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중요한 일 (81/94)


  • 81화. 중요한 일
    2023.08.20.


    “오라버니!”

    이벨리아는 후작저에 도착하기 무섭게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제이드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내디뎠다.

    “오셨습니까, 전하.”

    제이드가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이벨리아에겐 그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경직된 제이드의 표정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버지는요?”

    그녀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제이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막 다시 잠드셨어요.”

    “어디가 얼마나 편찮으신 거예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 가시는 것 같더니 며칠 전부터 열병으로 앓기 시작하셨어요. 내내 열이 떨어지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전하께서 오고 계신다는 걸 아신 건지, 이제야 열이 잡히기 시작했어요.”

    설명하는 제이드의 목소리에 시름이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며칠간 에드윅의 상태가 얼마나 중했던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겁던 마음이 더욱 묵직해졌다.

    자신이 칼리프와 다정한 한때를 보내던 사이 부친께선 기어이 앓아누울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수십 개의 칼날이 숨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고 마침내 에드윅의 침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신음을 참아야만 했다.

    “하…….”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에드윅의 모습이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부친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벨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러곤 염치도 없이 에드윅의 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제이드는 이제야 열이 잡히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에드윅의 손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열감에 뜨끈했다.

    입술이 바르르 흔들렸다. 이렇게 죽은 듯 누워 있는 부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게 도무지 눈물을 참을 수 없게 했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볼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걸 눈치챈 건지 그녀의 머리 위로 제이드의 한숨 소리가 무겁게 쏟아졌다.

    “연락을 드리는 게 맞나 고민 많이 했는데, 전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았어요. 아버지께서도 잠결에 계속 전하만 찾으셔서…….”

    “……잘하셨어요. 나중에 알았더라면 마음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이벨리아는 흐느낌을 참기 위해 노력하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제이드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지만, 그녀는 연락을 준 제이드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부친이 이렇게 앓게 된 건 다 저 때문이었다. 그런데 편찮으셨단 사실조차 나중에 알았다면 그땐 지금 느끼는 죄책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감정의 무게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벨리아는 숨을 고르며 눈물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잠들어 계시긴 하지만, 제가 울고 있다는 걸 부친이 안다면 꿈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 같았다.

    그녀는 흐느낌이 새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꽉 문 채 한참이나 자리를 지켰다. 점점 더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던 찰나, 이벨리아의 귓전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이봐, 이벨리아. 난 언제까지 이 상태로 둘 생각이지?

    펠릭스의 음성이었다. 이벨리아는 펠릭스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의 목소리를 제이드가 들었을까 봐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이드는 여전히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안색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펠릭스의 목소리를 들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이벨리아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그때 재차 펠릭스가 이벨리아를 채근하듯 말을 이어왔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너와 칼리프밖에 없어. 다른 사람이 들었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 어지간하면 네가 날 꺼내 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날 잊은 것 같아서 말이야.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데 이만 꺼내 줄 생각 없나? 그래야 네 부친도 내가 살필 수 있을 것 같은데.

    펠릭스가 그답지 않게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작은 주머니에 넣어 드레스 안에 숨겼으니, 그녀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주머니 안이 결코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벨리아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제이드가 의아해진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오라버니, 잠깐 아버지와 조용히 있고 싶은데, 자리 좀 비워 주실 수 있나요?”

    제이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부친이 걱정된 탓이었다. 하지만 저와 달리 이벨리아는 잠시 후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사이 아버지 상태가 또 안 좋아지시면 지체하지 마시고 불러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이벨리아는 최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제이드가 등을 돌리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이드가 침실에서 완전히 나갈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문이 확실히 닫히는 것을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드레스 속에 숨긴 주머니를 꺼내었다.

    조여 두었던 입구를 열어 주자 안에 있던 햄스터가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언뜻 그녀를 원망하는 듯한 어조에 이벨리아가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미안해요. 아버지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펠릭스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그렇다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건 없고.

    펠릭스가 퍽 퉁명스럽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벨리아의 표정이 그의 마음을 무척이나 무겁게 했다. 내내 갇혀 있던 건 본인인데 더 숨 막힌 표정을 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펠릭스는 이벨리아가 울기라도 할세라 서둘러 기운을 발산했다. 햄스터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모습이 된 그는 지체 없이 에드윅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가늘게 뜬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에드윅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이벨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잠깐 기력이 쇠한 것뿐이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아까 네 오라버니도 그러지 않았나. 이제야 열이 잡히기 시작했다고. 그냥 가벼운 열병이야.”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앓으셨던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어요.”

    이벨리아가 무겁게 가라앉은 숨을 푸 내쉬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근래 들어 스트레스가 심했을 테니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게다가 네가 알던 예전의 후작과 지금의 후작은 절대 같을 수가 없지. 그가 평소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노인이 되어 가는 중이라고.”

    이벨리아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노인이 되어 가는 중이란 말이 목 끝에 찬 말도 잊게 할 만큼 뼈아팠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제나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부친의 머리칼이 언젠가부터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고, 팽팽하던 피부 위엔 주름이 가득했다.

    며칠간 앓았다는 지금은 볼이 움푹 팬 데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어 더욱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왜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걸까.

    이벨리아는 무너지기 시작한 마음을 어떻게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기어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차마 염치가 없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하, 이봐. 내 말은 그렇게까지 울 정도로 위중한 상태가 아니란 의미였어.”

    펠릭스가 뒤늦게 이벨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우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그는 다시 몸을 돌리곤 에드윅을 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 그의 손 주변으로 푸른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적당한 기운이 찼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에드윅의 이마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에드윅의 실루엣을 타고 푸른빛이 번지기까진 금방이었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눈부시게 밝은 빛에 이벨리아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간 유지되던 빛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졌다. 그러고 나서야 이벨리아가 펠릭스를 향해 물었다.

    “뭘…… 한 거예요?”

    “말했잖아. 날 데리고 오면 도움이 될 거라고. 기운을 불어넣었으니 금방 기운 차리고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우는 게 어때?”

    펠릭스가 퍽 피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에드윅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말처럼 기운을 전해 받기라도 한 건지 잠든 부친의 표정이 이전과 비교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저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우선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부친을 돌봐 준 일에 대한 감사는 표현해야 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펠릭스.”

    “길어야 오늘 하루 정도 푹 자고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내려놓고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이벨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펠릭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도 없이 무작정 온 것이니 네 시녀도 그렇지만 칼리프도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걱정할 거야. 후작의 상태에 대해선 네 오라버니를 통해 계속 전해 들어도 되잖아.”

    “…….”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나도 네게 볼일이 있다고.”

    그제야 이벨리아는 제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던 펠릭스의 말이 떠올랐다. 전에 없이 진중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은데…….

    “……많이 중요한 일이에요?”

    되묻는 이벨리아의 목소리에 내키지 않은 기색이 가득 실려 있었다. 가능하다면 펠릭스와의 대화는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펠릭스의 대답은 그녀의 마음을 잠깐도 편하게 해 주지 않았다.

    “응, 중요한 일이야.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결국 한숨을 내쉰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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