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고마워,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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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고마워,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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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고마워, 진심으로.
2023.08.09.
넷트 후작저.
렐리아는 벌써 며칠째 침실 밖으론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끔찍했던 감옥에서 나온 것이 벌써 닷새가 넘어가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그때처럼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다…….”
이벨리아 때문이야.
렐리아는 그녀를 감옥에 집어넣은 거나 다름없던 그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모진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닌데 철저히 훈련된 개처럼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소름 돋을 정도로 두려웠다. 한 번 더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간 또다시 투옥되어 영영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향한 증오심은 더욱더 극에 달해 갔다.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가 갈릴 정도였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렐리아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독이 바짝 오른 거로 모자라 광기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 순간 이벨리아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목을 졸랐을지도 몰랐다.
투옥되어 있을 때부터 심해진 그 증상은 출옥하고 나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탓에 렐리아를 오랜 시간 봐 온 전속 시녀조차 그녀의 시중들기를 꺼릴 지경이었다.
그 탓에 렐리아가 찾지 않으면 그녀의 시녀는 이른 아침과 잠들기 전, 중간중간 식사 때만 렐리아를 찾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조용하던 침실 안으로 별안간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녀의 전속 시녀였다.
“저…… 아가씨.”
그녀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렐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도 렐리아는 허공만 노려볼 뿐 잠깐도 시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녀의 입장에선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주인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시녀는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켜고는 렐리아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방금 황궁에서 전갈이 도착했어요. 아가씨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다면 황후궁에 들었으면 조, 좋겠다고…….”
“어디라고?”
허공만 노려보던 렐리아가 일순 몸을 벌떡 일으키곤 시녀를 응시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시녀가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화, 황궁에서.”
“아니, 그다음.”
“황후궁, 말씀이세요……?”
겁에 질린 시녀의 목소리에 순간 렐리아의 눈동자에 위험한 이채가 어렸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감옥에 갇히고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을 꺼내 주지 않기에. 잠시 방문했던 가넷 공작도 본 적 없이 싸늘하게 굴기에. 가까스로 출옥하고 나서도 전혀 자신을 찾지 않기에. 그런데 황후궁에서 전갈을 보내왔다니.
“당장 가겠다고 답신을 적어 황후궁에 보내라고 해. 넌 내 시중 좀 들고.”
시녀에게 명령한 렐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놓고 어디서 나온 기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렐리아의 모습이 시녀로 하여금 더욱 겁에 질리도록 했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시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렐리아의 시중을 들기 위해 뒤를 쫓았다.
***
점심 무렵, 펠릭스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벽을 보고 선 칼리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정확히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는 칼리프의 모습이었다.
도통 곱게 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닷새 전, 이벨리아와 상황을 잘 해결한 듯싶더니 그날 이후 몰라보게 안색이 환해졌다. 그를 걱정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제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 미련 없이 생을 끝낼 것 같던 모습보다야 지금이 훨씬 낫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모습이라니 얄미운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죽을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이벨리아와의 약속을 앞두고 거울만 보고 있으니, 그 꼴이 예쁘게 보일 리가.
“왜, 예쁘게 단장이라도 할 생각인가? 예쁜 모습으로 이벨리아를 만나려고?”
참다못한 펠릭스가 얄궂게 말했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묵묵부답에 요지부동이었다.
“이봐, 내 말은 또 안 들리는 거야? 그래? 이능은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너 역시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데? 사람 가려 가며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능력 말이야.”
펠릭스의 목소리는 온통 심술로 가득했다. 그게 먹히기라도 한 건지, 미동도 하지 않던 칼리프가 뒤를 돌아봤다.
“빈정대지 마.”
“하, 이 정도는 빈정거려야 황송한 시선 한번 하사해 주시는군그래.”
“대꾸할 가치도 없군.”
칼리프는 앞선 경고에도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는 펠릭스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나선 잠시 주었던 시선조차 매정하게 거둬 갔다.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발끈한 펠릭스가 주먹까지 꽉 움켜쥐곤 속사포처럼 서운함을 토로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근데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가지 말라는 이벨리아 한마디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그래서 지금 네 말은 내가 괜찮아진 게 불만이란 뜻이야?”
“그게 불만이란 게 아니라 서운하다 이 말이지!”
“왜 서운해하는 건지 모르겠군. 울고 있는 이벨리아를 자고 있단 말로 속여 나를 그녀에게 보낸 건 네가 아닌가?”
“그거야……!”
펠릭스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직설적인 칼리프의 말에서 틀린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울고 있는 이벨리아를 가리켜 자고 있다고 거짓말한 것도 자신이었고, 그걸 핑계 삼아 칼리프를 이벨리아에 보낸 것도 자신이었다.
고로 상황을 이렇게 호전시킨 건 전부 제 덕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업적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역시 인간은 간사한 존재였다. 일이 해결되기 전엔 온갖 불쌍한 모습으로 제 동정심을 자극하면서 일이 해결된 후엔 제가 내린 은혜는 금세 잊어버렸다.
특히나 이 땅의 수호신인 자신을 지나가는 똥개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게 칼리프 녀석이니 어쩌면 제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너무 지나친 바람일지 몰랐다.
펠릭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칼리프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손에 쥐었다. 어떻게 봐도 삐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데이트 준비에만 집중했다.
펠릭스는 시야에서 알짱거리는 그의 움직임이 퍽 거슬렸지만, 애써 외면하며 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칼리프의 준비가 다 끝나가도록 그는 책장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신경질적인 손길로 책을 탁 덮어 버렸다. 차라리 낮잠이라도 즐기는 편이 나을까 싶어 햄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찰나,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고마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단어에 펠릭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어느덧 훨씬 더 말끔해진 칼리프가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뭐라고 했지?”
“고맙다고.”
“뭐라고……?”
“네 덕이 크다는 거 알아. 그날, 네가 날 이벨리아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그녀와 데이트하는 일은 상상 속에서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
“네 덕분이야. 고마워, 진심으로.”
“허.”
펠릭스가 헛숨을 내쉬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듣고, 제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배은망덕의 상징이라고 해도 무방한 칼리프가 진심으로 내게 고맙다고 한 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같은 생각만 되뇌던 펠릭스의 입가로 일순 미소가 번졌다.
“아니, 뭘 그 정도로. 나한텐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뿌듯하긴 하군.”
펠릭스가 어느덧 불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칼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러니까 그따위 유치한 짓은 그만두고 아니꼽다는 눈 좀 그만했으면 좋겠군.”
앞선 감동적인 분위기를 단박에 깨트리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펠릭스는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적어도 고맙다고 하던 순간의 칼리프는 진심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므로.
이죽거림에도 미소를 지우지 못하는 펠릭스를 보며 칼리프는 다른 의미로 피식거렸다. 그러곤 미련 없이 펠릭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벨리아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코앞이었다.
***
태자비궁으로 향하는 걸음의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숨을 헐떡이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뒤를 따르는 시종들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간 태자비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황태자가 종종 태자비궁을 찾는다 싶더니 얼마 전부턴 대놓고 반가운 얼굴로 태자비를 찾았다.
게다가 태자비에게 향하는 길이면 걸음의 속도가 어찌나 빨라지는지 그것만으로도 하루 운동량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음장 같던 황태자가 부쩍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랜 시간 주인으로 섬겨 왔음에도 딴 사람인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의 변화를 싫어하는 시종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충성을 다짐한 주인이 이제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하여 그들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어미의 품에서 벗어난 황태자, 태자비와 다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황태자, 차기 황제로서 미덕을 갖춰 가는 황태자.
이제야 그들이 온전히 믿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완벽한 주인이 된 것이다.
주인의 걸음을 맞추느라 태자비궁으로 향하는 일이 조금 숨 가쁘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어느새 멀지 않은 곳에 태자비궁의 외관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제 곧이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별안간 황태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걸음을 붙잡은 목소리는 더욱 예상 못한 것이었다.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는지요.”
드웨인 가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