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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마지막 힌트 (65/94)


  • 65화. 마지막 힌트
    2023.08.04.


    “그럼 어떡하란 거예요, 나더러. 그게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요.”

    “…….”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내가 마음에 품었던 전하가 아니란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전하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아닐 수가 있다고 말하는 건지…… 그걸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고요.”

    이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울분을 토하듯 터져 나온 말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가득 배 있었다.

    그가 이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었다. 당최 추슬러지지 않는 제 감정의 중심을 잡기 위해 이를 악문 와중에도 자꾸만 칼리프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그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잠긴 찰나면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중심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무너졌다.

    그 과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쪽으로도 수확은 생기지 않았다.

    감정의 중심이 잡히지 않았고, 그를 위험에서 구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이대로 무사히 황궁을 벗어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숨죽이고 사는 것.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시간이 덧대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펠릭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떼었다.

    “이봐,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칼리프가 내 말을 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이벨리아가 황궁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더군, 그러니까 나와 지금 당장 나가자, 그렇게 얘기하면 칼리프가 좋다고 나를 따라나설 것 같냐는 말이야.”

    너무 답답했다. 그 마음은 고스란히 그녀를 향한 화가 되었다.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칼리프를 떠올리지 못하는 그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칼리프는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끔찍한 생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기력할 수가 있는 걸까. 그녀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고 있는 그가 있는데, 그녀의 포기는 어째서 이토록 빠른 것일까.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아니까 그쪽한테 부탁하는 거잖아요.”

    “그래. 네 말대로 칼리프는 혼자 살겠다고 황궁을 빠져나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정말 몰라서 물어요?”

    펠릭스의 빈정거림에 참다못한 이벨리아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도 혹 문밖의 누군가가 목소리를 듣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소리를 낮추며 불안한 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진짜 황태자가 아니란 걸 들키는 순간, 지금처럼 멀쩡히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가. 황제는 몰라도 황후는 가만있지 않겠지. 칼리프가 본색을 드러냈으니 가넷 공작은 기껍게 축배를 들고도 남을 작자이고.”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펠릭스에게선 작은 균열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에게는 그것까지도 빈정대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맞닿은 이에 힘을 준 채 심호흡을 했다. 당장 돌아가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라 매정하게 내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쯤은 견뎌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제발, 펠릭스…….

    “그래요. 그쪽 말이 맞아요. 황후 폐하와 가넷 공작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분들이죠. 그러니까 제발 칼리프를 데리고 나가 달라구요. 그 사람이 여기서 더 위험해지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는 것뿐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이벨리아가 무력하게 웅얼거렸다. 그 순간 푸른 눈의 안광이 그녀를 꿰뚫듯 응시했다.

    “그가 그렇게나 위험한 상황이니까 내게 이런 부탁을 할 게 아니라 이벨리아, 네가 하루라도 빨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펠릭스는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벨리아를 향해 일갈했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로 원망의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동정심은 어떻게도 피어나지 않았다.

    원망이라면 그녀가 가질 감정이 아니었다. 칼리프는 꿈도 꾸지 않는 감정을 그녀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마음에 품는단 말인가.

    “하, 내가 진짜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

    “칼리프가 회귀자란 사실은 알고 있나?”

    펠릭스는 속에 꽁꽁 묻어 두고 있던 말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처음 듣는 말인지 곧장 펠릭스를 향한 이벨리아의 눈동자에 잔떨림이 일었다. 펠릭스는 치미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모르겠지. 그자가 그런 얘기까지 했을 리가 없지. 그 말까지 했다간 네가 얼마나 더 고통스러워하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쯤 되니 펠릭스는 칼리프가 정말 경이로웠다. 그가 그녀를 끔찍하게도 아낀다는 건 이미 지난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가 품은 마음의 깊이가 도통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과연 그에게 끝이란 게 있기는 할까.

    “칼리프는 회귀자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그는 보름 전의 너를, 또 한 달 전의 너를 수도 없이 만나왔어.”

    “하……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너한테 진짜 황태자와 칼리프의 생김새가 똑같다는 건 말이 되는 사실인가?”

    펠릭스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건지, 이벨리아가 놀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이 모든 사실을 하루 이틀 안에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녀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가 사실은 진짜 황태자가 아니란 말이나, 심지어 그 가짜가 회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회귀자라니. 거기다 그 회귀자는 아직 그녀가 인지하지 못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소설 한번 거창하게 썼다고 표현할지도 몰랐다. 그걸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역시 처음엔 칼리프에게 이벨리아는 너무 다그치지 말라 조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더는 그녀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어제오늘 칼리프의 눈빛이 서서히 죽어 가기 시작한 이상, 이벨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해야 했다. 그녀의 힘만으로는 영 버겁다면 이런 식으로 다그쳐서라도 등을 떠밀어 줘야 했다.

    “그가 회귀를 반복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벨리아, 네 행복을 위해서야. 그는 널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널 힘들게 한 황태자를 수도 없이 죽였고, 피가 낭자한 살육의 현장에서 악착같이 버텨 냈어. 그렇게 황궁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널 보면서 절망만 해야 했지.”

    “…….”

    “나는 이번만큼은 정말 간절히 바랐어. 이벨리아, 네가 이전의 생과 같은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기를.”

    펠릭스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의 어디에서도 그녀를 향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런 펠릭스를 야속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욱신거렸다. 펠릭스의 말을 단 하나도 납득할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각인되듯 머릿속에 박혔다.

    무엇 하나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이 없는데, 그런데도 펠릭스가 말하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일었다.

    이 악물고 참았던 눈물들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이대로 털썩 주저앉고 싶을 만큼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한결 누그러진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프는 절대 널 두고 혼자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 끔찍한 반복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회귀자가 된 건 되돌릴 수 없었을지 몰라도, 반복되는 생에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벨리아 널 위해 희생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려. 그리고 이번엔 네가 칼리프를 위한 선택을 해.”

    펠릭스가 마지막 간절한 바람을 담아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오롯이 마주한 이벨리아가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온통 믿기 어려운 말을 받아들여 보려는 그녀의 노력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묵묵히 기다리길 한참, 무겁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우선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줘요. 곧 아버지가 도착하실 거예요.”

    “그래?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펠릭스는 눈썹을 들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침실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는 햄스터를 찾아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 네가 어릴 적, 정말로 캐롤라인 후작령에 간 적이 없는지.”

    “그건…… 왜요?”

    되묻는 이벨리아의 말이 돌아왔지만, 펠릭스는 대꾸하지 않은 채 햄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루밍하고 있던 햄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랐다. 그제야 펠릭스는 허리를 펴곤 칭찬하듯 햄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리프와 너의 시작이 거기서부터니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대수로이 말하며 침대 옆 협탁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얼마 전 칼리프가 이벨리아에게 선물한 벚나무 가지가 예쁜 화병에 꽂혀 있었다.

    저걸 선물했을 때 작은 힌트라도 줬으면 얼마나 좋아.

    펠릭스는 미간을 좁힌 채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이내 이벨리아를 향한 얼굴에선 그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고민하는 틈틈이 저 벚나무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군.”

    이어진 펠릭스의 말에도 이벨리아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줄 수 있는 힌트는 여기까지였다.

    “아마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 저 벚나무가 생각보다 자주 등장할 테니까.”

    그는 마지막 힌트를 건네고 나서야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의 실루엣을 타고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이제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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