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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밤늦은 야심한 시각 (93/94)


  • 93화. 밤늦은 야심한 시각
    2023.09.01.


    “지금부터 내 에너지를 네게 주입할 거야. 네 몸 안에 있는 신성력을 찾는 것 그리고 네가 그 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야.”

    펠릭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다정한 음색이라고는 하나 마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애써 굳건하게 마음을 다잡곤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기 무섭게 펠릭스의 손끝에만 고여 있던 푸른 기운이 곧 이벨리아의 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인데도 생소한 광경에 몸이 움찔 떨렸다. 밀려오는 불안에 몸이 움츠러들 때마다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던 펠릭스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벨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곤 입 안에 고여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펠릭스의 힘을 느껴 보기 위해 노력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그가 말한 신성력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이 있다면 무언가 기분 좋은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것 같단 거였다.

    펠릭스에게 손목을 내어 준 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끝에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이전과 비교해 훨씬 좋아진 펠릭스의 안색이 보였다.

    “몇 번을 경험해도 정말 놀랍군.”

    펠릭스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잡고 있던 이벨리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이런 대단한 능력이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가 있었지?”

    “……이번에도 내가 힘을 증폭시켜 되돌려 줬어요?”

    이벨리아는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펠릭스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넌, 여전히 네 안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네. 하지만 기분 좋은 기운이 몸 안에 흐르는 느낌은 들었어요. 그게 펠릭스가 주입한 힘의 기운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운이에요.”

    이벨리아는 풀 죽은 표정을 하면서도 똑 부러지게 대답해 주었다. 펠릭스의 만면 가득 아쉬운 기색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느껴지지 않은 힘을 느꼈다고 대답할 순 없는 거니까.

    “그래도 네가 무언가 느끼긴 했다니까 반가운 일이긴 하네. 아마 방금 네가 느낀 건 내가 주입한 기운일 거야. 하지만 그건 곧 네 신성력이기도 하니까 그 기분을 잘 기억했으면 좋겠어.”

    펠릭스는 아쉬운 표정을 금세 지운 채 그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이벨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펠릭스의 표정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의 안색이 곧 오늘의 성과가 될 터였다.

    이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

    후작저로 돌아온 렐리아는 준비된 저녁 식사도 마다하고 침대 위에 누웠다.

    “하아.”

    폭신한 이불이 몸을 감싸기 무섭게 참았던 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이제야 줄곧 긴장감에 경직됐던 몸이 조금쯤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무척이나 긴 하루였다. 길게 느껴질 만큼 끔찍한 하루이기도 했다.

    렐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캄캄해진 시야 위로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리우리안의 얼굴이 그려졌다.

    원래라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 무섭게 미소가 만개해야 맞는 일인데, 오늘은 웃음은커녕 마음조차 편하지 않았다. 줄곧 불편하게 경직되어 있던 리우리안의 모습 때문이었다.

    [전하, 진작 찾아뵙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이제야 말씀드려요.]

    […….]

    [제 경솔한 언행으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해 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그날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리우리안에게 건넨 말은 끝끝내 붙들고 있던 자존심을 몽땅 다 내려놓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곧 이벨리아에게 경솔하게 굴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죽어서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내쳐지지 않겠다는 간절한 바람 하나로 그 말을 기어이 내뱉었다.

    드웨인 공작이 자신을 버리겠다고 결정한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리우리안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다. 그게 동정심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동정받는 것보다 지금껏 자신을 우러러보았던 이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이 더 끔찍했으니까.

    리우리안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체면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되돌리는 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벌어 천천히 하면 될 일이었다.

    도대체 이벨리아가 어떤 식으로 간악한 술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리우리안이라면 분명 다시 자신을 봐 줄 것이 분명했다.

    평생을 저 하나만 마음에 품었던 리우리안이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서로였기에 잠깐쯤은 싫증이 날 수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일 뿐이었다.

    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는 달리 귓전에서 메아리치는 리우리안의 목소리는 잦아들질 않았다.

    [……영애가 지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영애의 말처럼 오늘의 다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한참을 뜸을 들인 후에야 돌아온 그의 대답은 하나같이 마지못한 음색이었다. 마치 제게선 완전히 마음이 떠나기라도 한 듯 무미건조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미어지고 눈가가 홧홧해졌다. 하지만 그 감정에 취해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엔 이미 자신은 궁지로 몰릴 만큼 몰린 후였다.

    “……괜찮아. 오늘의 굴욕감은 언젠가 반드시 되돌려 주면 그만이야.”

    렐리아는 양손을 힘주어 그러쥐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래도 하나 희망적인 건 황후의 신임까지 잃은 건 아니지 않던가.

    [내일은 영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내게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니?]

    황후궁을 나서기 전 유스티아가 제게 건넸던 말만 보아도 그랬다. 확실히 유스티아는 아직 자신을 완벽하게 놓지 않았다.

    드웨인 공작까지 변심한 상황에 무슨 이유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제겐 절망스러운 와중에 환하게 빛나는 희망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렐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입맛은 전혀 돌지 않았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유스티아의 마음을 확실히 붙잡고 훗날을 위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선 힘을 내야 했다.

    렐리아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서둘러 시녀를 불렀다.

    ***

    늦은 밤, 칼리프는 밀려오는 피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자비궁으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오늘 하루가 이벨리아에겐 무척 고단했을 것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시간이 늦은 탓인지 태자비궁엔 최소한의 인력만이 남아 있었다. 그를 발견한 기사와 시종들이 예를 갖추려고 하는 게 보였지만, 칼리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조용히 이벨리아만 보고 가고 싶었다. 더욱이 유스티아를 비롯한 그 세력들의 시선을 당분간 이벨리아에게서 돌려 달라던 펠릭스의 말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이벨리아를 찾는다는 소문을 만들어 낼 입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좋았다.

    그의 뜻을 알아챈 기사들이 가볍게 묵례를 해 왔다. 칼리프는 그들을 향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곤 지체 없이 태자비궁 안으로 들어섰다.

    속도를 더하자 이벨리아의 침실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는 주변을 슥 살피곤 서둘러 그녀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까지 꼭 닫고 나자 등 뒤로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곧장 느낌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건지 침대에 앉아 있는 이벨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칼?”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은 놀란 듯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칼리프는 그 앞까지 거침없이 다가갔다.

    “자려던 참이었나 보군.”

    “응. 그럴 시간이잖아.”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포옹이었다. 마치 그와 단둘이 되었으니 그에게 안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칼리프는 화답하듯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이라곤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새하얀 목덜미에 코를 박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익히 알고 있던 그녀의 체취가 단박에 콧속 깊숙이 채워졌다. 그것만으로 줄곧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칼리프는 자연스레 입매를 휘어 올리곤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주 조금 힘을 더했을 뿐인데, 그녀의 몸이 가뿐하게 위로 들렸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침대 앞에 닿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고, 그 위에 이벨리아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누워.”

    “응?”

    “내가 오지 않았으면 누웠을 거잖아. 그러니까 원래 하려던 대로 누우라고.”

    “그치만 네가 왔잖아.”

    “여길 찾은 내 목적에 네 잠을 방해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칼리프가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곤 검지를 펴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힘에 못 이기는 척 뒤로 밀리던 이벨리아가 이내 그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

    “나 보러 온 거 아니야?”

    “맞아. 그래서 보고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바로 재운다고?”

    “안 자면, 나랑 다른 거라도 할 거야?”

    칼리프가 눈매를 가늘게 뜬 채 물었다. 동시에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바르르 흔들렸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칼리프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잠시 관망하듯 이벨리아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다시금 되물었다.

    “뭘 할 생각이지? 밤늦은 이 야심한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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