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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이벨리아를 위한 일 (92/94)


  • 92화. 이벨리아를 위한 일
    2023.08.31.


    “……영애가 지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칼리프가 제법 너그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렐리아에게 그런 대답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렐리아와 나란히 앉아 있는 지금의 상황도 영 마뜩잖았다.

    유스티아가 급히 찾는다기에 무언가 꿍꿍이를 꾸몄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게 렐리아와 관련된 일일 줄은 몰랐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이벨리아가 모든 사실을 알았고, 자신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와중이지 않은가.

    이벨리아의 마음만 확고하다면 렐리아를 향한 태도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곳으로 향하기 직전 들었던 펠릭스의 말이었다.

    [당분간 시간을 벌어야 해.]

    이벨리아가 바로 앞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펠릭스는 거침없이 제 뜻을 전해 왔다. 유스티아가 찾는다는 말에 그 역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 탓인지 언뜻 강압적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절박한 감정이 그득 배어 있었다. 그래서 차마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슨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거지?]

    [이벨리아가 뭐든 노력하겠다고까지 해 주니, 적어도 이벨리아가 제 능력을 각성할 때까진 그들의 시선이 최대한 이벨리아에게 향하지 않았으면 해. 그래야 이벨리아도 각성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테니까.]

    펠릭스가 퍽 맹목적인 투로 대답했다. 칼리프를 향한 말이긴 했지만, 이벨리아에게 부담이 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칼리프는 본능처럼 이벨리아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한껏 긴장한 얼굴을 한 그녀의 눈빛이 조마조마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마음 같아선 펠릭스의 말에 반기를 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실랑이만 길어질 것 같아 맞닿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복잡할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의 부담은 지우고 싶지 않았다.

    침묵하는 거로 펠릭스에게 대답을 돌려주곤 그 길로 태자비궁을 나서서 이곳으로 향한 것이었다.

    우선 펠릭스의 요구에 맞는 대답을 렐리아에게 돌려주긴 했지만, 탐탁지 않은 마음은 조금도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염치도 없이 무척 기뻐요.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전하께 드린 다짐은 꼭 마음 깊이 새길게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 번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온통 물기로 가득한 렐리아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의미 없이 뱉은 그의 말에 감격이라도 한 듯했다.

    우습고 같잖기 그지없었다. 절로 눈썹 사이에 주름이 팰 것 같았지만, 칼리프는 양손을 꽉 그러쥔 채 인내했다.

    “영애의 말처럼 오늘의 다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이에요.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전하.”

    어느덧 렐리아의 눈동자가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살짝만 눈꺼풀을 끔벅여도 방울진 눈물이 볼 위로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칼리프는 짧게 맞췄던 시선을 매정할 정도로 단박에 피했다. 펠릭스의 말대로 당분간 이들의 시선이 이벨리아에게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이들을 방심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최대한 자극하지 말아야 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 주는 것이 최선일 터였다.

    만약 렐리아가 운다면 그 상황의 최선은 눈물은 닦아 주지 않더라도 따뜻한 위로 정도는 해 줘야 할 텐데 굳이 계속 시선을 맞추며 그 상황을 자초하고 싶진 않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구나. 내 마음이 어찌나 기쁜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때마침 유스티아가 손뼉까지 치며 기쁨을 표현해 왔다. 칼리프로선 렐리아에게 시선을 거두기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두 분이 모처럼 함께 보내는 시간에 저를 찾아 주셔서 저 역시 지난 일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칼리프는 최대한 유스티아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을 수 있는 형식적인 말을 골라 뱉었다. 다감하게 뱉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무심한 표정까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기꺼운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것으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는 다한 듯싶었다. 두 사람과 더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조금 곤욕스럽긴 했지만, 그게 이벨리아를 위한 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칼리프는 불편한 속내는 애써 억누른 채 유스티아를 향해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오늘 당장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벨리아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에게 여유가 많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펠릭스가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벨리아를 향해 말했다. 고요한 응접실에 울리는 소리라곤 제 것뿐이니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이벨리아의 눈동자를 초점을 찾지 못했다.

    “이벨리아.”

    펠릭스가 눈매를 가늘게 늘리며 다시 한번 이벨리아를 불렀다. 이번에도 이벨리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펠릭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칼리프를 염려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황후궁으로 향한 사실이 못내 탐탁지 않은 것이 거나.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그녀로선 칼리프가 황후를 만나러 간 것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원래라면 그녀를 배려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말했다시피 여유가 많지 않았다.

    황후궁으로 향한 칼리프가 과연 어떻게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칼리프가 제 몫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고 하더라도 이벨리아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 내지 않는 한 그들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할 수 없을 거란 거였다.

    “칼리프는 널 위해 황후궁으로 간 거야.”

    잠시 고민하던 펠릭스가 부러 칼리프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녀의 정신이 칼리프 때문에 흐려진 거라면 그녀를 일깨울 수 있는 것도 칼리프일 거라고 확신했다.

    펠릭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허공만 멀거니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일시에 펠릭스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에 펠릭스는 밀려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펠릭스의 음색에 한숨이 조금 섞여 있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단호하게 들렸다.

    “칼리프라고 너랑 같이 있다 황후궁으로 가야 하는 마음이 편했겠어? 그런데도 지체 없이 걸음 한 건 널 위해서일 거야.”

    “…….”

    “물론 내가 한 말이 그의 등을 떠밀긴 했겠지만, 내가 떠미는 대로 밀려 준 이유는 결국 너 때문이었을 거라고.”

    “…….”

    “너도 칼리프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있잖아.”

    펠릭스가 피로하다는 듯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제 앞의 펠릭스가 온전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아는 칼리프라면 펠릭스가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칼리프가 별다른 말 없이 펠릭스의 뜻을 따라 움직여 준 건, 그렇게 하는 편이 분명 어떤 이유로든 이벨리아 자신에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별안간 황후궁으로 떠난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그가 자신을 위해 그리 선택한 것이라면, 저 역시 이 시간을 그를 위해 쓰는 것이 옳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이벨리아는 제법 굳건해진 눈빛으로 펠릭스를 보며 물었다. 그제야 펠릭스의 안색 역시 만연했던 피로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듯했다.

    “내 말에 집중할 수 있겠어?”

    “네.”

    “좋아. 그럼 우선은 네 머릿속에 있는 칼리프의 생각부터 몽땅 지우는 게 좋겠군.”

    펠릭스가 이벨리아에겐 결코 쉽지 않을 제안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건넸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주저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애초에 칼리프의 생각을 지운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펠릭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만드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 행동을 한참 반복하자 어수선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야 이벨리아는 감았던 눈을 뜨곤 펠릭스를 보았다.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눈을 뜨기 무섭게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준비가 좀 됐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이벨리아를 향해 물었다. 이벨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릭스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실례 좀 하지.”

    펠릭스의 말에도 이벨리아는 자신을 향한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붙들 것처럼 거침없이 뻗어 온 손은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짧게 정적이 흐르고 곧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푸른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금 그녀를 향해 뻗어지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종종 보았던 모습이니 놀랍진 않았지만, 그 손이 자신을 향하니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챈 펠릭스가 그녀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안심하라는 듯 말을 건네 왔다.

    “놀라지 마.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일 뿐이야. 절대 너를 해치거나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약속을 말하는 펠릭스의 눈빛이 지금껏 본 적 없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온몸 가득 차올랐던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금 손을 뻗었다. 그런 그가 이내 이벨리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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