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9화 (9/650)

9화 약속을 지켜라

최준호는 입에 여전히 담배를 문 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나에게만 말해보게. 자네 정체가 대체 뭔지.”

“그냥 신입사원일 뿐입니다.”

“어느 신입사원이 2차 핵실험 정보를 미리 알고 있나?”

“저도 핵실험이 있을 거란 건 몰랐습니다.”

“그럼 뭘 알고 있던 건데?”

“그날 그 시간에 큰 일이 닥칠 거란 것만 알고 있었죠.”

“그것만으로도 말이 안 돼. 대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혹시 국정원에 끈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최준호는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듯한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최준호를 향해 얇게 웃어 보였다.

최준호도 그런 한진영의 웃음에 마주 웃었다.

그리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향해 시선을 꽂아 넣었다.

한진영은 최준호가 이렇게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어떤 말을 최준호가 듣고 싶어 하는 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한진영은 일부러 한숨까지 내쉬며 최준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휴우~ 역시 지점장님을 속일 수는 없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정원은 아닙니다만, 비슷한 정보 소스를 가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역시!”

최준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나올 수가 없는 일이지. 내가 진작에 그럴 거로 생각했어.”

최준호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사무실을 서성였다.

“그래서 어딘가? 자네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누구야?”

지점장은 궁금증이 많았던 것처럼 보였다.

한진영은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최준호의 행동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예상했던 질문에 준비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어디서 누구에게 정보를 얻었는지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일은 저 위에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말을 하기도 어렵고 듣게 되시면 지점장님도 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도록 할 테니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최준호는 한진영의 대답에 서성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위를 가리키는 한진영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위에서 벌어진 일이지. 그걸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그래. 대답 못 할 만하다는 것 이해하네. 그래도…… 미리 나에게 언급이라도 해주지 그랬나?”

“출처를 말할 수 없는 정보는 듣지 않느니만 못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됐든 결과는 만족스럽게 나올 거로 생각하여 이야기하지 않은 겁니다. 혹시라도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화라니? 나 화 난 거 아니야.”

최준호는 한진영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자네 덕분에 우리 지점이 큰 실적을 올렸어. 그리고 실적보다 더 중요한 신뢰를 고객들에게 쌓을 수 있었고…… 자네에게 화를 내가 어찌 내겠나? 칭찬한다면 칭찬을 해야지.”

최준호는 한동안 한진영의 어깨를 힘차게 주무른 후 한진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에 대한 평가는 이미 좋게 적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김 사장님 관리 계좌도 넘겨받도록 해. 이미 약속한 내용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알았지?”

최준호가 기분 좋게 다시 한번 등을 두드리자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한진영이 지점장실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우진이 다가와 한진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지점장님이 뭐 좀 챙겨주던가?”

“챙겨주시기는요. 그냥 잘했다는 말뿐이시죠.”

“말로만? 자네 덕분에 채운 지점 실적이 얼마인데…… 그걸 그냥 말로만 입 닦고 끝냈다고?”

경우진은 지점장실을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지점장님 쪼잔한 건 알아줘야 해. 돈도 많이 버시면서…… 회식비도 본사에서 나온 거로 끝낸다며?”

“지점장님 주머니에서 뭐 나오는 거 보신 적 없으시잖아요.”

“그래. 그 주머니는 들어가기만 하지 나오지를 않아. 어휴.”

경우진과 이야기를 하며 자리로 돌아가던 한진영은 자기 자리를 지나쳤다.

“어디가?”

“황 대리님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황 대리에게?”

경우진은 살짝 눈을 돌려 황인석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건 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요. 괜찮습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웃고는 황인석의 자리로 걸어갔다.

장이 시작되며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들은 거침없이 황인석에게 걸어가는 한진영을 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진영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지난번 일로 극명하게 갈린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지점의 히어로가 됐으며 한 사람은 고객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친 인물이 되었다.

운이 좋게도 지난번의 일로 시흥지점뿐만 아니라, 다른 지점과 본사도 심각한 피해를 보는 바람에 묻혀서 목숨을 연장하게 된 황인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에 잘렸을 정도로 황인석이 친 사고는 작지 않았다.

그러나 살았다고 산목숨이 아니었다.

손해를 입힌 고객들에게 사과 인사와 보상 문제로 심각한 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황인석에게 한진영이 찾아갔다.

황인석이 곱게 한진영을 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예상된 직원들은 조금 뒤 벌어질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한진영과 황인석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사장님. 제가 그동안 사장님 계좌를 굴리며 얼마나 많은 이득을 남겼습니까? 이번에는 정말 천재지변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런 천재지변을 인간인 제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황인석은 아침부터 전화기를 붙잡고 고객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때는 정말 계좌를 비워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장님. 주변에 물어보세요. 다른 사람은…… 아…….”

다급하게 통화하던 황인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네. 저희 지점은 큰 피해를 비껴가기는 했습니다. 네. 네. 이득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네.”

황인석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말이 나오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충 무슨 말이 나오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같은 지점에 돈을 예치하여 일임 계좌를 맡겼는데 누구는 이득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본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손해도 조금 손해가 아니었다.

가만히 가지고만 있었어도 오히려 수익을 봤을 계좌를 다 털어버리는 바람에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이득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에 크게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화가 잔뜩 나 있는 듯한 목소리가 그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황인석 앞에 서서 가만히 그의 전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아무런 대답하지 못하고 이야기만 듣던 황인석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지점장님께…… 아닙니다. 제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 바로…… 바로 새로운 담당자를 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인석은 전화기를 끊고 눈을 감았다.

오늘로 벌써 다섯 명의 고객을 잃어버린 것에 황인석도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었다.

“대리님.”

황인석 앞에서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한진영이 먼저 황인석을 불렀다.

황인석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위로 치켜떴다.

“왜?”

가뜩이나 일이 안 풀려 쳐지는 상황에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봐서 그런 것인지 황인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김 사장님 계좌를 넘겨주셔야지요.”

“김 사장님? 어떤 김 사장님?”

황인석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알아듣지 못하게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뭔 김 사장님을 말하는 거야? 그리고 넘기라니? 뭘 넘기라고?”

“모르시는 척하시는 겁니까?”

“아니. 모르는 척이 아니라 똑바로 이야기해야지. 어떤 김 사장님을 말하는 거야? 저기 은행동에서 카센터 하시는 김 사장님? 아니면 신현동 편의점 김 사장님? 어떤 김 사장님을 이야기하는지 정확하게 말해야지 알아들을 거 아냐.”

황인석은 고객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진영에게 풀고 싶다는 듯이 점점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천동 김 사장님을 말하는 겁니다. 모르고 있지는 않으실 테고…… 약속을 한 만큼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쾅!

황인석은 책상을 내려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속을 누가 했다는 거야?”

창구 안에서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커다란 소리에 시흥지점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황인석에게로 모였다.

터질 줄 알고 있었던 직원들은 물론이고 대부분 지난 사태를 경험했던 객장의 고객들도 창구 안쪽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관심을 보내기 시작했다.

황인석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움찔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객장의 고객들까지 아직 안 좋은 인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다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그런 황인석과 달리 한진영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은 듯했다.

그는 마침 일어선 황인석이 잘됐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십시오.”

“뭘 달라는 거야?”

“김 사장님이 맡긴 일임 계좌 말입니다. 저에게 넘기십시오.”

“그걸…… 왜 넘겨? 나는 약속한 적 없어. 너하고 지점장님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 나눈 거 아냐? 나는 동의한 적이 없다고…….”

황인석은 주변 시선을 신경 쓰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내밀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건 지점장님과 하실 말씀이시고요. 이제 넘기십시오. 저도 준비할 게 많아서 빨리 받아야 나머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던 황인석이 점점 한계치까지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구경만 하던 직원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에라도 폭발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황인석을 말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때 지점장실 문이 열리며 최준호가 밖으로 나왔다.

“네? 네? 오셨다고요?”

최준호는 공손히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며 걸어 나왔다.

그는 서 있는 직원들을 한차례 훑어봤다.

왜 일하다 말고 자리에 서서 이러고 있는지 눈으로 물은 최준호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휴대폰을 두 손으로 잡고 급히 창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점 문을 직접 열고 문 앞에 선 채 옷을 다듬었다.

“뭣들 해? 자리에 앉아. 일들 안 해?”

문 앞에 서서 직원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최준호로 인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말았다.

“너 나하고 조금 뒤에 이야기 좀 하자.”

자리에 앉으며 황인석은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뭐 하러 이야기합니까? 그냥 주고 끝내십시오.”

“야!”

여전히 황인석 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황인석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최준호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김 사장님.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마치 나라님이라도 온 듯이 최준호가 허리까지 숙이며 찾아온 김영수 사장을 향해 크게 인사했다.

황인석과 한진영 모두 최준호의 목소리를 듣고 문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 지점장. 오랜만이네그려. 잘 지냈지?”

“다 사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지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말씀하셨으면 제가 직접 사장님 사무실로 찾아갔을 텐데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누가 오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좀 구경도 하고 싶은 생각에 온 거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되네. 혹시 내가 와서 불편한 건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언제나 사장님의 방문은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들어오시지요.”

최준호는 김영수를 에스코트하며 지점 안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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