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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그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64/94)


64화. 그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2023.08.03.


펠릭스는 팔짱을 끼고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 침대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선의 끝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칼리프가 있었다.

벌써 며칠째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바보처럼 한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하…… 진짜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연인이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답답한 기색이 가득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저 마음이 저릴 정도로 안타깝기만 했는데, 그게 사흘이 되고 나흘째 이어지자 안타까운 마음조차 가려질 만큼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브가 못 견디게 괴로워했어. 그렇게 만든 게 결국 나인 거지.]

문득 이틀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그를 보며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과장 좀 보태어 백번쯤 물었더니 그제야 그가 힘없이 웅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못 충격적이었다. 이따금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이야 익숙하게 봐 왔지만, 그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모든 걸 그만둘 것처럼 생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잠깐도 칼리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혹여나 죽음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죽음은 맞이하지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후의 그가 너무 걱정되었다.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이미 모든 의지를 다 잃은 그인데, 그대로 미치지 않는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더는 관여 안 하려고 했는데.”

펠릭스는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이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칼리프에게 작은 의지나마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이런저런 일들에 펠릭스 역시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초월적 존재인 그가 인간사에 개입하는 건 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원래는 그것이 금기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큰 이 시점에 이벨리아와 칼리프의 일에 관여한다면 제법 타격이 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둔다면 둘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최악으로 내달릴 게 뻔했다.

“후우.”

펠릭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있는 햄스터를 바라보았다. 칼리프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릴 것 같진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갈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선 이벨리아에게 다녀오는 방법뿐이었으니까.

펠릭스는 손바닥 위에 햄스터를 올리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그의 실루엣을 타고 푸른빛이 섬광처럼 터지고, 사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그가 내도록 앉아 있던 자리에 예사롭지 않은 햄스터 한 마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이벨리아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따금 움직일 때라곤 시간이 얼마쯤 흘렀는지 살필 때가 유일했다.
시간이 너무 더뎠다.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은 이토록 간절한데.

[페일린, 아버지가 언제쯤 오신다고 했지?]

[저녁쯤 도착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몇 번이고 연거푸 묻는 자신에게 페일린은 귀찮은 기색 없이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얼굴에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자신을 걱정해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페일린도 참 안쓰러웠다. 주인을 잘못 만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언행에 신중을 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벨리아의 잇새로 허망함에 물든 웃음소리가 힘없이 새어 나왔다.

전부 자신이 문제였다. 페일린도, 칼리프도.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건 저였다. 그게 자꾸만 그녀를 자괴감에 빠져들게 했다.

이벨리아가 무력하게 고개를 떨궜다.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린 묵직한 한숨이 당연한 듯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벨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미 온 마음을 좀먹은 절망과 무기력함 사이를 헤맸다. 그때 반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햄스터 한 마리가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던 이벨리아가 햄스터의 움직임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펠릭스는 침실을 두리번거리며 이벨리아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고는 그 앞으로 다시금 짧은 다리를 놀렸다.

아래를 향한 이벨리아의 얼굴이 온전하게 보이는 자리까지 가서야 움직임을 멈추곤 혀를 찼다.

-엉망이긴 이쪽도 마찬가지군.

별안간 침실을 울린 목소리에 이벨리아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곧장 햄스터가 눈에 들어왔지만, 이전처럼 생기 있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다는 듯, 그녀가 다시 눈꺼풀을 내려 닫았다.

칼리프에 이어 이벨리아까지 이러니 펠릭스는 그나마 남아 있던 힘조차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그라도 힘을 내야 했다.

펠릭스는 눈을 지그시 감곤 다시금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러곤 사람의 모습으로 이벨리아를 마주했다.

“이젠 아는 척도 안 해 주는 건가?”

그녀의 상태를 알면서도 부러 장난치듯 능글거리며 말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펠릭스는 치미는 한숨을 꾹 참으며 이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위로의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이든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곧장 본론을 꺼내자니 그 말 역시 그녀의 귓등에도 닿지 못할 듯했다.

결국 펠릭스는 맥 빠진 듯 의자에 몸을 푹 기대어 앉았다.

“가는 데마다 다들 죽상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 원, 힘을 내려야 낼 수가 없네.”

넋두리나 다름없는 하소연을 툭 내뱉었다. 그때 이벨리아가 희미하게 몸을 움찔 떨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펠릭스는 뒤로 젖혔던 고개를 돌리곤 이벨리아를 보았다. 그제야 이벨리아와 오롯이 시선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왜 왔어요?”

이벨리아가 퍽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듣기 좋은 음색도 아니건만, 그 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퉁명스럽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감정을 드러낸다는 거였고, 적어도 칼리프보단 이벨리아가 조금이나마 무엇을 향한 것이든 의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펠릭스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상체를 당겼다. 그러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쾌한 목소리를 내었다.

“황태자궁은 암울 그 자체거든.”

이어진 말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기엔 썩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말이었다.

칼리프는 이벨리아가 이유를 묻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애가 닳은 그가 먼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유는 안 물어봐?”

“네.”

“왜?”

“……들어 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이벨리아가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로 농도 짙은 자괴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펠릭스는 이벨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짧게 침음을 흘렸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키는 전부 네가 쥐고 있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굴면 네 선택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펠릭스가 퍽 장난스러운 투로 절대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내뱉었다. 말의 의미를 알아챈 건지, 일순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어느덧 회의감에 절은 얼굴이 무심하게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 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펠릭스에게 줄게요. 그러니까 뭐든 방법이 있는 거라면 나 대신 상황 좀 해결해 줘요.”

참 무책임한 말이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아주 조금쯤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입술을 비뚜름히 휘어 올리곤 이벨리아를 향해 물었다.

“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 건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상황을 해결해 달라며. 그 말은 나를 빌려서라도 이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는 거 아니야?”

“…….”

“말해 봐.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길 바라는 건지. 혹시 알아? 네가 바라는 결과가 내 맘에도 꽤 든다면 해결해 달라는 네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너무도 선명한 비아냥거림에 이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순간 그의 말이 무척 반갑기도 했다.

이벨리아는 펠릭스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입술을 떼었다.

“황궁에서 데리고 나가 줘요.”

“황궁에서? 누굴?”

“그 사람이요.”

“설마 칼리프를 말하는 건가?”

이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될 거란 걸 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녀의 침묵을 이해한 펠릭스의 낯빛이 전에 없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없이 냉랭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납게 뇌까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한테 바라는 걸 말하라고 한 건 펠릭스예요. 근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죠?”

“네가 하는 말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 칼리프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설마 그가 갖은 위험을 무릅써 가며 왜 여기까지 온 건지, 그 이유에 대해선 듣지 못한 건가?”

빈정거리는 펠릭스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벨리아는 그런 펠릭스의 모습에 못내 짜증이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칼리프가 온갖 위험을 무릅쓴 이유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도 착각할 수 없도록 그가 적나라하게 설명해 줬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걸 잘 알기에 그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말한 거였다. 그것만이 그녀가 그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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