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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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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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추측
2023.08.28.
이벨리아의 말에 펠릭스가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잖아.”
기대 이하의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이벨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이유도 모르고 몸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기도 했고, 용암 속에 빠진 느낌 같기도 했어요.”
“…….”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떴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영지가 아니라 수도 후작저의 내 방에 누워 있었어요. 가장 먼저 영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꿈을 꾼 모양이라던 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을 정도로 영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펠릭스가 도통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반응에 이벨리아가 지체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상하지 않아요?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제법 어릴 적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편이에요. 영지에서 있었던 일과 그때 왜 그렇게 앓았던 건지, 그 이유에 대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에요.”
“…….”
“어쨌든 그때 심하게 앓고 난 이후로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평균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허약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건강해진 것은 확실해요.”
확고한 이벨리아의 말에 펠릭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껏 들었던 말 중엔 가장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끙끙 앓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건강해졌다는 건, 확실히 신성력과 관련해 생각해 볼 법했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신성력은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데 그녀의 경우엔 후천적으로 발현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 크게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펠릭스에겐 이벨리아의 존재 자체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경우의 수였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당시 네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건가?”
“정확히는 영지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요.”
“영지에 있었을 때?”
펠릭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반면 이벨리아는 어두워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지 모를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자고 일어나서 갑자기 건강해진 것도 이상하지만, 영지에 갔던 일을 꿈이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이해되지 않거든요.”
“그거야, 사리 분별이 어려운 나이였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부모의 말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어.”
“아니요. 어린 시절의 내가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을 만큼 주관이 없진 않았어요. 오히려 또래보다 주관이 강한 편이었죠.”
이벨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랬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때때로 맹랑하다 싶을 정도의 주관과 신념을 내비치곤 했었다.
몸이 허약한 탓에 방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는데,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놀이는 책을 보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취미였지만 다행히 취향에 맞아서 한때 그녀는 책에 무섭도록 집착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만 봐도 어린 시절 그녀의 성향이 어땠을지가 충분히 가늠되었다. 더욱이 맹랑할 정도의 주관과 신념이 생긴 것도 책과 가까이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윅은 그런 그녀를 언제나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철없는 이야기로 고집을 부린다면 아비로서 제법 골머리를 앓았겠지만, 다행히 이벨리아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기억이 너무도 또렷했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벨리아는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갸우뚱하면서도 꿈이라던 아버지의 말을 믿었다는 건…… 영지에서의 일이 또렷하지 않았다는 뜻일 거예요. 그게 아니고서야…….”
“…….”
“영지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아무리 아버지의 말이라고 해도 제가 그렇게 순순히 믿었을 리가 없어요.”
이벨리아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도 습관처럼 창가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창밖을 보며 등을 돌리고 있던 칼리프의 얼굴이 어느덧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제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벨리아는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펠릭스의 일이 아니더라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했었다. 다만 지금과 같은 칼리프의 표정을 보게 될까 봐 부러 내색하지 않았을 뿐.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를 잊은 건 제 실수이고 잘못이 맞았다. 그러니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인데, 칼리프는 언제나 자신을 품어 내기에만 바빴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지금도 괜찮다는 말로 자신을 다독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의 위로에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얻는 건 결국 또 그를 기만하는 일일 테니까.
각자의 감정으로 이벨리아와 칼리프의 시선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펠릭스가 이벨리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벨리아는 그걸 핑계 삼아 칼리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네 말을 종합해 보자면 갑자기 네가 건강을 되찾은 일과 영지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사정이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말인가?”
“두 가지 일의 공통점이 영지니까요.”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릭스가 조금 더 진중해진 표정으로 이벨리아를 따라 고개를 주억였다.
“일리가 없진 않네.”
말끝에 짙은 한숨 소리가 묻어났다. 이벨리아는 대답 없이 펠릭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법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던 그가 이내 또렷해진 눈동자로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 볼게.”
이벨리아는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한결 정돈된 펠릭스의 목소리가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을 안겼다.
“수백 년을 살았지만, 후천적으로 능력이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는 농담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어.”
“…….”
“물론 이벨리아, 네가 가진 능력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야. 들어 본 적이 없는 건 물론이고,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 보름이 넘게 족히 수백 권의 책은 읽었지만, 역시나 너의 능력과 비슷한 내용은 단 한 줄도 찾을 수가 없었지.”
길게 이어진 펠릭스의 말에 이벨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표정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펠릭스가 서둘러 말을 보태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벨리아 너와 관련한 일은 사소한 것 하나도 장담할 수가 없다는 거야.”
덧붙은 펠릭스의 말에도 이벨리아는 이전의 기분을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줄곧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혼란이 더욱이나 가열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넌 역사서에 짧은 한 줄로도 남아 있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어. 그러니 너라면 신성력이 후천적으로 발현되었다고 해도 놀랄 이유가 없는 거지.”
“…….”
“어쩌면 네가 의심하는 대로 영지에서 지내면서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그 일을 계기로 네게 신성력이 발현된 거라면 용암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네 말도 충분히 납득이 돼.”
“…….”
“네가 허약한 편이었다면 더욱이나 심하게 앓았을 수도 있겠지. 갑자기 발현된 신성력을 감당할 힘이 없었을 테니까.”
“…….”
“물론 그 경우라면 네가 그 자질은 타고났어야 할 거야. 후천적으로 일어난 영향으로 잠들어 있던 신성력이 발현되어야 말이 될 테니까.”
이벨리아가 고집스레 입술을 다물었다. 정말 그런 이유로 자신이 심하게 앓았던 거라면, 영지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만 같았다.
“……같은 이유로 영지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요?”
이벨리아는 망설임이 짙은 목소리로 물었다. 깊은 고민 끝에 물어본 그녀와 달리 펠릭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허약한 네 몸으로 갑자기 발현된 신성력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고, 그 충격으로 그 시기의 기억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해.”
“……그럼 소실된 기억을 찾을 방법은…….”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돌려줄 수 없어. 지금까지 내게 한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 사실인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펠릭스가 애석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옅게나마 피워 올려 본 희망이 단박에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 문제도 결국,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기억해 내는 방법밖엔 없는 건가 보네요.”
“아니. 미안하지만, 난 칼리프와는 달리 널 기다려 줄 여유가 없어.”
실망감에 젖었던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일순 펠릭스를 향했다. 눈동자에 비친 그의 표정은 물론 음색과 어조가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그녀의 마음에 조바심을 일게 했다.
“여유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게 어쩌다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네게 왜 그 능력이 생겼느냐가 아니야.”
“그럼…….”
이벨리아는 불시에 몰아닥친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러자 크게 숨을 들이마신 펠릭스가 전에 없이 결연해진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네 능력이 필요해, 이벨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