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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먹먹한 마음 (88/94)


  • 88화. 먹먹한 마음
    2023.08.27.


    “제게 좋지 않은 일은 언제나 폐하의 건강과 관련한 일뿐이지요.”

    에드윅이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대답했다. 차마 가드로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눈치 빠른 황제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단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이 무거웠다. 황제와 신하 관계를 떠나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이 앞으로 고할 일은 어떻게 들어도 충격이 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털어놓는 것이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드로라면 충격은 받을지언정 역대 어떤 선황보다도 강한 황제답게 굳건히 상황을 타파해 나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자꾸만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가드로가 너무 지쳐 보였다. 그게 깊어 가는 병환 때문인지, 십수 년 넘게 이어진 치열했던 삶의 후유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그의 상태가 작은 충격에도 금방 무너질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사람 참, 싱겁기는. 내 몸이 이렇게 된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부정해 봐야 달라질 수 없는 일에 걱정을 쏟는 건 괜한 감정 낭비일 뿐이야.”

    가드로가 퍽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탓에 에드윅은 고개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드로의 목소리가 온통 체념의 빛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폐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붙잡으셔야 합니다.”

    에드윅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호소하듯 말했다. 하지만 가드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 가드로는 불현듯 허공을 응시했다. 상념에 잠긴 듯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곧 아련하게 흔들렸다. 호선을 그린 입술엔 온통 씁쓸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얼마 전 리우리안이 나를 찾아와 엘리아 왕국에 대한 처분을 어찌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하더군.”

    “…….”

    “엘리아 왕국과의 국경에 걸쳐 있는 광산의 소유권을 요구하겠다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 돌아왔어. 리우리안의 의견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답이었지.”

    그날을 상기하는 듯 흐려진 가드로의 표정으로 일순 흐뭇한 감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에드윅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미어지고 한숨이 치밀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주한 가드로의 얼굴이 마치 그간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을 비로소 마주한 듯 감격에 젖어 있었으니 말이다.

    “……전하께서 그러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어찌나 기특하던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어.”

    가드로는 에드윅의 짐작에서 한 치의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내어 주었다. 그래서 에드윅은 차마 입 안에 차오른 많은 말 중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이곳으로 향했던 이유를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언젠가 그에게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고 이렇게 피하는 것이 결코 현명한 답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피하고 싶었다.

    가드로의 상태가 조금이나마 나아진 듯 보일 때까지만. 최소한 제 이야기에 곧장 무너질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만. 그가 리우리안이라고 믿는 착실한 아들의 태도에 좀 더 익숙해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에드윅은 입 안에 차오른 이야기를 가슴에 묻은 채 피해 보기로 했다.

    비겁한 변명일지도 몰랐다. 충격에 휩싸인 가드로를 보는 게 두려워 지레 겁먹고 피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드로의 충신 에드윅이 아닌 황제와 똑같이 자식을 둔 한낱 아비로서의 에드윅은 이렇게나마 피하는 것 말곤 현명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에드윅은 먹먹하게 밀려오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

    화창한 날의 오후, 응접실을 찾은 이벨리아는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표정만큼이나 편하지 못한 시선이 창가 쪽을 전전긍긍하며 응시했다.

    시선의 끝에 걸린 건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어 있는 칼리프였다. 그는 뭔지 알 수 없는 불만에 찬 얼굴을 하고선 고집스레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게 이벨리아의 마음을 자꾸만 불편하게 했다.

    이유라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을 채 뱉기도 전에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난번에 고민해 보겠다고 했던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건가?”

    이벨리아의 시선이 곧장 정면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로 비친 건 테이블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펠릭스의 모습이었다.

    “……순조롭지는 않지만, 진행 중인 건 맞아요.”

    이벨리아는 칼리프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칼리프나 펠릭스를 독대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를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낯설고 불편했다.

    셋이 한자리에 있는 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불편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달가워하지 않는 칼리프의 태도 때문이 분명했다.

    그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한결같이 펠릭스와 한자리에 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대놓고 그를 내쫓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이전과 달리 오늘은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짓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그녀를 더욱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했다. 그는 무언가 꾹 참고 있는 얼굴로 자신과 펠릭스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펠릭스를 내쫓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설마 자신이 나서서 펠릭스를 보내길 바라는 건가?

    불편한 마음에 실없는 생각까지 하던 이벨리아의 상념 사이로 펠릭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끼어들었다.

    “그렇게 불편한 얼굴 할 거 없어. 오늘은 칼리프와 합의하에 널 찾아온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펠릭스에게선 불편한 기색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는 창가에 선 칼리프의 분위기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합의한 거…… 확실해요?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벨리아는 미간을 좁히곤 되물었다. 칼리프를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펠릭스가 칼리프의 표정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이럴 거면 그냥 가지 그래. 혼자 가는 건 죽어도 싫대서 같이 왔더니, 네가 그러고 서 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어지잖아.”

    이내 칼리프를 향해 내뱉은 말에 이벨리아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칼리프라면 이곳에 저와 펠릭스 둘만을 남겨 놓고 자리를 비켜 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펠릭스의 말을 매섭게 비꼬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칼리프는 선뜻 입술을 떼지 않았다. 물론 못마땅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이럴 거면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니 온몸에 털이 다 쭈뼛 설 것 같았다.

    칼리프의 놀라운 반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화를 그렇게 꼭 가까이 마주 앉아서 해야 하나?”

    “허, 이게 가까이 마주 앉은 거야? 작지도 않은 테이블이 이렇게 떡하니 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이게 가까인가?”

    “…….”

    “설령 가까이라고 해도 그래. 가까이 앉아 있으면 내가 이벨리아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펠릭스의 잇새로 망발이나 다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벨리아는 경악한 얼굴로 곧장 칼리프를 살폈다.

    거침없이 말을 뱉는 건 펠릭스인데 왜 눈치는 제가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해. 분명 너도 합의한 일이잖아.”

    이어진 말에 이번엔 이벨리아의 얼굴이 펠릭스를 향했다. 이쯤 되니 칼리프의 눈치를 살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눈치를 보면 무엇하나. 칼리프를 향한 펠릭스의 말은 시종일관 거침이 없는데.

    이벨리아는 도통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좁혔다. 목 끝까지 찬 한숨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였다.

    그때 침묵을 일관하던 칼리프가 놀라운 대답을 꺼내 놓았다.

    “차라리 햄스터로 대화를 나누는 건? 그럼 이렇게까지 거슬리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다음번엔 너 몰래 은밀히 이벨리아를 찾아오는 거로.”

    “그 입 닥쳐.”

    펠릭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칼리프가 씨근덕거렸다. 그러더니 창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신경질로 가득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태도의 뉘앙스와는 달리 그 의미는 등 돌려 보지 않음으로써 인내를 해 보겠다는 듯했다. 펠릭스와 자신이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말이다.

    “허.”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툭 내뱉었다. 놀라운 마음을 도저히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는 달리 펠릭스는 칼리프의 행동이 무척 기꺼운 듯 보였다.

    “자, 방해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으니 이제 대화에 집중을 좀 해 볼까, 이벨리아?”

    펠릭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이벨리아는 여전히 등 돌린 칼리프가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릭스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건네 왔다.

    “순조롭진 않지만, 진행 중이라던 말이 뭘 의미하는 건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말끝을 올린 그가 좀 전과는 달리 진중해진 눈으로 그녀를 오롯이 응시했다. 그 눈빛이 무언의 기대로 물든 것 같아 이벨리아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딱히 기억해 낸 건 없어요. 다만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

    펠릭스가 더욱이 기대에 찬 눈으로 이벨리아를 보았다. 그게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이벨리아는 며칠 내리 고민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릴 적의 나는 생각 이상으로 정말 허약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아팠고, 그래서 방 밖으로는 잘 나가지도 못했죠. 영지에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수도보다는 공기가 맑은 영지에 가서 요양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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