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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드웨인의 선택 (73/94)


  • 73화. 드웨인의 선택
    2023.08.12.


    “렐리아,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지?”

    유스티아는 눈썹을 대각선 아래로 내리며 렐리아를 온기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몸에 밴 행동이었다. 더욱이 가넷 공작까지 한자리에 있으니 그녀는 더더욱 언행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뵈어 무척 송구할 따름이어요.”

    “아니란다, 렐리아. 그동안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건 개의치 말도록 해.”

    “그래도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어요. 아직 체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조금 힘들긴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건강해진 모습으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렐리아는 어딘지 조금 뻣뻣한 모습으로 형식적인 대답만 늘어놓았다. 황후의 옆에 앉아 있는 드웨인 때문이었다.

    황후궁에 들라 전갈이 왔다기에 황후를 독대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드웨인도 함께인 걸 보면 그가 자신을 찾은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 렐리아는 설명할 수 없이 긴장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감옥에서 보았던 드웨인의 모습이 선명했다.

    [전하께 듣기론 네가 황위와 관련된 말을 입에 담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냐.]

    [그 말 자체를 입에 담지 말았어야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생각을 해.]

    [멍청하게 구는 건 이미 충분하니 그쯤 하도록 해, 렐리아. 여기서 나를 더 실망시켜 네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며칠은 걸릴 게다. 그때까지 네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반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렐리아는 그날 드웨인에게 들었던 말은 물론이며 그 순간에 느꼈던 공포와 절망감까지 무엇 하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절박하게 붙잡았는데, 며칠 걸릴 거라며 그동안 반성이나 하고 있으란 말을 듣던 순간에 일던 소름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상념에 잠긴 듯 멍하게 풀어진 드웨인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볼 것 같았다. 그러곤 그날의 소름 끼치던 목소리로 무엇을 반성했느냐 확인해 올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컨디션을 핑계로 다음을 기약하는 것인데.

    렐리아는 제 선택이 몹시도 후회됐지만, 이미 결정은 번복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맹목적인 눈길로 유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나마 드웨인을 최대한 외면하고 싶었다.

    “그동안 심려 크셨지요, 폐하. 제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는데, 너무 경솔했어요.”

    렐리아가 뜬금없이 반성의 기색을 가득 드러내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유스티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드웨인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라면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편히 말했을 텐데, 그게 드웨인의 성에 차는 대답은 아닐 것 같았다.

    더욱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드웨인은 황후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줄곧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전부터 렐리아와 함께 자리를 마련하라 성화를 부린 건 그였다. 그래서 기껏 만든 자리인데, 렐리아를 마주하고도 넋을 놓고 있는 걸 보면 절대 가벼운 사안 때문은 아닌 듯했다.

    유스티아는 괜스레 심호흡을 했다. 드웨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으니 괜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리우의 처분에 영애 역시 많이 서운했을 텐데, 먼저 그리 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구나.”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폐하께서 제게 해 주신 조언이 있었는데, 그걸 잊고 제가 어리석게 굴었어요.”

    “내가 한 조언?”

    “네. 앞으로는 폐하께서 해 주신 말씀처럼 전하가 선택하고 결정하시는 일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하려고 해요.”

    렐리아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태도였다.

    유스티아는 마음이 불편한 와중에도 렐리아의 태도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주제를 모르고 제멋대로 군다 싶었는데, 이제야 초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유스티아는 인자하게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적막은 금세 찾아왔다. 찻잔이 받침과 부딪치며 나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응접실을 메웠다. 그런데도 드웨인은 꿈쩍할 줄을 몰랐다.

    렐리아가 출옥하고도 넷트 후작이 언짢은 기색을 지우지 못하기에 예의상 만든 자리였다. 이 정도는 해야 넷트 후작이 남아 있는 앙금을 풀 것 같았다. 그러니 넷트 후작과의 관계에 신경 쓰던 드웨인에게 이 자리는 제법 중요한 자리였다.

    하지만 야망으로 가득하던 황태자를 만나고 난 지금의 드웨인에겐 더 이상 이 자리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드웨인에게 렐리아의 가치는 황태자가 아둔하다 못해 머저리처럼 굴었을 때 완벽히 빛을 발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황태자 스스로 미래를 그리는 거로 모자라 완벽한 그림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그는 예전과는 달리 렐리아의 존재를 더 이상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나는 내가 이루겠다고 다짐한 일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태자비와 잘 지내볼 생각입니다.]

    [한 명도 남김없이 내 발아래에 둘 겁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히 내게 반기들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날 우러러보게 할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태자비와의 돈독한 관계는 필연적인 요소 아니겠습니까? 그게 설령 연기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혹시 몰라 몇 번이고 그의 말을 상기해 봤지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게 하려고 태자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겠다는 건, 다른 말로는 렐리아와는 점점 더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도 했다. 최근의 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질투에 눈이 먼 렐리아가 경솔하다 못해 어리석게 굴며 황태자를 곤란하게 했다.

    이번이야 처음 있는 일이니, 평소 유순하던 태자비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건 말이 달라졌다.

    황태자 역시 그 부분을 우려하여 제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말한 것일 터였다.

    드웨인은 일순 초점이 잡힌 눈동자로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고작 시선만으로 렐리아가 움찔거렸다. 삽시간에 드웨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역시나 제국을 손아귀에 쥘 원대한 계획에 사용할 패로는 모자란 면이 많은 아이였다. 물론 넷트 후작만 생각했을 땐 렐리아만큼 좋은 패도 없었지만, 가시적인 한계가 있는 아이임은 분명했다.

    반면 황태자의 계획은 그가 목표한 바를 순조롭게 이어 간다는 가정하에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게다가 제게 그 계획에 대해 터놓은 것은 그가 그린 큰 그림에 자신의 자리도 분명 있다는 의미였다.

    그걸 잘만 이용한다면 모두를 발아래에 두겠다던 황태자를 제 발아래 둘 수도 있을 터.

    드웨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신중히 고민했다. 그때, 눈치만 살피던 렐리아가 유스티아를 향해 조심히 말을 건넸다.

    “저, 폐하.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 올려도 괜찮을까요?”

    “상의하고 싶은 것? 편하게 말해 보렴, 영애.”

    “입궁한 김에 황태자 전하를 뵈면 어떨까 하는데…… 저 때문에 심기 불편해지신 일에 대해 사과도 드릴 겸 인사를 드리면 어떨까 싶어요.”

    “아…….”

    유스티아는 순간 당혹감 어린 탄식을 뱉었다. 리우리안을 찾는 렐리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리우를 만나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렐리아의 출옥을 두고 끝까지 반대하던 아들이지 않은가. 이벨리아가 아니었다면 렐리아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얘기했다간 렐리아가 울며불며 제게 매달릴 것이 자명했다.

    유스티아는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선뜻 어느 한쪽으로도 답을 내어 줄 수가 없으니, 곤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도 대답을 해 줘야 했다. 이미 둔해진 머리를 힘차게 굴리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렸다.

    “이만 자리는 마무리하지요.”

    별안간 응접실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건 드웨인이었다. 유스티아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예? 아버님, 이만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이 퍽 당혹스러웠다. 내도록 상념에만 잠겨 있더니 갑자기 일어나겠다고? 그런데 계속 드웨인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뜻이 아닌 듯했다.

    드웨인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렐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애에게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공작님, 퇴궁하기 전에 황태자 전하를 잠시 뵙고자 하는데…….”

    “영애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단 내 말이 안 들리던가요.”

    “고, 공작님.”

    “영애의 안색이 아직 좋지 않으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안 그래도 마음이 무거울 후작에게 근심을 보태는 일일 겁니다.”

    그러니 잔말 말고 이만 돌아가라고.

    드웨인은 매정할 정도로 단호한 태도였다. 그에 렐리아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스티아를 향한 인사도 간신히 했다.

    그녀는 가련하기 그지없는 뒷모습을 보이며 퇴장했다. 그러고 나서야 유스티아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드웨인을 보았다.

    “투옥된 일로 일부러 렐리아를 부르신 게 아닙니까. 줄곧 생각에 잠겨 계시는 것 같더니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참았던 질문이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그걸 듣고도 드웨인은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지극히 익숙한 모습으로 그녀를 가뿐히 무시했다.

    유스티아는 테이블 아래 숨긴 양손을 꽉 그러쥐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욕감까지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분한 듯 입술을 거칠게 짓씹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찰나 드웨인이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당연히 뒷모습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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