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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단 하나의 기억 (68/94)


  • 68화. 단 하나의 기억
    2023.08.07.


    깊은 밤, 칼리프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누적된 피로로 피부는 거칠어졌고, 눈 밑은 거뭇해졌으며, 눈은 흰자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벌겠다.

    그런데도 그는 잠을 자지 못하는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밤이 되면 더욱 또렷해진 눈으로 어딘가를 갈망하듯 쳐다보았다.

    보다 못한 펠릭스가 칼리프를 향해 한 소리 했다.

    “혹시 죽기로 작정한 건가? 상황이 복잡해지니 이런 식으로 죽겠다 결심이라도 한 거야?”

    펠릭스가 거세게 비아냥댔다. 하지만 목소리에 밴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벌써 며칠째 칼리프는 모두가 잠든 이 늦은 밤에 창가만 지키고 서 있었다.

    달래도 보고, 화도 내 보고, 별짓을 다 해 봤지만, 그는 며칠 내도록 같은 행동만 반복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봐, 내 말 듣고는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어.”

    “밤새도록 창밖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당연히 잠을 잘 수 없겠지. 그만하고 좀 누워.”

    펠릭스는 신경질 가득한 손길로 머리를 털어 내며 찌푸린 눈으로 칼리프를 보았다.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칼리프는 짧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창밖 너머를 향한 얼굴이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펠릭스는 진저리를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은 제법 길게 지나갔다. 피로를 견디다 못한 펠릭스가 긴 소파에 털썩 몸을 누였을 때였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칼리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을까?”

    “무슨 말이야, 그건 또.”

    “이벨리아 말이야.”

    가까스로 펴졌던 펠릭스의 미간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도대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 어디가 예쁘다고 저렇게 미련하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모든 것에 신경을 끄고 저라도 편안해지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은 봉인에서 풀려났고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인간사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트리탄 국민들과는 달리 발체로페 제국엔 신을 믿는 사람도, 신을 섬기기 위한 신전도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펠릭스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칼리프가 너무 가여웠다. 그처럼 제 흥미를 돋운 인간도 없었지만, 그만큼 제 동정심을 자극한 인간 또한 없었다.

    빌어먹게도 칼리프는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쓰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정말 돌겠군.”

    펠릭스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칼리프만큼이나 미련할 정도로, 얼마 남지 않은 힘을 긁어모아 정신을 집중했다.

    어차피 저야 하루만 단잠을 이뤄도 금방 회복될 터였다. 하지만 제 눈앞의 인간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벨리아뿐이었다.

    “하.”

    정신력을 모아 한곳에 집중하던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만큼 확연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이벨리아의 기운이 몸속 가득 전해졌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칼리프만큼인지는 몰라도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알게 된 모양이었다. 부친을 만나기로 했다더니, 몰랐던 사실에 대해 듣기라도 한 건가.

    펠릭스는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며 기운을 풀었다. 그러곤 다시금 칼리프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리움에 젖은 눈동자로 창밖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인데, 이 순간만큼은 굳이 속을 꿰뚫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읽혔다.

    그녀를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그는 무척 우직한 구석이 있어서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뜻을 바꾸지 않는 편이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에게서 그런 느낌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누군가 그의 등을 떠민다면 흔쾌히 뜻을 바꿀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 누군가를 자처한다면, 오늘 그의 밤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았다.

    그게 완전한 끝을 향해 내달리는 쪽이든,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결론으로 향하는 쪽이든.

    그래서 펠릭스는 기꺼이 그의 등을 떠밀어 주기로 했다.

    “곤히 잠들어 있네.”

    “……뭐?”

    “이벨리아 말이야. 곤히 자고 있다고.”

    칼리프의 눈동자가 곧장 펠릭스를 향했다. 아주 오랜만에 받아 보는 시선이었다. 눈 맞추는 것도 이젠 이벨리아를 빌려야만 할 수 있는 거라니. 펠릭스는 퍽 허탈해졌지만, 그의 등을 떠밀기 위한 말은 아끼지 않았다.

    “너는 며칠째 한숨도 못 자고 있는데, 그녀는 속 편히 잠이 오는 모양이군.”

    그는 뻔뻔한 얼굴로 이벨리아를 비난했다. 최근 그녀에게 실망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유감이 있는 건 아닌데 칼리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수가 통하기라도 한 건지 칼리프가 조금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입을 다문 건 이제 곧 그가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일 테니.

    그러니 그의 마음이 다시 단단해지기 전에 완벽히 허물어야 했다.

    “네가 잠깐쯤 그녀에게 다녀온다고 해도 전혀 모를 정도로 단잠을 자고 있어.”

    “…….”

    “그러니까 보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창밖만 보고 있지 말고,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와.”

    완벽한 한 방이었다.

    ***

    황태자비의 침실 안은 밤이 깊도록 흐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이벨리아에게서 새어 나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벨리아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부친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낙인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미안하다, 이브.]

    […….]

    [내가 네게 거짓말을 했어. 그때의 넌…… 요양차 영지에 있었던 게 맞단다.]

    에드윅의 잇새로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이벨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뭐라고 대답할 정신도 없이 절로 떠오르는 펠릭스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던 칼리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그랬다.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고. 아주 짧은 순간으로도 그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냐고.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말했지만, 말도 안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그녀의 기억 속에 리우리안 페트로프, 제국의 황태자로서만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칼리프 드윗이란 이름은 어떤 식으로도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꿈이라고 믿었던 그 순간들이 정말 사실이었다면, 혼자인데도 외롭지 않다고 느꼈던 모든 시간 속에 칼리프가 존재했던 거라면…….

    이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거세게 밀려오는 죄책감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셨어요. 영지에 있었다고 했던 제게 왜…… 왜 꿈을 꾼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벨리아는 절망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차마 감은 눈은 뜰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원망의 크기가 너무 컸다. 부친과 눈을 마주한 순간 정제되지 않은 원망을 전부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부친의 목소리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땐 그게 널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요! 왜!! 그게 왜 절 위한 일이었는데요!]

    겨우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져 내렸다. 언제나 자랑스럽기만 했던 아버지인데, 처음으로 그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게 거짓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칼리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산지옥이나 다름없던 며칠간의 괴로움은 순식간에 원망으로 탈바꿈했고, 에드윅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그게 비겁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이벨리아는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괴로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칼리프를 향한 죄책감만큼은 빠르게 몸집을 부풀려 갔다.

    이벨리아는 온몸을 들썩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보는 에드윅의 표정은 더욱이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과거의 선택을 짙게 후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이벨리아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걸 에드윅은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곤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정신을 잃은 널 업고 온 그 아이가…… 황제의 아드님과 너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너무 위험한 아이였지.]

    […….]

    [그래서 아비는, 네가 그 아이를 잊고 지내길 바랐어. 네가 결국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에드윅은 그 말을 끝으로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충분히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더는 부친을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제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와 기억도 나지 않는 말로 아버지와의 자리를 마무리하곤 이벨리아는 곧장 침실로 돌아왔다. 그러곤 침대 위에 누워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페일린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녀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건지 이벨리아에게 쉬이 말을 붙이지 못했다.

    이벨리아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덕분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감당하기 벅찬 감정을 토해 낼 수 있었으니까.

    온종일을 울었는데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괴로운 감정을 토해 내면 조금은 정신이 들 줄 알았는데, 정신이 들긴커녕 괴로움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능하게도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부친의 말을 듣고도 그녀가 떠올린 기억은 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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