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집요한 소유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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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집요한 소유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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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집요한 소유욕
2023.08.14.
“레이튼이라면 나랑 같이 영지에 있었을 수도 있어. 그러면 그를 통해 떠올릴 수 있는 기억도 분명 있을 거야.”
“그자가 널 바라볼 때마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레이튼은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 주던…… 앗!”
어이없다는 듯 해명하던 이벨리아의 잇새로 아찔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칼리프가 맞잡고 있던 이벨리아의 손을 힘주어 잡아당긴 탓이었다.
느닷없이 좁혀진 거리에 이벨리아가 놀란 눈을 끔벅였다. 순식간에 그의 체취가 코끝으로 확 풍겨 들어왔다. 그 탓에 기분 좋게 뛰는 정도이던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나 혼자로도 충분히 널 지킬 수 있어.”
“응?”
“나 아닌 다른 놈을 의지한다는 듯한 말, 듣기 불편하다고.”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불쑥 밀려오는 억울함에 반박하던 이벨리아는 일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란 걸 직감한 탓이었다.
리우리안으로 알고 지냈을 때도 그는 이따금 집요할 정도의 소유욕을 보여 왔다. 그래도 그땐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조심하는 것 같았는데, 정체를 밝힌 후론 이렇듯 거침없이 표현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남성과 눈만 마주쳐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지금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랬다. 자신이 해명해 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양가 없는 변명을 하는 대신 그녀는 닫혀 있는 침실 문을 힐긋 보았다. 그러곤 불안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곧 페일린이 올 거야.”
“그래서?”
“이런 자세는…….”
“문제 될 거 없지. 어차피 너랑 날 황태자 부부라고 알고 있을 텐데.”
칼리프가 지체 없이 받아쳤다.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이 옳은 말이었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퍽 곤란해졌다.
관계의 변화가 생기고 좋은 점이 꽤 많았지만, 그에 따르는 치명적인 단점도 하나 있었다. 사이가 가까워진 만큼 이따금 이런 스킨십이 생긴다는 부분이었다.
이벨리아는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생소했다. 국혼을 치르기 전도 그렇지만, 남편이 생기고도 이렇다 할 스킨십은 없었다.
언제나 다른 여자에게만 집중하는 남편이었으니, 털끝 하나 닿았을 리가 있을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여전히 난처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는 어떤 식으로도 이런 은밀한 자세에 면역이 없었다. 가끔은 그의 집요한 시선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안긴 것 같은 이런 자세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녀는 조심스레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렇다고 해 봤자 티도 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챈 건지 칼리프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이번엔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좀 전보다 한층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보였다.
“왜 매번 도망가지?”
“……도, 도망이라니?”
“손잡으면 실수인 척 손을 놓고, 안아 보려고 하면 갑자기 시녀한테 말을 걸고. 도망이 아니면 날 피하는 건가?”
칼리프의 정확한 지적에 이벨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연스럽게 한다고 했는데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벨리아는 괜스레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렸다. 변명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더는 제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그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벨리아는 제법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너무 적극적인 그의 태도가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이럴 때마다 집채만 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칼리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아마 지금쯤 그의 머릿속에선 그녀가 해 본 적 없는 생각까지 닿아 있을 터였다.
낮게 한숨을 내쉰 이벨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
“난…… 그냥 조금 천천히 하고 싶을 뿐이야.”
“뭘?”
칼리프가 아이처럼 물어 왔다.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이럴 때 보면 스킨십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내라는 게 통 믿기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런 그가 귀엽기도 했다. 칼리프에 대한 기억을 전부 떠올리면 그 안에 지금의 얼굴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조금 앳된 얼굴이겠지만, 말간 눈만큼은 변함없이 같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이벨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감아올리곤 그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뭐든. 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랑 속도가 같았으면 좋겠어.”
이보다 더 친절한 설명은 없었다. 덕분에 이벨리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칼리프가 퍽 불만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온전한 기억을 하나 떠올려야 손 한번 잡아 주겠다는 뜻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이벨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이 순간 제 품에 안겨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단 실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수록 그 안의 뜨거운 욕망은 점점 더 들끓어 갔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칼리프는 그녀를 볼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자제력을 잃어 갔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이제야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을 뿐이니, 너무 급하게 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나 바라던 순간인가. 그녀의 행복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내달린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순간을 전혀 꿈꾸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 그녀를 욕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에게 이벨리아는 달콤한 행복이자 그의 세상이었고, 유일하게 원하는 단 하나였다.
그래서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서운했다. 지금처럼 이토록 예쁘게 웃으며 달갑지 않은 말을 할 땐 더더욱.
“나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말이군.”
“이젠 급할 거 없잖아. 나는 이제 네가 누군지 알았고, 최선을 다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할 만큼 네가 좋고, 게다가 우리에겐 앞으로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을 거고.”
이벨리아가 틀림없다는 듯 말했다. 무엇 하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도통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향한 야속함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야박하게 굴 거면 예쁘게라도 굴지 말던가.”
그는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곤 얄궂게 말했다. 그러더니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 레이튼 경이라고 했나? 그자가 영지에 함께 있었다고? 그자를 보면 확실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겠어? 그럼 그자를 만나 보는 거로 하지. 물론 나도 동행한다는 전제하에.”
그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말이 쏟아졌다. 이벨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위로 창을 통해 따사로운 햇빛이 내려앉았다.
칼리프는 환하게 빛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차는 응접실에서 마시는 게 좋겠어.”
“응? 왜? 아마 페일린은 여기로 가져올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네 시녀는 진작에 응접실로 갔어.”
“정말? 그걸 어떻게 알아?”
“발소리로?”
“발소리? 문이 열린 적도 없는데 페일린의 발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럼에도 칼리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만 지으며 그녀가 손을 잡아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손이 그의 손 위로 겹쳐졌을 때 나란히 걸음을 떼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1년간 이어진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예민함은 기본이야. 그런 김에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널 지키는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다른 남자를 의지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정말 엄청난 집요함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벨리아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유스티아는 정오가 지나도록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잇새에 매달려 있는 엄지손톱은 며칠 사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최근 그녀는 종일 불안에 젖어 있곤 했다. 드웨인 공작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이었다.
[어쩌면 네 선택이 썩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제 어미를 닮지 않아 참 다행인 일이지.]
제 선택 그리고 어미.
고작 두 단어만으로도 그것이 리우리안을 가리킨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혼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째서 드웨인이 리우를 두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욱이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일은 꿈에서도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웨인이 흐뭇한 얼굴로 리우의 이야기를 한다고? 공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다 그 말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공작은 리우리안을 대놓고 괄시해 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 거야.”
유스티아는 이미 엉망이 된 손톱을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불안과 초조함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되도록 혼자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이대로 혼자 머리를 쥐어짜고 있어 봐야 답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유스티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침실 문을 향해 소리쳤다.
“테롯! 리우에게 어서 황후궁으로 들라 전갈을 보내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