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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진심 어린 사과 (91/94)


91화. 진심 어린 사과
2023.08.30.


렐리아는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로 황후궁 응접실로 향했다. 앞으로 모아 잡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안을 감출 길이 없었다.

황궁을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벌써 한참 전의 일이었다. 드웨인 공작의 축객령으로 꽁무니 빼듯 황후궁을 나선 이후로 유스티아는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렐리아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날 드웨인 공작은 황후와 이야기를 나누던 자신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분명 공작보다 높은 위치인 황후와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는 유스티아에게 짧은 말로나마 양해를 구하지도,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다짜고짜 자신을 내쫓듯 내보냈고, 유스티아는 드웨인의 무엄한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다.

유스티아는 제국의 황후이긴 하나 드웨인 공작 앞에선 꼼짝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언제나 드웨인의 결정이 곧 유스티아의 뜻이 되었다.

그러니 드웨인의 축객령은 곧 유스티아의 입장이 되었을 터. 가차 없던 드웨인의 축객령은 자신의 가치가 바닥까지 추락했음을 의미했다.

렐리아의 유추는 곧 현실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을 찾던 황후는 그날 이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절망과 좌절로 빼곡하게 얼룩진 렐리아의 하루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평생을 리우리안의 암묵적 연인으로 인정받던 자신인데, 이제 와 헌신짝처럼 내버려질 거라곤 상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드웨인이 자신을 버리기로 작정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가치를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밤낮으로 고심하던 차에 유스티아에게서 전갈이 온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기회가 눈앞에 드리웠으니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절박한 기회이니만큼 사소하게라도 실수를 하게 될까 봐 잠깐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초조함으로 가득한 걸음은 이내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앞장서 길을 안내하던 시녀장이 곧 소리를 내었다.

“폐하. 렐리아 영애께서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유스티아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문안에서 건너온 소리라 언뜻 뭉개진 듯 들렸지만,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렐리아의 긴장은 더욱 배가되었다.

렐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녀장이 열어 준 문 사이를 응시했다. 차를 들이켜는 듯한 유스티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폐하.”

렐리아는 유스티아의 앞에 서서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정수리에 박힌 황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 용기는 쉬이 생기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영애. 어서 앉으려무나.”

바로 앞에서 듣는 유스티아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도리어 다른 때보다 더욱 상냥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분명 지난번 드웨인의 태도는 자신을 내치겠다는 의미로 가득했다. 그게 드웨인의 뜻이라면 유스티아 역시 그와 뜻을 같이해야 맞았다.

그런데 지금 유스티아에게선 그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치긴커녕 제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렐리아는 혼란함을 감추지 못한 채 우선 유스티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최근에 즐겨 마시는 차인데, 어서 들어 보렴. 향이 아주 좋단다.”

유스티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온통 온기로 가득했다. 유스티아의 태도와 눈빛은 물론 몸을 감싸는 응접실의 분위기까지도 그랬다.

무엇 하나 제게 호의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문제는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렐리아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목을 축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유스티아의 목소리가 건너 왔다.

“그사이 안색이 몰라보게 나빠졌구나.”

“……컨디션을 회복하는 중인데, 하옥되었을 때 야위었던 것이 돌아오지 않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에요.”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후작 영애가 변변찮은 감옥에 한참이나 갇혀 있었는데, 몸도 마음도 고되었을 거야.”

유스티아가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유감의 뜻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미안한 기색으로 만연한 모습이었다.

렐리아는 당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통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스티아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여기까지 걸음 해 주어 고맙구나, 렐리아.”

“그런 말씀 마시어요. 제게 폐하의 부름은 언제나 기쁨인걸요.”

“영애가 그렇게 말해 주니 너무나도 기쁘구나. 오늘 이렇게 와 달라고 한 건 지난번에 내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란다.”

“……지난번에, 했던 말이요?”

렐리아가 퍽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유스티아에게 되물었다. 결코 유스티아에게 달가울 반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기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게 리우리안을 만나 사과도 할 겸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그 문제로 상의드린 건 맞지만…….”

말끝을 흐린 렐리아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그 일이라면 이미 드웨인이 반대한 일이었다.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축객령이 내려졌으니, 제 뜻을 반려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제 와 왜 그 문제는 다시 언급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 말을 바로 들어주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단다. 더욱이 하옥된 일로 리우에게 많이 서운했을 텐데, 먼저 사과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 준 일이 어찌나 어여쁘던지.”

“……아닙니다. 제 불찰로 일어난 일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이 어여쁜 거란다.”

유스티아는 겸손한 척 고개를 내젓는 렐리아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녀를 향한 칭찬을 마다치 않았다.

하지만 유스티아의 신경은 온통 응접실 쪽으로 향해 있었다. 기다리는 소식이 있던 탓이었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본 유스티아는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이 곧 전해질 거란 확신을 안곤 다시금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영애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단다.”

“자리를, 요?”

“그래. 네게 전갈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궁에도 소식을 전했으니 곧 리우가 도착할 거란다.”

“전하께서요?”

놀란 얼굴로 되묻는 렐리아를 향해 유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그사이 렐리아의 마음이 단단히 틀어지기라도 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렐리아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기대가 실려 있었다.

유스티아는 기껍게 눈매를 휘어 접었다. 그때, 응접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태자 전하 드셨습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유스티아는 반갑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문이 열리고 리우리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리우, 왔구나.”

렐리아가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반가운 걸음이 한달음에 아들의 앞으로 향했다.

“……손님이 와 계셨군요.”

아들의 목소리에 언짢은 기색이 잔뜩 묻어났지만, 유스티아는 개의치 않았다. 일련의 일로 렐리아에게 마음이 상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렐리아는 아들의 첫사랑이었다.

더욱이 리우가 원하는 게 드웨인 공작과 캐롤라인 후작을 중심으로 나뉜 대신들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는 거라면 별안간 이벨리아를 대했던 태도처럼 렐리아 역시 마냥 등한시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 말은 곧 렐리아에게도 기회는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렐리아가 그 기회를 잡도록 도와야 했다.

드웨인이 렐리아를 버리겠다고 결정한 이 시점에 자신이 렐리아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그녀가 리우리안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면 결국 렐리아는 완벽한 제 사람이 될 터였다.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머지않은 미래에 드웨인과 가드로의 앞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웃어 보일 수 있을 테니.

“리우, 우선 앉으렴.”

유스티아는 리우리안의 손을 붙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여실하게 전해졌지만, 제 손을 뿌리치진 못했다.

그것만으로 유스티아는 희망의 빛을 본 기분이었다. 그녀는 뜸 들이지 않고 아들의 손을 잡아당겼다. 마음이 달라지기 전에 렐리아의 옆에 앉혀야 했다.

“……전하.”

리우리안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렐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떨어질 줄 모르던 눈빛에선 그리움의 감정이 가득 묻어났다.

유스티아는 그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영애.”

떨떠름하게 돌아온 대답에 렐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했다. 무시당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떨떠름한 뉘앙스로나마 들려온 리우리안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전하…….”

렐리아는 눈을 힘주어 부릅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치 없이 차오른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리우리안이 그런 걸 원할 리 없었다. 지금은 가능한 한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돌아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최선일 터였다.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힘주어 꾹 물었다 놓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전하, 진작 찾아뵙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이제야 말씀드려요.”

“…….”

“제 경솔한 언행으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그날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진심 어린 사과가 응접실을 가득 울렸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렐리아의 시선은 물론 유스티아의 눈길까지 리우리안에게 향했다. 그는 두 여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허공만 멀거니 응시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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