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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비로소 오롯이 (72/94)


69화. 비로소 오롯이
2023.08.08.


[이브.]

누군가의 앳된 목소리가 자신의 애칭을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칼리프의 것이었다.

겨우 떠올린 그 목소리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되뇌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것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그러길 간절히 바라며 이벨리아는 짙은 두통에도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견뎠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칼리프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온통 흐리멍덩하기만 한 기억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 순간, 농도 짙은 고통 사이로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브.”

줄곧 미동도 하지 않던 이벨리아는 축 늘어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보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겨 준 남자. 칼리프 드윗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여긴, 여긴 왜…….”

이벨리아가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채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그를 그리워했던 마음이 속절없이 거칠게 뛰는데, 차마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왜 울어.”

“…….”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그가 그녀를 너무나도 걱정하고 있다는 거였다.

“하.”

이벨리아는 치미는 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너무도 선연히 보였다. 온통 자신으로만 가득 찬 어여쁜 그의 마음이.

제겐 그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그거야말로 기꺼이 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제게 그런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왜 왔어요.”

제법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가 자신을 미워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그녀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니, 좀 전보다 더욱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결국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이벨리아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나한텐 중요해. 그러니까 대답해. 누가 널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지? 황후가 또 그대를 불러냈나? 그게 아니면 렐리아가 찾아오기라도 한 거야?”

그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팼다. 그녀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지 깊게 골몰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게 중요하다고 했지만, 이벨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이 순간에도 오로지 자신만 걱정하고 있는 칼리프의 마음이었다.

“당신이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뭐?”

“이름조차도 기억 못하는 나를 잠깐도 미워할 줄을 모르는데, 근데 내가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냐고!”

이벨리아는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세차게 쏟아 내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정말 너무 힘들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원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알게 됐다.

그럴수록 그녀의 고통은 더욱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너무 좋아서 그를 향한 죄책감 역시 조금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그가 알 리 만무했다.

“……그까짓 일로 널 미워할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힘들게 오지도 않았어.”

“아니, 그렇게 했어야지. 나는 당신과의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다른 남자랑 결혼하기까지 했는데, 미워하고 원망했어야지! 여기까지 오지 말았어야지!”

“…….”

“어쩌자고 여길 와! 내가 뭐라고 당신 목숨까지 걸어 가며 여기까지 왔냔 말이야!”

이벨리아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제발 날 미워하라고, 원망이라고 하라고. 하지만 그는 그녀가 울분을 토하는 그 순간마저도 그녀에게서 애달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하…….”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으니까.”

칼리프가 애처롭게 속삭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것을. 분명 펠릭스는 그녀가 단잠에 빠져 있다고 했는데. 잠깐쯤 다녀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한 이유야 뻔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랬겠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마음이 점점 더 진창 속으로 잠겨 가는 것 같았다. 겨우 붙잡고 있던 의지의 끈도 이제 정말 놓아야 하는 시점이 온 것 같았다.

“역시나 난 그대를 힘들게 하는 존재밖에 될 수 없는 건가…….”

낮게 속삭이는 그의 입가로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벨리아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희뿌예졌지만,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의 표정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슬픔에 잠긴 것이 분명한데, 한편으론 금방이라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를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형언할 수 없이 무거운 적막이 이벨리아의 목을 거세게 욱죄었다. 그때 칼리프가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이렇게 울고 있던 게 나 때문이라면…….”

“…….”

“이젠 괜찮아질 거야. 더 이상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이벨리아의 불길한 예감을 완벽히 확인시켜 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남긴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미는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그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또 한 걸음,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자리로 물러났다. 마지막 한 걸음, 애처로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한번 본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성큼성큼 침실 문을 향해 나아가는 그가 아득히도 멀어져 갔다. 그 순간 이벨리아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다리가 위태롭게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이 제게 자격이 없다는 사실조차 잊게 했다.

이미 그에게 준 상처가 너무 많지만, 여전히 그와의 기억을 전부 떠올리지도 못했지만, 그의 옆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해 보자고.

염치없는 핑계를 대며 감히 그를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영원히 닿지 못할 것 같던 그의 온기가 손바닥 가득 퍼져 나갔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성마르게 말했다.

“가지 마.”

“…….”

“……제발, 가지 마.”

이미 온몸 가득 퍼져 버린 두려움에 이벨리아는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대신해 붙잡은 소매로 움찔하는 진동이 전해졌다.

이벨리아는 나머지 한 손까지 보태어 그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서럽게 우는 목소리에 간절한 마음을 덧대어 그를 힘껏 붙잡아 보았다.

“사실 아직도 다 기억해 내진 못했는데…… 노력 중이야.”

“…….”

“바보처럼 잊고 있던 기억들 전부 찾아보려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떠올려 보려고…….”

“…….”

“그러니까 칼,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이벨리아는 횡설수설 말했다. 그가 이대로 자신을 뿌리치고 가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을 차분히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그의 애칭을 불렀단 사실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다.

고작 ‘칼’이란 한마디에 그의 마음이 전에 없이 동요하며 너울지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분명 다 떠올릴 수 있어. 내가 노력할게. 최선을 다할게. 정말이야.”

“…….”

“그러니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진심을 전하기에 급급하던 목소리는 어느덧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완강하게도 침실 문만 향해 있던 칼리프의 발끝이 순식간에 이벨리아를 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벨리아의 녹안 가득 칼리프의 얼굴이 차올랐다.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벨리아는 더욱 서럽게 밀려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강직하게만 보이던 그의 적안이 물기에 번져 있었다. 마치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고통을 대신 보여 주듯 거칠게 요동쳤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벨리아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힘껏 팔을 뻗었다. 그러곤 그의 목을 망설임 없이 껴안았다.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고, 거칠게 뛰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피부로 전해졌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느꼈던 불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는 훨씬 더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안해. 미안해, 칼.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이벨리아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 사과의 말을 전했다. 고작 몇 글자 되지 않는 말로 이미 넝마가 되었을 그의 마음을 보듬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곧 그녀의 목덜미로 더운 숨이 쏟아져 내렸다. 허리를 감싸 안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고,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하지 마. 넌 잘못한 게 없으니까.”

“…….”

“힘들면 노력하지 않아도 돼. 이전의 날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

“……그냥 앞으로 네 옆에 있을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난 그거로 충분해.”

그럼 나는 또 이브 널 위해, 너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수 있어.

칼리프가 뒷말은 속에 삼킨 채 이벨리아를 힘껏 껴안았다. 그러니 이벨리아로서는 그가 속으로 삼킨 말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노력할 거야. 그래서 꼭 기억 찾을 거야.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줘. 내가 기억을 찾을 때까지. 네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을 나 역시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칼리프를 더없이 행복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삼켰던 그 말에 대해선 이벨리아에게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칼리프는 잔잔히 입매를 감아올린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들이 여전히 그의 머리를 무겁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은 채 그녀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야 비로소 오롯이 그녀를 마음 편히 안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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