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강한 황제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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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강한 황제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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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강한 황제가 될 겁니다
2023.08.11.
칼리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드웨인의 정곡을 찌르며 재차 찻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기민하게 눈동자를 굴려 드웨인의 변화를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드웨인의 사특한 눈동자만큼은 요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게서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단 방증일 터였다.
드웨인에게 렐리아는 그가 쥔 여러 개의 패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마 그중 가장 쉽게 휘두를 수 있는 패였을 것이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 드웨인이니, 자신이 그걸 파악하고 있을 거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칼리프는 여유롭게 차를 음미했다. 그 사이로 드웨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칼리프는 기꺼이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드웨인이 할 말이야 정해져 있을 테고, 그 정도 숨통은 풀어 줘야 쥐도 새도 모르게 길을 들일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그리 느끼셨습니까.”
“어머니의 응접실에서 내게 무엇 때문에 렐리아의 투옥을 명했냐고 말하던 공작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짐작했지요.”
“아무래도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갑작스러운 영애의 투옥 소식에 당혹스러웠을 뿐인데, 전하께는 그리 보인 모양입니다.”
“글쎄요. 당혹스럽다기보단 무척 성가시고, 그래서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렐리아가 전하의 심기를 거슬러 투옥된 일인데, 어찌 그 일을 성가시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내가 공작을 잘못 초대한 것 같군요. 난 공작이 어쩌면 나와 뜻이 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해한 모양입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공작의 변명에 칼리프는 진작부터 준비해 뒀던 말을 전하곤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러는 척했다.
사실 그는 이렇게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드웨인이 스스로 속내를 드러내게 하려면 이 정도 연기는 필요할 거라 판단했을 뿐이었다.
“전하.”
드웨인의 반응은 제법 즉각적이었다. 칼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조급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칼리프는 아래로 내리뜬 눈으로 공작을 한번 응시하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드웨인이 잠시 망설인 끝에 그에게 물어 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전하와 제가 뜻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진지한 얼굴로 묻는 드웨인과 달리, 그의 말을 들은 칼리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공작에게 렐리아가 그저 어여쁜 영애라면 나와는 뜻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인데, 내가 어찌 나와 뜻이 다른 사람에게 내 속내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단호한 칼리프의 말에 드웨인이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의기양양한 황태자의 태도가 석연찮았다. 렐리아를 투옥시켰을 때부터 무언가 위화감이 들기는 했지만, 오늘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알던 황태자가 아니었다. 전쟁통에서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 건지 이전엔 없던 총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제 머리 꼭대기에 오르겠다고 하는 행동들은 가히 칭찬해 줄 법했다. 이런 식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들다니, 이전의 리우리안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드웨인은 망설여졌다. 황태자의 제안을 수락해 이곳에 따라온 것도 어딘지 달라진 그의 의중을 파악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기세를 보아하니 어쩌면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뜻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단 직감이 밀려왔다.
드웨인은 그것이 무엇일지 못내 궁금했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가 빳빳이 들고 있던 꼬리를 슬쩍 내렸다.
“어차피 전하께서도 이미 다 알고 물으신 것 아닙니까.”
“제가 뭘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렐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성가신 존재라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제야 칼리프가 기껍게 웃었다.
“공작이 순순히 그렇게 말해 주니 문득 공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넷트 후작의 성화를 받아 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내 마음을 돌리느라 황궁까지 매일 같이 드나드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칼리프는 여유작작하게 다리를 꼬며 옅게 호선을 그렸다. 드웨인의 지난 행동을 꼬집는 말이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읊조리며 미안하다는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도록 했다.
어느 정도 드웨인을 이해한다는 인식을 최대한 은밀하게 주입시켜야 했다. 그래야 간특한 드웨인에게 들키지 않은 채 그의 숨통을 완전히 그러쥘 수 있을 테니.
드웨인은 미안하다는 칼리프의 사과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패를 하나 내려놓았으니, 칼리프의 패 역시 공평하게 하나를 드러내란 의미일 터였다.
칼리프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해 주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가 능청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피가 낭자한 전장에서 1년을 머무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내가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지만, 언제 어떻게 개죽임을 당하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겠구나.”
“…….”
“뛰어난 검술로 인정받던 기사들도 잠깐 방심한 틈에 너무 허무할 정도로 목숨을 잃더군요. 물론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지요. 그게 무엇일지 공작께선 짐작이 가십니까.”
허공을 응시하던 칼리프가 자못 흥미로운 얼굴로 드웨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에 드웨인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이내 답을 찾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엇이었습니까.”
“공작께서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시는군요. 나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피가 낭자한 살육의 현장에서도 누구보다 용맹하게 전장을 휘젓고 다니던 기사들이었는데, 그토록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요.”
“…….”
“누구보다 믿었던 기사를 여럿 잃고 나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은 전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치명적인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날 만큼 말입니다.”
일순 칼리프의 안광이 형형하게 번뜩거렸다. 그 모습을 빈틈없이 응시하고 있던 드웨인은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눈빛이 그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것 같더군요. 적어도 허무한 개죽임은 당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
“나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역대 어떤 황제보다도 강한 황제가 될 겁니다.”
“…….”
“언젠가 내가 지쳐 방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적들이 노릴 수 있는 치명적인 허점이 없는 황제가 될 거예요, 반드시.”
칼리프는 잠깐도 드웨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황위 계승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드웨인으로선 그 모습을 경이롭게 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제 핏줄이 야망에 끓어올라 안광을 빛내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평생에 걸쳐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한때 잠깐이지만 유스티아에게서 보았던 눈빛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스티아와 같은 듯하면서도 전혀 같지 않았다.
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태자의 눈빛이 지금의 이 강한 의지가 절대 일회성에서 그칠 야망이 아니란 것을 증명했다.
“나는 내가 이루겠다고 다짐한 일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태자비와 잘 지내볼 생각입니다.”
“……태자비 전하와 말입니까.”
“사람 앞날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언제 어디서 내게 반기를 든 적이 나타날지 모를 일인데 그 위험을 굳이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게 태자비 전하와의 관계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드웨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물었다. 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지금의 드웨인의 것과 닮아 있을 것 같았다.
칼리프는 제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걸 직감하곤 은은하게 입술을 휘어 올렸다. 그러곤 드웨인이 원하고 있을 말을 기꺼이 내어 주었다.
“한 명도 남김없이 내 발아래에 둘 겁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히 내게 반기 들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날 우러러보게 할 생각입니다.”
“…….”
“그러기 위해서라도 태자비와의 돈독한 관계는 필연적인 요소 아니겠습니까? 그게 설령 연기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칼리프는 어딘지 모를 허공을 멀거니 응시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무도 비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벨리아와의 관계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이 연기일 거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역시나 드웨인은 칼리프의 진심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
그는 기껍게 웃었다. 칼리프의 대답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는 당근과 채찍을 확실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드웨인은 지금이 당근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글쎄요. 공작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게 뭐든 공작의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못 건방져 보이는 황태자의 태도에도 드웨인은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제게 직접적으로 일을 지시하지 않겠다는 그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지요.”
“그래 주신다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드웨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응접실에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였다.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칼리프는 식어 버린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입 안 가득 온기를 잃은 홍차의 맛이 퍼졌다. 이전보다 더욱 씁쓸해졌을 뿐 아니라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떫은맛이 났다.
마치 머지않은 미래에 누군가가 느끼게 될 기분을 똑 닮아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