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예감이 직감이 되는 순간
(77/94)
77화. 예감이 직감이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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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예감이 직감이 되는 순간
2023.08.16.
펠릭스는 따사로운 볕이 드는 자리에 털썩 앉아 책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통은 원하는 내용을 찾지 못해 눈동자가 반쯤 풀려 있곤 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안광이 또렷한 건 물론 눈매가 가늘어져 있었다. 그것만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신성력을 비롯한 치유력은 1만 명에 한 명꼴로 발현되는 희귀한 능력이며 이들 중에서도…….”
전에 없이 진지하게 책에 몰두하던 펠릭스의 눈동자가 일순 짧게 요동쳤다. 글줄을 따라 긋던 손가락엔 잔떨림이 일기까지 했다.
“……능력이 변이되어 새로운 이능을 보유한 인간이 1백 년에 한 명씩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변이된 능력, 새로운 이능.
그가 그토록 찾던 방향의 자료 내용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런 내용이 책으로 남을 정도면 분명 그런 이야기가 구전되어 전해지기라도 했을 터. 그것만으로도 그간 못 견디게 간지럽던 자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벨리아가 이런 경우인 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펠릭스가 심오하게 중얼거렸다. 일전에 이벨리아를 통해 느꼈던 기분은 수백 년을 살아온 그조차 처음 겪어 본 것이었다.
“만약 그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벨리아가 지니고 있는 이능인 거라면…….”
펠릭스가 미간을 좁히곤 골몰했다. 그동안 너저분하게 머릿속에 늘어져 있던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벨리아가 책에 적힌 내용에 해당하는 인간이라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편이 좋다.
트리탄은 신이 존재하고 악의 기운이 공존하던 시절을 머물렀던 왕궁이었다. 그러니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나, 신성력이나 치유력, 그 외의 희귀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신을 섬기고 악의 기운을 대적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발체로페는 아니었다. 자신이 봉인에서 풀리기 전까진 신이 존재하지도, 자신이 끌어안은 채 봉인했던 악의 기운이 공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능을 가진 인간이 이곳에 있다는 건…….
“……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펠릭스는 삽시간에 좁아 든 미간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미친 사람처럼 책에 집착했던 기간 동안 펠릭스는 한순간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악의 기운을 끌어안은 채 봉인된 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건 자신과 함께 봉인되어 있던 또 다른 존재 역시 저와 함께 풀려났단 의미가 되었다.
그게 펠릭스가 봉인에서 풀려나고도 해방감을 마음껏 만끽할 수 없는 이유였다.
“후.”
펠릭스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취를 감춘 검은 기운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이미 봉인된 경험이 있던 터라 어딘가에 꼭꼭 숨어 들어간 건지, 벌써 수개월째 작은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직까진 조용한 걸 보니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 같진 않지만…….”
걱정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던 찰나였다.
“……!!”
펠릭스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제 팔을 내려다보자 자석에 반응하는 철심처럼 털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분명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던 감각이었다. 날카롭게 뜨인 푸른 눈동자가 일순 창밖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줄곧 품어 왔던 불길한 예감이 직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이벨리아는 정원 사이를 거닐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그 탓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페일린과 몇몇 시녀들이 서로의 이마에 등을 부딪칠 뻔하며 멈추었다.
놀란 페일린이 이벨리아를 향해 물었다.
“전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페일린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지만, 이벨리아는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를 집요하게 향하고 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 줄지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위였다.
깔끔하게 관리된 채 일렬로 이어진 나무는 그녀가 국혼을 치르고 입궁했던 시절부터 줄곧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태자비가 되기 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너무도 익숙한 나무를 보며 이벨리아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황궁의 사이프러스 가로수 길을 닮은 어딘가에서 칼리프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미간까지 좁힌 채 사이프러스 나무로 조성된 가로수 길을 뚫어지게 보았다. 무언가 희미한 장면이라도 떠오르길 바랐다.
그녀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페일린으로선 별안간 걸음을 멈추곤 특별할 것 없는 나무만 뚫어지게 보는 주인의 모습이 더없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페일린은 저처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 뒤의 시녀들을 슥 살피곤 서둘러 이벨리아 옆으로 다가갔다.
“전하, 왜 그러세요? 저기에 뭐라도 있나요?”
“응? 아,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지척에서 들려온 페일린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벨리아가 멋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곧장 떠오르는 변명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냥, 오, 오늘따라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척 예뻐 보여서.”
“사이프러스 나무가요……?”
되묻는 페일린의 표정은 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에 더욱 민망해진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멈췄던 걸음을 떼었다.
하루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고 싶은 의지는 이토록 강한데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은밀히 행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페일린에게라도 사정을 말하고 기억을 되찾는 일에 집중해 볼까,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칼리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제 일이라면 언제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나서는 게 페일린이었다. 얼기설기한 이야기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라면 납득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했다.
페일린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에나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다고 알려진 황궁에선 은밀하게라도 그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누구든 그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순간 그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페일린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제 속에만 꾹꾹 담아 두고 있긴 한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네.”
이벨리아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몇 발짝 걸음을 더하자 그녀가 집요하게 바라보았던 사이프러스 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벨리아는 괜스레 긴장하며 그 사이로 걸음을 밀어 넣었다. 무언가 떠오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멀리서 이곳을 보며 느꼈던 위화감이 괜한 건 아니라는 듯 착실한 반응이었다.
몸이 그렇게까지 반응하니 사이프러스 나무와 관련된 기억이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벨리아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최대한 산책을 즐기는 척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러곤 페일린 모르게 사이프러스 나무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폈다.
당장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넣어 두기라도 해야 했다. 태자비궁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머릿속에서나마 꺼내어 살필 수 있도록.
이벨리아는 한참을 집중한 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잠자코 뒤를 따라오던 페일린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한껏 집중하고 있던 참이라 사소한 손길에도 화들짝 놀란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으응? 왜, 왜?”
이벨리아가 퍽 당혹한 얼굴로 페일린을 돌아보았다. 순간 남몰래 은밀한 생각을 하고 있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주 본 페일린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일순 의아해진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뭐가 좋아서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야?”
“저기요, 전하.”
별안간 환해진 표정의 이유를 물었을 뿐인데, 페일린은 엉뚱하게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다가도 페일린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어?”
그녀의 눈동자로 비친 건 반대편 길목에서 걸어오고 있는 칼리프였다. 그녀의 입가로 속절없이 미소가 번졌다.
느리던 걸음이 재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장이 더욱 거칠게 요동쳤다.
어느덧 그가 몇 발짝 앞에서 선명히 보였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칼…….”
리프.
습관이 되어 버린 그 이름이 눈치도 없이 입 안에서 아우성을 쳐 댔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이름이 칼리프 드윗이란 걸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리우리안이란 이름보다 훨씬 더 익숙했다.
아무리 리우리안보다 그를 더 먼저 알았다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아직 온전한 게 무엇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몸은 그를 이미 완벽하게 기억한 것처럼 머리보다 앞서 움직이는 게 너무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하.”
이벨리아는 코앞까지 다가온 칼리프를 수줍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더없이 익숙한 움직임으로 손부터 잡아 왔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건 저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와의 스킨십은 언제나 과한 설렘을 동반하여 묘한 불편이 일었는데, 이제 손잡는 정도는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아 대는 그의 집요함 덕분이었다.
군말 없이 그의 손을 꼬옥 마주 잡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피식거렸다.
“산책을 하던 중이었나?”
“네. 전하께서도 산책을 나오신 거예요?”
“난 날씨가 너무 좋기에 행여 산책을 나온 그대와 마주치지 않을까 하여 나선 길이지.”
“그저 제가 산책을 나왔을 것 같단 생각만으로 나오신 길이라는 거예요?”
이벨리아가 어리둥절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산책을 나갔단 말을 들어서도 아니고, 산책을 나왔을 것 같아 나선 길이라니. 그 말은 직감만으로 자신을 찾아 정원을 돌아다녔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벨리아는 놀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 감정을 지울 새도 없이 다시금 그를 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이벨리아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