴을 시작했다.

말끔해진 최석영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한창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씻고 온 최석영은 돌아오자마자 자기 자리가 아닌 한진영의 자리로 직행했다.

“어때? 다 봤어? 뭐가 좋을 것 같아?”

할 일을 모두 마친 뒤에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진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최석영을 올려다봤다.

“어차피 조금 뒤에 지점장님께서 부르실 테니 그때 가서 말씀드릴게요.”

“지점장님이 우릴 부른다고?”

“첫 단추가 중요하단 건 지점장이 누구보다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저기 오시네요.”

테이크아웃 잔을 손에 든 최준호가 지점에 들어오자마자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마침 최 과장도 같이 있었네. 잘 됐어. 내 방으로 가세.”

한진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준호의 뒤를 따랐다.

최석영은 사우나의 열기가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때린 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점장실에 들어간 최준호는 들고 온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그는 막 문을 닫고 있는 최석영을 향해 말했다.

“자네 모습이 퀭한 걸 보니까 고민 좀 많이 했나 봐.”

“네. 밤새 고민했습니다.

“호오~. 좋아. 그럼 이야기해보게. 뭘 첫 추천주로 내놓을 텐가?”

최준호는 흥미로운 얼굴로 최석영을 바라봤다.

최석영은 그런 최준호의 시선을 받아 한진영에게로 건넸다.

고민하고 찾아보기는 많이 했지만, 결정은 한진영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추천주는 없습니다.”

“어?”

“뭐?”

한진영의 말에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진영을 동시에 바라봤다.

“뭐라고?”

최준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 뒤 다시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향해 또박또박 다시 대답했다.

“추천주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석영이 최준호보다 먼저 반응했다.

“내가 밤새 정리해서 자네에게 자료 넘겨줬잖아. 안 봤어?”

“네. 안 봤습니다.”

“뭐 이런…….”

최석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오는 걸 꾹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최대한 화를 누그러뜨린 상태로 한진영에게 다시 물었다.

“추천주를 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소리야? 당장 오늘 대경TV에 추천주와 이유를 보내야 한다는데…… 지점장님. 맞죠? 어제 저에게 그러셨잖아요.”

“맞아. 그랬어. 그런데…….”

최준호는 뒤에 자리한 책상에 두 팔을 짚은 채 몸을 책상에 기댔다.

그리고 한진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추천주를 아직 고르지 못했다는 건가? 아니면…….”

“말 그대로 추천주가 없다는 겁니다. 저희는 첫 번째 포지션을 무포로 잡겠습니다.”

“무포로? 첫 번째부터?”

“네. 지키는 쪽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들고 온 커피잔을 들어 커피로 입을 적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