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집요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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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집요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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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집요한 손길
2023.08.13.
드웨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네 선택이 썩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유스티아는 말없이 눈을 끔벅였다. 무얼 두고 하는 말인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드웨인에게선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보였다. 유스티아에겐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드웨인의 말이 못내 궁금했지만,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아 물었다가 무슨 폭언을 들을지 모르므로 차라리 조금 궁금하고 만 게 나았다.
그 생각으로 남아 있는 차를 들이켜기 위해 찻잔을 손에 쥐었다. 정확히 그 순간, 응접실을 막 빠져나가며 중얼거리는 드웨인의 목소리가 유스티아의 고막을 사정없이 내찔렀다.
“제 어미를 닮지 않아 참 다행인 일이지.”
유스티아의 얼굴이 속절없이 드웨인 공작을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땐 그가 모습을 감춘 후였고, 응접실 문 역시 처음 모습 그대로 닫혀 있었다.
“날, 닮지 않아 다행이라고?”
유스티아는 드웨인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을 어미라고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리우리안 페트로프. 설마 리우가 자신을 닮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한 것일까?
유스티아는 일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녀의 혼란을 잠재워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벨리아는 테이블 앞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마침 곁을 지나던 페일린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전하, 며칠 전부터 벚나무 가지를 왜 그리도 골똘히 보시는 거예요?”
“그게…… 뭘 좀 기억해야 하는 게 있어서.”
“기억해야 하는 거요?”
페일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제야 벚나무 가지에서 눈을 뗀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 이벨리아는 틈만 나면 벚나무 가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펠릭스가 한 말 때문이었다.
[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고민하는 틈틈이 저 벚나무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군.]
[아마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 저 벚나무가 생각보다 자주 등장할 테니까.]
펠릭스의 말을 유추해 보자면 영지에 있을 적 칼리프와 함께 벚나무가 있는 곳에 자주 갔었다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을 믿고 열심히 매달린 끝에 떠올린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그마저도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건 칼리프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기억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이 쌓여갈 때마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까지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가령 그를 ‘칼’이란 애칭으로 부를 때마다 가슴이 간지럽게 뛴다든가 하는 일이었다.
고작 그게 뭐라고 이벨리아는 그때마다 온통 상처뿐이던 자리 위로 새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문득 잊고 지냈던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리우리안 페트로프를 처음 보던 순간, 어째서 심장이 거칠게 뛰었던 건지에 대하여.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빠져들기만 했다. 그와의 결혼이 사랑 없는 시작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기꺼이 응할 만큼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답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남아 있던 칼리프의 얼굴을 리우리안에게서 발견한 것이리라. 제겐 리우리안의 얼굴이 곧 칼리프의 것이나 다름없어서 빠져들지 않으려야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엔 이유가 없다지만, 리우리안과는 말 한마디도 나눠 본 적이 없거니와 사소하게도 스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사랑을 느꼈고, 국혼 이후 수도 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그를 놓지 못했다.
리우리안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저답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리우리안을 사랑하는 거라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끌림이었는데…….
그런데 그 모든 상황에 칼리프를 대입시키면 이해되지 않던 끌림이 전부 납득이 되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에 남을 만큼 제게 소중했던 남자라면 머리를 쥐어뜯어서라도 남김없이 기억해야 맞았다.
이벨리아는 다시금 벚나무 가지를 응시했다. 그러곤 무엇이라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을 지나치는 페일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순간 이벨리아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손뼉을 쳤다.
“아! 페일린, 네가 있었지, 참.”
“네……?”
갑작스러운 이벨리아의 태도에 페일린이 걸음을 멈추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들뜬 마음을 도통 숨길 수가 없었다.
페일린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아이였다. 물론 요양차 영지에 다녀왔을 시기를 기준으로 그 후에 만나긴 했지만, 후작저에선 꽤 오래 지낸 편이니 오가며 들은 말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벨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페일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곤 눈동자를 반짝였다.
“페일린.”
“네, 네, 전하.”
“혹시 내가 어릴 때 영지에 갔었단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전하께서 영지에요?”
뜬금없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페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이벨리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페일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페일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어요. 어릴 적에 영지에서 지내신 적이 있어요?”
“아, 그래?”
이벨리아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수록 페일린의 의아함은 더욱 짙어졌다.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게 영지와 관련된 일인가 싶었다. 그런 거라면…….
“레이튼 경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응?”
“레이튼 경은 저보다 훨씬 일찍 후작저에 들어가셨잖아요.”
페일린의 말에 이벨리아의 눈동자로 일순 이채가 어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튼이 있었다. 왜 지금까지 그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벨리아는 다급히 페일린을 채근했다.
“페일린, 레이튼한테 응접실로 오라고 말해 줘. 내가 긴히 할 말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벨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이벨리아와 페일린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엔 언제 온 건지 칼리프가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페일린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칼리프의 시선은 여전히 이벨리아만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저도 모르게 편하게 말을 뱉은 이벨리아가 페일린의 눈치를 살피곤 어색하게 경어로 바꾸었다.
칼리프가 짧게 피식거렸다. 그녀의 실수를 향한 웃음이었다. 순간 민망해진 이벨리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 사이로 페일린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하, 차를 내올까요?”
“응, 부탁할게.”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칼리프가 얄밉긴 했지만, 어쨌든 반가웠다. 차가 아니라 자신이 내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을 만큼.
페일린은 금세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제야 이벨리아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점점 펠리스를 닮아 가는 것 같아.”
“지금 누구랑 누굴 비교하는 거지?”
“그렇잖아. 소리 소문 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게 둘이 딱 닮았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자가 여기에 자주 온 건가?”
예상치 못한 틈새 공격에 이벨리아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가 얼마나 질투심 많은 남자인지 알고 있던 터였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펠릭스는 물론 저까지 피곤해질 게 뻔했다.
“그렇게까지 자주는 아니고, 그냥 몇 번……? 그나저나 어젠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전해 듣긴 했는데.”
이벨리아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닌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펠릭스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좀 생겨서.”
“예상치 못한 일? 무슨 일인데? 안 좋은 일이야?”
이벨리아는 금세 심각해진 얼굴로 연거푸 물었다. 그 행동이 칼리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며칠 사이 몰라보게 편해진 모습이었다. 수도 없이 받은 상처에 작은 일에도 겁을 냈던 그녀였는데, 이젠 칼리프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이벨리아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그 사실이 칼리프는 이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제법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나저나 오늘도 계속 이걸 보고 있던 건가?”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테이블 앞으로 향한 칼리프가 벚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이벨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고 떠올린 기억이 그래도 제법 많으니까. 더 생각나는 게 없을까 해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기억할 거라고 말했잖아.”
이벨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가 어찌나 이뻐 보이던지, 칼리프는 새삼스레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제 삶에 이토록 찬란한 행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는 더욱이나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딴 남자를 빌려서 찾아야 하는 기억이라면 차라리 몰라도 돼.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칼리프는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 감싸 쥔 그녀의 손을 지분거렸다. 보드라운 살결 위를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집요하게 쓸어내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손길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