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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할 수 있어요 (90/94)


90화. 할 수 있어요
2023.08.29.


“내, 능력이요?”

이벨리아가 혼란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조가 너무도 의미심장했다.

동물로 변신을 하고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그는 이미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니,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너도 봤잖아. 네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펠릭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에 이벨리아는 더욱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내 도움이 필요한 건데요?”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이유에 대해선 천천히 설명할게.”

삽시간에 그녀를 불안 속에 집어넣은 사람이 하기엔 불친절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펠릭스를 채근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잠깐이라도 지금의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펠릭스에게 듣게 될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상태론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내가 오늘 너를 찾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말했다시피 난 네 능력이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

“네가 하루빨리 네 능력에 대해 각성했으면 좋겠어.”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무엇 하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아직은 저를 두고 ‘능력’이 있다고 하는 말조차 편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각성이라니…….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펠릭스는 이벨리아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너만 괜찮다면 네가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도울까 해. 각성은 물론 네가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훈련도 겸하면서 말이야.”

훈련이라는 말은 태자비가 된 후에는 물론 영애 시절에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이벨리아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혼란에 조금씩 지쳐 가는 스스로가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심경이 연거푸 내쉬어진 한숨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에 펠릭스가 지체 없이 말을 덧붙였다.

“확신할 순 없지만, 네가 각성을 하고 나면 잊고 있던 기억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던 이벨리아의 시선이 단박에 펠릭스를 향했다. 너무도 강렬한 눈빛에 펠릭스가 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했지만, 확신할 순 없어. 다만, 네가 기억을 잃은 게 정말 갑작스러운 신성력의 발현과 네 능력 때문이라면…….”

펠릭스가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망설였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불안정한 네 능력이 네 안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아.”

“…….”

“누차 얘기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야. 그러니까 이 말엔 너무 큰 기대는 걸지 말고…….”

“할게요.”

펠릭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벨리아가 확고한 뜻을 담아 대답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긴 했지만, 급변한 태도에 펠릭스는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추측뿐인 제 말을 이벨리아가 너무 맹신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깨에 얹어진 무거운 책임감이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선뜻 기뻐할 수 없게 했다.

“이벨리아, 거듭 말하지만 조금 전의 말은 그저 내 추측일 뿐이야. 그러니까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갖고 대답한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난 너에게 괜한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아.”

“아니요.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는 거면…….”

“…….”

“그런 거면 상관없어요. 나는 기억을 되찾고 싶고, 자리에 앉아 고민하는 건 지금까지 충분히 했어요. 그런데도 더 이상 생각이 나는 게 없잖아요. 그럼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죠.”

펠릭스의 만류에도 이벨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표정은 물론 눈빛, 말투까지도 무척 굳건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일순 칼리프를 향했다. 눈동자 빼곡히 차오른 그는 펠릭스보다 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힘든 길을 자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눈동자가 애잔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러면서도 펠릭스를 향한 말은 멈추지 않았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

“도와줘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칼리프 못지않게 애잔하게 빛났다.

***

유스티아는 유리온실에 홀로 앉아 차를 들이켰다. 평소 그렇게나 좋아하던 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하아…….”

침음을 흘린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두통이었다.

가넷 공작가에 발을 들이고 단 하루도 편한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골머리가 아픈 건 처음이었다.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하나뿐인 아들 리우리안을 시작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꾼 드웨인과 가드로까지.

상황이 급변하는 만큼 저 역시 대비가 필요했지만, 세 사람을 상대로 머리를 굴리려니 여간 쉽지가 않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리우리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거겠지…….”

유스티아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상황이 복잡하긴 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드웨인과 가드로 모두 리우리안을 향한 생각과 태도가 달라졌다는 거였다.

[어쩌면 네 선택이 썩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

[제 어미를 닮지 않아 참 다행인 일이지.]

출옥한 렐리아와 자리를 만들라고 성화를 부리던 드웨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잇새로 새어 나온 모든 말이 가리키는 건 정확히 리우리안이었다. 놀라운 건 리우리안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언뜻 흡족하다는 듯 들렸다는 것이다.

그뿐일까. 가드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우리안이 최근 태자비를 자주 찾는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달라진 태도의 이유는 묻지 않았으나, 별안간 그렇게 하는 까닭이 분명 있겠지요.]

[…….]

[황후의 말씀처럼 우매하지 않은 어미답게 리우리안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최근 들어 이벨리아를 자주 찾는 리우리안의 행보를 탓하지 않고 되레 역성을 드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도 캐롤라인 후작가에 힘을 실어 주던 가드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가드로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을 만큼 무척이나 낯설었다.

가드로는 자신을 완벽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 또한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크게 이상할 것 없었지만, 눈빛에 담긴 의미만큼은 다른 때와 판이하게 달랐다.

마치 제게서 리우리안을 지키고자 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올바른 길에 올라선 아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이전의 가드로라면 절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드로에게 리우리안은 하나뿐인 혈육이긴 하지만, 아비와는 완전하게 다른 길을 걷는 아들일 뿐이었다.

한때는 그런 리우리안의 생각을 바꿔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달라지긴커녕 어미의 품만 더욱 찾는 아들의 모습에 가드로는 더 이상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리우리안의 맹목적인 의지를 조금이나마 꺾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가드로가 리우리안의 이야기를 하며 깊은 애정이 담긴 눈빛을 지은 것도 모자라 다른 때와는 다른 농도 짙은 관심을 표현했다.

[아끼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

[최근 들어 무척 기특할 따름이지요. 지금껏 지켜봐 왔던 리우리안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마지막 들었던 그의 말만 떠올려 봐도 그랬다. 지금껏 지켜봐 왔던 리우리안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특할 따름이라던 말은 분명 리우리안을 향해 달라진 그의 의중을 표현한 것이 확실했다.

“리우리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유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하나뿐인 아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낯설어졌다.

이따금 위화감을 느꼈다고 해도 금방 생각을 달리할 만큼 리우리안은 제게 한결같은 아들이었다.

렐리아를 향한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래서 그간 느꼈던 위화감을 렐리아를 향한 변심 때문에 그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어떻게 드웨인과 가드로의 마음을 한 번에 움직인 거지.”

유스티아는 관자놀이에 올린 손끝에 더욱 힘을 실었다. 드웨인과 가드로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은 평생을 해도 두 사람의 지지는커녕 마음 한 자락 돌리지 못했다. 그건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 이전 리우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속상한 사실이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리우리안을 한심하게만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깐깐한 두 남자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대책이 필요해.”

몇 번을 생각해도 확실한 수가 필요했다. 다시 리우리안이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 드웨인과 가드로를 상대로 한 지금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롯은 리우리안이 계속 이벨리아를 자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유스티아는 오전에 시녀장을 통해 들었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테롯은 분명 리우리안이 특별한 움직임은 없고, 이벨리아를 찾는 횟수가 늘었다고만 했다.

아무래도 리우리안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그의 애정을 되찾아 와야 할 것 같았다. 보통의 남자라면 사랑에 빠진 여자를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주려고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이벨리아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법.

황후의 자존심을 지키며 아들의 마음까지 되찾을 수 있는 카드는 하나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유스티아는 유리온실 입구에 서 있는 테롯을 향해 소리쳤다.

“테롯, 넷트 후작가에 전갈을 보내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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