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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같이 누울래? (94/94)


  • 94화. 같이 누울래?
    2023.09.02.


    이벨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불그스름해진 볼이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그의 말에 당황해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 모습이 칼리프의 눈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나직이 소리 내어 웃자, 어리벙벙해 있던 이벨리아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음흉한 눈을 하든 예쁘게 웃든 둘 중 하나만 해. 음흉한 눈으로 그렇게 웃는 거 진짜 안 어울려.”

    이벨리아가 투정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음흉한 척 이어진 그의 말이 짓궂은 장난이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칼리프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두 눈 가득히 담곤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투정 가득한 모습까지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진한 입맞춤 끝에 그녀를 내려다보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맞춤의 여운을 느끼는 것처럼 얕게 나부끼던 속눈썹이 위로 들썩거렸다. 이내 그 사이로 드러난 녹안엔 토라진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황후궁에 있었어?”

    “그럴 리가. 금방 자리 마무리하고 황태자궁에 있다 오는 길이야. 이렇게 늦게 올 생각은 없었는데, 펠릭스랑 대화가 길어져서.”

    “아…….”

    잠시 먹구름이 걷힌 듯했던 이벨리아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감정이 배어들었다. 칼리프는 자못 묵직해진 마음을 심호흡으로 다스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벌써 네 힘을 각성하기 위해 무언가 했다던데.”

    “……응. 큰 수확은 없었는데, 그래도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운을 감지하긴 했어.”

    “괜찮았어?”

    “뭐가?”

    “그냥, 불편했다거나 불쾌했다거나…… 네가 언짢을 만한 일은 없었냐고 묻는 거야.”

    칼리프가 평소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물었다. 사실 그녀에게 진짜 묻고 싶은 건 너무 많이 힘든 건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다.

    저 하나만으로 그녀를 벅차게 만드는 사람은 충분했다. 그런데 별안간 펠릭스까지 그녀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생긴 상황이지 않은가.

    펠릭스의 바람까지도 제가 이벨리아에게 지운 짐 같아서 칼리프는 너무도 마음이 불편했다.

    “펠릭스랑 단둘이 있던 게 마음에 안 들었어?”

    말의 의미를 고민하던 이벨리아가 불현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의 말을 엉뚱하게 해석한 듯했다.

    그게 퍽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칼리프는 그냥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게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칼리프는 괜스레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엉뚱한 발상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굳이 정정하여 괜스레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복잡한 그녀의 머릿속을 환기시켜 줄 수 있다면 오늘은 그거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의 의도는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이벨리아의 말이 다시금 그의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도 그랬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네가 황후 폐하를 만나러 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고.”

    칼리프가 말없이 눈만 끔벅였다. 황후와의 대면을 이벨리아가 달갑게 여길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이런 솔직한 속내를 듣게 될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말로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혼란을 눈치챈 듯 이벨리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리다 입술을 떼었다.

    “그냥…… 나를 미워하는 분이잖아. 줄곧 그랬던 분이다 보니까 괜히 불안했어. 너도 리우리안처럼 폐하의 말에 휘둘려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하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칼리프는 마음이 미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간 이벨리아의 마음을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한 것 같았다.

    이벨리아가 유스티아와의 만남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그저 단순히 그녀와 황후의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입장만 놓고 봐도 그랬다. 이벨리아와 유스티아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캐롤라인 후작가와 가넷 공작가의 중심인물들이었다.

    그러니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고만 여겼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녀의 불안과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칼리프는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곤 이벨리아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럴 일 없어.”

    “알아.”

    “나는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아니잖아.”

    “응, 그것도 알아.”

    “난 네가 불안해할 일 같은 건 절대 만들지 않아. 그게 황후를 대면하고 넷트 영애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

    “내가 그렇게 해서 네가 편해질 수 있다면 난 몇 번이고 그 작자들을 상대할 거야.”

    “…….”

    “그래도 빠른 시일 내에 상황을 정리해 볼게. 내가 그들을 만나는 건 널 위해서지만, 네겐 그 상황 역시 불편이고 불안일 수도 있으니까. 널 위해 목적을 품고 가진 만남이라 하더라도 널 힘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칼리프는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 따뜻한 마음이 그녀에게 가 닿기라도 한 것일까. 이내 이벨리아가 입술을 휘어 올리곤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칼.”

    “…….”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괜한 투정을 부렸나 봐. 그렇게 말해 줘서 너무 고맙고, 또 그런 말을 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칼리프를 보며 말을 잇던 그녀가 불현듯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이 꼭 심경이 복잡한 듯 보였다. 그래도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아닌 척 노력하는 것 같았다.

    칼리프는 그런 그녀를 품 안에 힘껏 가두었다. 당겨 안는 대로 끌려와 주는 몸짓이 어찌나 어여쁘게 느껴지던지 그 순간 느꼈던 설렘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 가벼이 입을 맞추곤 몸을 떼었다. 다리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자 피로에 젖은 안색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제 진짜 그만 누워. 자는 거 보고 갈게.”

    칼리프는 그녀의 머리를 한번 흩뜨리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피곤하긴 했는지 이번엔 그녀 역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곧 침대 위에 누운 그녀가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시선을 위로 들었다.

    “넌 안 피곤해?”

    “버틸 만해.”

    “그러지 말고 이만 돌아가. 너 무척 피곤해 보여.”

    “잠들면 그때 갈게.”

    칼리프는 걱정 어린 이벨리아의 말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잠깐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오늘은 저보단 그녀에게 더욱 피곤했을 하루였다. 잠들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거로나마 고단했을 그녀의 하루를 편안하게 마무리해 주고 싶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계속 고집부릴 거지?”

    “알면 이만 눈감았으면 좋겠는데.”

    칼리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곤 이내 그녀의 눈두덩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힘주어 누른 것도 아니건만 손바닥 아래에서 가지런히 내려가는 속눈썹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제야 칼리프는 손을 떼어 내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음 편히 감상했다.

    이벨리아는 그저 눈을 감고 있어도 무척이나 어여뻤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칼리프는 설레는 마음을 도통 감출 길이 없었다.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벨리아의 모습이라니, 절대 아무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라서 허락되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걸 두 눈에 가득 담고 있다는 사실이 잠시 잊었던 욕망을 들끓게 만들었다.

    순백의 그녀를 보며 느끼기엔 짙은 죄책감이 일 정도로 추저분한 감정이었다.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그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는데, 일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던 이벨리아의 미간으로 균열이 일었다. 곧 그녀가 눈을 뜨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너도 같이 누울래?”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놀란 칼리프가 그답지 않게 눈을 크게 떴다. 설명 없이도 의미를 이해한 이벨리아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너도 종일 피곤했을 텐데, 불편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옆에…… 옆에 누워 있다가 가.”

    “……그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걱정해야 할 일을, 벌일 거야?”

    짐승의 포효를 닮은 듯한 칼리프의 음색에 이벨리아가 뒤늦게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칼리프가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이렇게 보채고 더하지 않아도 그의 욕망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걸 견디고 억누르는 일은 지금껏 해 온 어떤 일보다 힘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벨리아는 여전히 말간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 이렇게 앉혀 두고 나만 자려니까 마음이 불편해.”

    티끌 하나 없는 시선으로도 모자라 순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자꾸만 자신을 유혹했다.

    한참을 말없이 이벨리아만 보던 칼리프는 결국 한숨과 함께 그녀의 옆으로 몸을 누였다.

    침대 끝에 몸을 걸친 거나 다름없는 불편한 자세였다. 그의 속도 모르고 이벨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 안겨 왔다. 그러곤 만족감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뜻하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음색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아도 들끓기 시작한 칼리프의 욕망을 부추겼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인내했다.

    눕지 않으면 밤새 뜬눈으로 지새울 것 같더니, 품에 안기기 무섭게 그녀의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 묻어났다. 조금만 버틴다면 금방 잠들 것 같았다.

    칼리프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제게 안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침실 안을 가득 울렸다.그녀가 잠들었으니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눈두덩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안 되는데,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던 칼리프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이내 남녀의 숨소리가 뒤섞인 채 침실을 가득 메웠다. 실로 오랜만에 취해 보는 숙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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