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질적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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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질적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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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질적인 그림
2023.08.10.
칼리프의 눈동자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했다.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요즘 들어 유난히 자주 부딪히는군요.”
질문에 맞지 않은 대답을 돌려주는 칼리프의 분위기는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단박에 상대를 찍어 누를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도 드웨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전하에겐 처소인 황궁이 제겐 폐하를 도와 정무를 보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아버님을 도와 정무를 보기 위해 드셨습니까.”
“제 행선지에 대해 물어보시는 거라면, 황후궁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드웨인은 입궁한 이유가 황후를 보기 위함이란 말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내뱉었다.
칼리프로선 비소를 머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 잠잠하다 싶더라니 본격적으로 황후와 작당 모의를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걸 숨길 생각도 없이 이토록 당당하게 드러내는 걸 보면 공작의 눈엔 여전히 자신이 애송이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일 테고. 그게 일순 칼리프의 마음을 전의에 들끓게 했다.
“그러시군요. 근래 들어 부쩍 어머님과 나누실 이야기가 많은 모양입니다.”
“부녀 사이에 대화가 없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도 틀린 건 아니군요. 그럼 어머님과 좋은 시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칼리프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여유롭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달가운 일을 앞두고 드웨인을 마주한 것이 썩 탐탁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이벨리아를 마주한 순간 씻은 듯 사라질 불쾌감이었다.
칼리프는 곧 만나게 될 이벨리아를 떠올리며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몇 발짝 채 떼지 못한 채 다시 자리에 멈춰야 했다. 이번에도 드웨인 때문이었다.
“전하께서는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내가 공작에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그에 관련해선 지난번에 내 뜻을 분명히 밝혔을 텐데요.”
칼리프는 여전히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 어조엔 날카롭게 벼려진 경고가 은근하게 묻어 있었다. 그걸 드웨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여유작작하게 칼리프를 향해 다가왔다.
“전하의 행선지를 제게 보고하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시간에 여유가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황후궁으로 향하는 건 어떠실까 하여 여쭈었을 뿐입니다.”
드웨인이 공손하게 손을 모아 잡곤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그동안 보여 왔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칼리프는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드웨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제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단 직감이 밀려왔다.
“제가 동행해도 되는 자리인 겁니까. 부녀간에 긴밀하게 나눌 대화가 있어 황후궁으로 가시던 길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부녀간에 나눌 대화야 늘 거기서 거기이지요. 긴밀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드웨인을 자극하기 위해 작정하고 뱉은 말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못내 찝찝했지만, 칼리프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벨리아의 약속을 앞두고 있던 차였다. 고작 드웨인의 알량한 속내를 알아보겠다고 그녀와의 약속을 미룰 순 없었다.
“미안하지만, 공작과의 동행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선약이 있어 바삐 움직이던 중이라 말입니다.”
“이런, 아쉽군요. 마침 렐리아 영애가 황후궁에 와 있다기에 전하와 동행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드웨인이 퍽 의미심장한 투로 아쉬운 척 말했다. 그게 고스란히 칼리프의 평정심을 자극했다.
“렐리아 영애라고 하셨습니까.”
“예. 전하의 은혜를 입어 얼마 전 출옥하긴 했지만, 전하의 심기를 그토록 어지럽힌 영애가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 넘어가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황후 폐하께서 영애를 부르신 모양입니다.”
친절하게 이어진 드웨인의 설명에 칼리프는 실소가 다 나올 것 같았다. 렐리아를 출옥시키지 못해 안달을 냈던 두 사람이 마치 따끔한 훈계라도 하려는 꼴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벌써 렐리아가 황궁을 드나든다고 하니, 묘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전하와 함께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선약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지요. 오늘은 저 혼자 황후 폐하를 뵙겠습니다.”
곤두선 신경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이어진 드웨인의 목소리가 그를 더욱 예민하게 했다.
칼리프는 드웨인을 날이 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올곧은 신하인 척 그의 허락을 기다리는 꼴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드웨인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대로 보내자니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드웨인의 말대로라면 황후를 비롯한 렐리아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거였다. 셋이 머리를 맞대 봐야 얼마나 기발한 수가 생길까 싶긴 했지만, 그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은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칼리프가 뒤에 서 있던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자비궁엔 자네 혼자 다녀오는 것이 좋겠어. 태자비에게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전해 주게.”
말끝에 칼리프가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시종을 응시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전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의미였다. 가령 지금 이 상황에 대한 것들을 말이다.
눈빛에 실린 메시지를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시종이 듬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칼리프의 적안으로 비웃음을 머금은 드웨인의 얼굴이 비쳤다.
“선약이라고 하셨던 것이 태자비 전하와의 약속이셨습니까.”
“공작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지요.”
“이젠 시종들까지 대동하시고 비 전하를 만나시는 모양이군요.”
“그 말은 꼭 나의 비를 만나는 일이 남들 눈을 피해 은밀히 해야 하는 일이란 듯이 들리는군요.”
“그렇게 들리셨다니 송구합니다. 이전에는 전하께서 그러지 않으셨던 거로 기억하는지라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니 곡해는 하지 마시옵소서.”
드웨인이 고개까지 숙이곤 사죄의 말을 건네 왔다. 그답지 않은 지나친 겸손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비웃고 괄시하는 것일 터였다.
이런 식으로 방법을 바꾸어 자극한다면 저 역시 응당 응해 줘야 맞는 것이겠지.
“봤다시피 방금 막 마음이 바뀌어 그러는데, 나와 동행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황후궁으로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공작과 동행을 하겠다고 했지, 함께 황후궁으로 간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칼리프가 퍽 의미심장하게 입술을 휘어 올렸다. 그러자 처음으로 공작의 안면에 균일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변화에 속내를 파악해 보려는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둘 순 없지. 칼리프는 곧장 드웨인을 향해 제안했다.
“공작께서 괜찮으시다면 함께 황태자궁 응접실로 향하고 싶은데요. 함께하시겠습니까.”
***
“허, 뭐야? 이벨리아 만나러 간다더니 뜬금없이 웬 노인네랑 다시 돌아왔어?”
칼리프가 자리를 비우고도 줄곧 창가 근처 테이블을 지키고 있던 펠릭스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한껏 들뜬 모습으로 이벨리아를 만나러 간 칼리프가 드웨인 공작과 함께 황태자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엄청 안 어울리는 그림인데, 재미는 있어 보이네.”
펠릭스가 피식 웃으며 턱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그는 칼리프와 드웨인이 황태자궁 입구로 들어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급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가자 막 계단을 올라온 둘의 모습이 보였다.
펠릭스를 발견한 칼리프가 순간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표정을 감추었다.
갑자기 나타난 펠릭스가 거슬리긴 했지만, 어차피 드웨인의 눈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펠릭스도 공작의 얼굴을 모르는 게 아니니, 눈치껏 행동할 터였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펠릭스가 직접 상황을 본다면 추후 자신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프가 펠릭스를 향해 짧은 눈길을 보내곤 드웨인과 응접실로 향했다.
“앉으시지요.”
“저를 전하의 궁으로 초대해 주시다니 황공합니다.”
드웨인이 응접실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형식적인 예의를 차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칼리프는 한 번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짧게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도 무언의 신경전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벽에 기대선 펠릭스가 그 모습을 흥미롭게 관망했다.
불편한 기류가 흐르길 한참, 시녀 하나가 응접실에 들기 전 칼리프가 명한 차를 들고 나타났다.
각자의 앞에 찻잔이 놓이고 시녀가 물러나자 칼리프는 여유작작하게 찻잔을 들어 입가에 기울였다.
이벨리아와 함께할 땐 달큼하던 차가 드웨인과 나눠 마시니 씁쓸하기만 했다. 칼리프는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하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빈틈없이 드웨인을 바라보았다.
“공작께선 렐리아 영애가 어지간히도 어여쁘신 모양입니다.”
“어여쁘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가넷 공작가와 넷트 후작가는 오래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이어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아이이니,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는 아이입니다.”
“그렇습니까?”
공작의 가식적인 대답에 칼리프가 짧게 비소를 흘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드웨인은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에 능한 자였다.
이토록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상대를 기만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드웨인은 그 일을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해내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칼리프로서도 굳이 적당한 말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이상하군요. 영애의 출옥을 명하기 전 봤던 공작은 영애를 무척 성가셔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