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내가 바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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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내가 바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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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내가 바라는 건
2023.08.24.
이른 아침, 칼리프는 테이블 앞에 앉아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지난밤 이브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길이었지만, 그는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에게 들었던 말이 한시도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네가 힘들다면 내가 하면 돼. 과거의 내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의 나를 네 기억 속에 남기면 되고, 펠릭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아니. 칼리프, 난 다 해낼 거야. 너도 꼭 다 기억해 낼 거고, 펠릭스와의 문제도 내가 해결할 거야. 꼭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칼…….]
[…….]
[넌 지금처럼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 줄래? 그렇게만 해 주면, 난 정말 행복할 것 같아.]
지금처럼 그녀의 옆에만 있어 달란 말은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이 분명했지만, 그 앞에 덧붙은 말들은 온통 그의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그는 차라리 그녀가 제 뒤에 숨어 주길 바랐었다. 펠릭스와의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했다. 무책임하게 보일지언정 제 뒤에 숨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길 바랐다.
그녀가 그렇게 해 주면 펠릭스를 단호히 제지하고 말릴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녀가 명분을 만들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더욱이나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꼭 해낼 테니 믿어 달라는 듯 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왔다.
“후우.”
칼리프는 한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하던 그녀의 미소가 너무 예뻐서, 제 목을 끌어안던 몸짓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잠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마다 펠릭스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이명처럼 귓가에서 울린 탓이었다.
[일전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해? 내가 왜 봉인이 되었던 건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그래, 기억해.]
[……잠깐이지만, 오늘 그 기운을 다시 느꼈어.]
펠릭스가 느꼈다던 그 기운은 믿을 수 없는 이능과 힘을 가진 그가 온몸으로 품은 채 봉인되길 자처해야 할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그 힘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펠릭스에게 들은 말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두려웠다. 그 힘에 자신이 다칠까 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악질적인 존재가 이벨리아가 머무르는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 못내 두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언급한 후에야 이벨리아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 펠릭스의 의중이 몇 번이고 마음에 걸렸다. 말의 순서를 그렇게 정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그 말을 하던 순간 펠릭스의 표정과 어조만 봐도 확실했다.
펠릭스가 끔찍한 기운을 상대로 맞서 싸워야 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벨리아를 지킬 수 있다면 칼리프는 기꺼이 목숨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 옆에 이벨리아가 함께하길 바라진 않았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해야 했다. 그게 칼리프가 기꺼이 목숨을 거는 모든 상황 앞의 전제 조건이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 얼굴이지?”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프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언제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인지 햄스터에서 빠져나온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프는 말없이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줄곧 테이블 앞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슨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이미 간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애써 모르는 척하는 이유는 이번만큼은 제 뜻을 존중해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닐는지.
칼리프는 재차 차오르는 한숨을 꾹 눌러 참으며 펠릭스를 향해 말했다.
“얘기 좀 하지.”
요구하는 음색이 단조로웠다. 눈매를 가늘게 늘인 펠릭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칼리프의 용건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얘기를 하자고 해 놓고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화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펠릭스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얘기 좀 하자는 그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기에 곧장 본론을 꺼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말이 없으니 슬슬 답답증이 몰려왔다.
불편한 침묵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그 끝에 칼리프가 감고 있던 눈을 추켜 뜨곤 퍽 날카로운 눈빛으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질문엔 생략된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도 펠릭스는 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미 말했잖아. 이렇게 된 이상 하루빨리 이벨리아가 스스로의 능력을 각성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야.”
“왜 그래야 하는 건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나?”
펠릭스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답답하긴 칼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간 보아 왔던 펠릭스는 언제나 여유를 잃는 법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보이는 그 여유로운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번 일 앞에서만큼은 전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도리어 초조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자꾸만 성급하게 행동했다.
그가 알고 지내 온 펠릭스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펠릭스가 이토록 성급하게 굴 정도로 상대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도 그 앞에 이벨리아를 서게 할 생각인 건지.
묻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데 그답지 않게 물어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칼리프는 자꾸만 뒷걸음질만 치게 됐다. 그 마음을 도통 숨길 재간이 없었다.
“이브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그녀와 관련된 일인 만큼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펠릭스를 향한 칼리프의 눈빛이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 탓에 펠릭스는 좁힌 미간을 펼 수가 없었다.
너무도 칼리프답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펠릭스 역시 한껏 예민해진 신경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네게 시키기라도 하던가? 나를 말려 달라고?”
“그딴 식으로밖에 말 못 해? 이브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네가 이렇게 나서서 날 말리려고 드는 건지 모르겠군. 어제 이벨리아는 분명 내게 그랬어. 생각해 보겠다고. 그러니 시간을 좀 달라고.”
“그래. 그녀가 원하는 건 시간이야. 그러니까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란 뜻이야.”
“나 역시 네게 오늘부터 당장 그녀가 각성할 수 있도록 도울 거라고 한 적 없어.”
두 남자의 신경전은 맹렬한 기세로 이어졌다. 감정이 먼저 폭발한 건 칼리프였다.
“왜 이브가 뭔지도 모르는 그 능력을 각성해야 하는 거지? 너한텐 나로는 부족한 건가?”
“감정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 근성과 실력에 대한 인정은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네 스스로 입이 마르도록 하지 않았나?”
“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야!”
“그럼 뭐지? 너 스스로를 믿지 못해 이러는 건가? 네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 지레 겁먹고 이러는 거냐고!”
울분에 찬 칼리프의 외침에 펠릭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금방이라도 말을 받아칠 것처럼 벌어졌던 입술은 삽시간에 다물렸고, 칼리프를 향한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제야 칼리프는 제 말이 너무도 감정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
“…….”
싸늘한 침묵은 순식간에 두 남자를 에워쌌다. 펠릭스는 시종일관 칼리프를 향한 격렬한 시선을 지우지 못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 눈빛에 몇 번이고 질타를 했을 칼리프였지만, 이번만큼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펠릭스가 눈을 질끈 감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내 힘만으론 이길 수 없는 상대야. 나 혼자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이벨리아의 능력에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을 거야.”
“…….”
“평화롭던 왕국 하나를 완벽하게 멸망시켰어. 그걸 막을 수가 없어서 난 그렇게 되는 걸 무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
“그 끔찍한 경험을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아. 너도, 이벨리아도…… 트리탄 왕국의 후손이나 다름없는 발체로페 제국이 트리탄의 전철을 밟는 걸 또다시 무능하게 지켜보는 건 더더욱이나 하고 싶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는 펠릭스의 목소리가 온통 고통으로 가득했다. 괴로운 듯 찡그린 얼굴엔 거짓 하나 보태지 않은 오롯한 진심뿐이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선뜻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기운을 느꼈듯, 그 역시 날 느끼고 있을 거야. 그러니 그동안 악착같이 기척을 숨긴 거겠지. 작은 힘만으로도 내가 기운을 읽어 낼 거란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존재니까.”
“…….”
“그런데도 잠깐이지만 존재를 드러냈다는 건 본격적으로 움직일 준비를 끝마쳤다는 뜻일 거야.”
“…….”
“나는 언제 반복될지 모를 그 끔찍한 상황에 대비를 해야 해, 칼리프.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벨리아가 내게 힘을 보낼 수 있다면 그녀의 힘까지도 나는 너무 간절하다고.”
말 끝에 펠릭스가 다시 한번 눈을 힘주어 감았다. 힘을 견디지 못한 속눈썹이 바르르 흔들렸다. 꼭 무능함에 몸부림치는 움직임 같았다.
칼리프는 자꾸만 목 끝이 조여 왔다.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내려놓고 고백하는 펠릭스를 더는 어떤 말로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벨리아의 목소리가 재차 그의 귓가에서 울렸다.
[아니. 칼리프, 난 다 해낼 거야. 너도 꼭 다 기억해 낼 거고, 펠릭스와의 문제도 내가 해결할 거야. 꼭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칼…….]
[…….]
[넌 지금처럼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 줄래? 그렇게만 해 주면, 난 정말 행복할 것 같아.]
결국 그녀가 제게 바란 건 펠릭스와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프는 차오른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펠릭스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하나야.”
“…….”
“이브가, 다치길 바라지 않아. 그녀가 힘들지 않길 바라.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펠릭스가 무얼 하든 존중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