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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음산한 변화 (76/94)


76화. 음산한 변화
2023.08.15.


황후궁 응접실로 불편한 기류가 가라앉았다.

유스티아는 테이블 아래 숨긴 손을 연신 꿈지럭거렸다. 이미 엉망이 된 엄지손톱 근처는 살이 벌겋게 부어올라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가만두질 못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길 한참,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야 맞은편의 리우리안을 보았다.

“리우.”

“네.”

“갑작스레 전갈을 보냈는데, 이렇게 한달음에 와 줘서 고맙구나.”

유스티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보다 더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웨인에 대한 말을 어떻게 꺼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리우리안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가넷 공작가의 사생아란 것과 그 탓에 드웨인에게 갖은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렇지 않아도 드웨인에게 평생을 무시만 당한 채 살아온 그녀였다. 유일한 핏줄이자 하나 있는 아들까지 같은 취급을 받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우리안의 앞에서만큼은 어미로서, 또 황후로서 기품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세요.”

숨길 수 없는 불안 사이로 리우리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제야 유스티아는 한결 또렷해진 눈동자로 아들을 볼 수 있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웨인 공작이니, 그 머릿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자신도 대처가 가능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유스티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힘을 주었다.

“리우, 혹시 말이다…….”

“네.”

“혹시…… 아버님과 무슨 일이 있었니?”

“아버님이라면, 가넷 공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리우리안이 무척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그녀가 계속 망설인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유스티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우리안의 어깨가 김이 빠지듯 아래로 푹 꺼졌다.

“글쎄요. 우연히 마주친 것까지 무슨 일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죠.”

“마주친…… 적이 있다고?”

“태자비와 약속이 있어 태자비궁으로 향하던 길에 먼저 저를 알아보시고 알은척해 오시더군요.”

“아버님께서? 그날이 혹시 언제였니?”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공작이 말하길 렐리아 영애가 황후궁에 와 있다고 했던 것 같네요.”

유스티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렐리아가 입궁한 날이라면 드웨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날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불안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러고 나서 별일은 없었니?”

되묻는 유스티아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가득 묻어났다. 거세게 밀려드는 불안감에 순간 아들의 눈에 심상치 않은 이채가 어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황후궁으로 함께 가지 않겠냐기에 거절을 했고, 그 후엔…… 공작과 황태자궁으로 가 잠시 대화를 나눴지요.”

“대화를 나눴다고? 무, 무슨 대화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스티아가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하지만 미처 하고 싶은 말도 다 뱉지 못한 채 서둘러 표정을 정리했다.

늦게나마 리우리안의 앞에서만큼은 곧 죽어도 유지하려 했던 기품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리우리안을 독대했다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제게 남기고 간 말에 뼈가 담긴 게 확실했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인지, 늦기 전에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리우, 아버님께서 네게 따로 자리를 청하신 거니?”

“아니요. 제가 대화를 청했어요.”

“리우…… 네가?”

예상하지 못한 정황이었다. 유스티아가 당혹감에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을 관망하듯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작과 따로 이야기를 나눈 건 렐리아 때문이었어요.”

“……렐, 리아?”

“어머니도 이미 눈치채고 계셨겠지만, 전 더 이상은 렐리아와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공작은 계속해서 저와 렐리아를 엮지 못해 안달이니, 하는 수 없지 않습니까.”

“…….”

“공작에게 제 생각을 똑똑히 전하는 수밖에.”

틈을 찾아볼 수 없는 단단한 목소리가 유스티아의 머리를 쾅쾅 내리쳤다. 리우리안의 설명이 응접실에서 보았던 드웨인의 행동과 곧장 연결이 되었다.

[이만 자리는 마무리하지요.]

그러고 보니 줄곧 상념에만 잠겨 있던 드웨인이 자리를 마무리하자고 하던 타이밍이 의미심장했다. 렐리아가 리우리안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찰나였기 때문이다.

그뿐일까. 그는 렐리아가 리우리안을 만나러 가기라도 할까 봐 고압적인 표정까지 지었다.

[영애에게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공작님, 퇴궁하기 전에 황태자 전하를 잠시 뵙고자 하는데…….]

[영애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단 내 말이 안 들리던가요.]

[고, 공작님.]

[영애의 안색이 아직 좋지 않으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안 그래도 마음이 무거울 후작에게 근심을 보태는 일일 겁니다.]

간절하게도 청을 올리는 렐리아를 향해 넷트 후작의 핑계까지 대어 가며 리우리안과의 만남을 완강하게 막았다.

다시 생각해도 무척 당혹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렐리아를 리우리안의 짝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며 자신을 압박할 땐 언제고 느닷없이 렐리아를 헌신짝 취급을 하니 그걸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리우리안과 대화 후 마음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유스티아는 티 나지 않게 호흡을 골랐다. 드웨인이 이토록 태도를 급변한 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랬구나, 리우.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진 않았니? 워낙 렐리아를 어여삐 여기시는 분이다 보니 너한테 실수를 하셨을까 걱정이구나.”

유스티아는 그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드웨인을 파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기품 있는 황후의 행동으로 무척이나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아들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생각을 존중해 주시는 것 같았고요.”

“네 생각을, 존중해 주셨다고? 가넷…… 아니, 아버님께서 말이니?”

일순 혼란하게 흔들리는 유스티아의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의 모습이 비쳤다.

“역사에 길이 남을 강한 황제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벨리아와의 돈독한 관계는 필연적인 요소 아니겠냐고도 말했고요.”

“…….”

“다행히 제 생각을 이해하시는 눈치더군요. 그래서 앞으로 더는 저와 렐리아를 엮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겠구나 하고 넘겼는데…….”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린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설마 그 일로 공작께서 어머니께 선 넘는 발언이라도 한 겁니까?”

되묻는 목소리엔 뾰족하게 날을 세운 감정들이 가득 배어 있었다. 드웨인이 그랬노라고 대답하면 당장에 공작을 불러 역정을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유스티아는 대답 없이 눈만 끔벅였다. 자신을 위해 분노하는 아들이라니, 그 모습이 이토록 듬직할 수가 없었다. 줄곧 불안하던 심장 박동이 느리게나마 안정을 되찾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유스티아는 한결 환해진 얼굴로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리우. 그저 렐리아를 함께 만났던 날, 아버지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 의아해 물어본 거뿐이란다.”

“공작의 태도가요?”

“응. 렐리아를 무척 어여삐 여기던 분이신데 그날은 다른 날과 썩 다르시더구나. 널 만나고 싶다는 렐리아의 말에 매정할 정도로 차가운 태도로 렐리아를 돌려보내셨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조금 놀랐지, 뭐니.”

“의외네요. 그저 더는 렐리아와 억지로 엮지 않길 바라 한 말인데, 바로 그런 태도를 보였다니. 어쨌든 제게는 달가운 변화네요.”

유스티아의 해명을 듣고 나서야 그가 표정을 풀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까지도 유스티아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던 불안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드웨인의 급변한 태도가 리우리안과의 대화 때문이었다면 그의 의중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언젠가 제가 그랬듯, 황제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는 리우리안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리라. 일전 제게 보였던 모습을 드웨인의 앞에서도 보였다면 이전과는 다른 총기 있는 모습에 드웨인의 마음이 충분히 움직였을 만했다.

만약 지금의 이 짐작들이 사실이라면 드웨인에게 자신의 가치는 더욱이나 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더는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그날 응접실을 나가기 직전 그가 했던 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제 어미를 닮지 않아 참 다행인 일이지.]

하, 나를 닮지 않아? 내가 낳은 아드님인데 나를 닮지 않을 수가 있나.

유스티아는 헛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입술을 표독스럽게 비틀어 올렸다. 자신을 버리고 제 아드님의 손을 잡기로 작심한 모양인데, 그걸 순순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런데 저를 부르신 게 공작과의 일을 묻기 위함이셨습니까?”

요란하게 머리를 굴리던 유스티아가 일순 들려온 목소리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퍽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응? 아, 그것도 그렇고 네가 보고 싶기도 하여 겸사겸사 부른 건데…… 혹시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일이 없는 건 아니라 제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 볼까 해서요.”

“일이 있다니 그럼 얼른 가 봐야지. 이만 가 봐도 좋단다, 리우.”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리우리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유스티아는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과는 달라진 아들이 낯설기만 했는데, 이젠 그저 저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한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기꺼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입가로 요사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리도 훌륭히 장성한 아들이라면 어쩌면 드웨인을 더 자근자근 밟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듯 분비되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잇새로 음험한 웃음이 푸슬푸슬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자위가 검붉은색으로 반짝거렸다.

순식간에 응접실 안으로 음산한 분위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유스티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유스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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