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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부드러운 입맞춤 (78/94)


78화. 부드러운 입맞춤
2023.08.17.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근사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까지 더해져서인지 후광까지 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얼굴을 붉힌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칼리프가 짓궂게 말을 건네 왔다.

“그대가 산책하고 있을 것 같아 나온 길이란 말이 그토록 감동적이었나? 지금 비의 얼굴이 꼭 잘 익은 사과를 닮았군.”

이렇게 심술궂을 수가 없었다.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힐 이유야 너무도 뻔한데, 굳이 이렇게 짚어 내며 시녀들 앞에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다니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벨리아의 심장은 눈치도 없이 정도를 모르고 펄떡댔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쳐들곤 그런 게 아니라고 거짓으로나마 체면을 차리고 싶은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토라진 그녀가 맞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곤 그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런, 나의 비가 심통이라도 난 모양이군.”

“……자꾸 놀리지 마세요.”

“놀리다니, 난 그저 그대의 얼굴이 사과를 닮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고.”

그녀의 경고에도 칼리프는 장난을 그만두지 않았다. 제게 그럴 재간이 있을까. 이러는 그녀의 모습이 제 눈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사랑스럽기만 한데.

제대로 심통이 났는지 미간을 좁힌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곤 고집스럽게 정면만 바라보았다. 언뜻 부은 듯 보이는 볼은 그녀가 단단히 토라졌단 증거가 되어 주었다. 그럴수록 칼리프는 더더욱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축 늘어진 이벨리아의 손을 더욱 힘껏 붙잡곤 준비해 둔 말을 흔쾌히 꺼내었다.

“나의 비께서 이토록 마음이 토라지셨으니 남편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내뱉더니 그녀가 걸어왔던 길을 향해 다리를 뻗기 시작했다. 그에게 붙잡힌 그녀로서는 의지와 상관없이 나란히 걸음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장소도 알려 주지 않고 어디론가 거침없이 향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태자비궁으로.”

“태자비궁이요? 거긴 왜…….”

이벨리아가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와 태자비궁에 가는 게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의 어조가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태자비궁으로 가는 것처럼 들렸다.

이벨리아는 칼리프에게 심통을 부리던 중이란 것도 잊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싱그러운 녹안 가득 여전히 짓궂게 웃고 있는 칼리프의 모습이 비쳤다.

“나의 비께서 기분이 무척 상하신 듯하니, 토라진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그대를 힘껏 예뻐해 줄 생각이야.”

“네……?”

“그러려면 은밀한 곳이 좋지 않겠나? 그대는 무척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니.”

눈을 두어 번 끔벅인 후에야 의미를 알아챈 이벨이아의 얼굴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침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시녀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인 칼리프의 시선에 그들의 웃음소리까지 더해지자 이벨리아의 얼굴이 불붙은 듯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골이 날 대로 난 그녀가 그의 손을 힘주어 뿌리치곤 성난 걸음으로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화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따라 급히 걸음을 떼었다.

“같이 가, 이브!”

* * *

“이거 놓으세요!”

이벨리아가 태자비궁 입구로 들어가며 칼리프의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벌써 몇 번째로 뿌리치는 건지 횟수를 셀 수도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를 붙잡았고, 그녀는 몇 번이고 그에게서 도망쳤다. 누군가 황태자 부부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전한다면 누구든 유쾌하게 들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직관하고 있는 페일린과 시녀들로서는 미소를 숨길 재간이 없었다.

붙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영락없이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그 탓에 사랑싸움마저 아슬아슬하기보다는 귀여운 소꿉장난 같았다.

사랑스러운 연인의 싸움은 이벨리아가 침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거기로 들어간다는 건 비의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힘껏 예뻐해 줘도 된다는 뜻인가?”

칼리프가 또다시 어딘지 야릇한 농담을 짓궂게 건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이벨리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더니 새침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자꾸 그러실 거예요?”

잔뜩 골이 난 목소리가 칼리프를 향해 뻗어 나왔다. 그것까지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번엔 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칼리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게 그녀의 마음을 더욱이 토라지게 할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걸음을 떼어 그녀의 손을 빈틈없이 붙잡았다.

“거기가 아니고 저쪽으로 가야 돼.”

그가 침실 옆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그가 가리킨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칼리프는 그녀를 달래듯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천천히 복도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절대 따라오지 않을 것 같던 이벨리아의 다리가 못 이기는 척 그의 힘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와 함께 그가 향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갑자기 응접실로 온 이유를 알 수 없어 반대쪽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벨리아가 결국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예요?”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정면에 보이는 테이블 위로 달콤해 보이는 온갖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도 그는 시녀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란 눈짓을 보내곤 문부터 닫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와 테이블로 향하며 대답했다.

“그대한테 꼭 해 주고 싶었던 일.”

이벨리아가 여전히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칼리프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꼭 해 주고 싶었단 말이 퍽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디저트를 무슨 이유로 제게 꼭 차려 주고 싶었단 말인가.

그녀의 표정만으로 속내를 읽어 낸 그가 근사하게 웃으며 그녀를 테이블 앞에 앉혔다.

“일전 그대가 렐리아 영애와 티파티 자리에 있었을 때, 그대가 듣고 있을 걸 알면서도 리우리안인 척 렐리아 영애를 위한 디저트를 내어 주라고 했던 게 줄곧 마음에 걸렸어.”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하며 그는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물론 진심도 아니었고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군. 미안했어, 그땐.”

“…….”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준비했으니 혹시라도 마음이 상했었다면 그대에게 지금이라도 이해를 구해 보고 싶군.”

그 말을 하며 그는 잠깐도 이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좀 전의 장난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온통 진심으로 가득한 사과에 이벨리아는 마음속 가득 차올랐던 심술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서운했던 기분이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진 않았다.

설령 마음에 담아 뒀다고 하더라도 칼리프로서 내린 결정이 아닌 리우리안으로서 내린 결정이란 걸 너무 잘 알았다. 그 이유만으로도 서운했던 감정은 씻은 듯 지워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여전히 마음에 담아 두곤 이토록 섬세하게 자신을 배려한 그의 마음이 일순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완전 병 주고 약 주고…… 진짜 못됐어.”

이벨리아가 울먹이며 그를 얄궂게 보았다. 태자비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걸 자신에게 보여 줄 정도면 준비는 이미 진작 끝냈다는 의미였다. 그럼 설마…….

“설마 일부러 놀린 거야?”

“뭘?”

“날 보자마자 그때부터 계속 놀렸잖아. 그거 일부러 그런 거였냐고.”

이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편해진 음색으로 물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그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설마 했던 이벨리아의 마음이 금세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가 조금 늦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갑자기 태자비궁으로 가자고 하면 뭔가 있구나 예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기껏 준비했는데 미리 눈치채면 재미없잖아. 감동도 덜하고.”

그러니까 결국은 일부러 그런 게 맞는다고.

이벨리아는 그 대답까지 듣고 나니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었어. 깜짝 놀라며 무척 좋아하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고.”

“…….”

“그런데 표정을 보니 놀라긴 한 것 같은데 생각만큼 좋아하는 것 같진 않네.”

이벨리아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퍽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정신을 차리곤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프는 퍽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한 짓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입술을 삐쭉거리면서도 서둘러 대답했다.

“바본가.”

“…….”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어. 이 넓은 테이블에 날 향한 배려가 이렇게 가득 차 있는데.”

“…….”

“그냥, 네가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날 생각하고 배려하고 있다는 게 너무 얼떨떨하고 설레어서…….”

시작은 퉁명스럽게 굴던 이벨리아가 이내 얼굴을 수줍게 붉히면서도 그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너무 기뻤다. 기쁜 만큼 기분 좋았고, 감당할 수 없이 설렜다. 다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가 웃음을 되찾았다. 그는 포크를 쥐여 주기 위해 잡았던 그녀의 손을 살짝 당겨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벨리아는 더욱 수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입 맞췄던 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한번 꾹 누르곤 그녀에게 디저트를 권했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쁘게 손을 움직였다. 단 음식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가 준비한 디저트는 하나같이 그녀의 입맛에 쏙 맞았다.

그가 준비한 디저트는 식사를 대신해 먹는다고 해도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았지만, 이벨리아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입, 한 입 디저트가 입 안을 달큼하게 녹일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와 시종일관 눈을 맞추며 감히 생각했다. 아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완벽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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