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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유일하게 눈부셨던 순간 (63/94)


63화. 유일하게 눈부셨던 순간
2023.08.02.


그나마 칼리프의 말소리로 온기가 채워지고 있던 응접실이 다시금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견디기 힘든 고요가 찾아왔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유일하게 단 하나, 그의 눈동자만이 처음으로 감정에 동요하며 거칠게 일렁였다. 그런데도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그저 내가 바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담백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일순 이벨리아의 숨통을 조였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입 안에 고인 숨을 거칠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바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제 걱정만 하고 있는 게 그가 바라는 일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그렇게밖엔 해석이 되지 않았다.

“당신이 바라는 일이 뭔데.”

이벨리아는 거침없이 물었다. 제발 자신이 생각한 그런 의미는 아니길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언제나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이벨리아, 그대를…….”

“…….”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지.”

그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벨리아는 차마 헛웃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그가 바라는 일이라고? 도대체 왜? 자신이 뭐라고 목숨까지 걸며 제 행복을 지켜 준다는 말인가. 그가 누구기에.

이벨리아는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그가 이렇듯 자신을 위해 희생적인 대답을 건네면 건넬수록 그녀 역시 그를 향한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머릿속은 자꾸만 복잡해져 갔다. 그는 리우리안이 아닌데. 제 남편이 아닌데. 낯선 남자일 뿐인데. 그러니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되는 거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단속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되었다. 감히 황태자의 자리를 겁도 없이 차지한 이유가 제 행복이란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군다나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놔야 했다.

그래야 그가 살 수 있었다. 그가 살아야 제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리우리안의 행방에 대하여.

“진짜 황태자 전하는 어디에 계세요?”

“…….”

“도대체 진짜 전하는 어디에 계시길래 당신이 전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이벨리아는 줄곧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비킨 채 떠오르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가 아주 기민한 편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해도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사실 리우리안의 행방을 묻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감각은 오로지 맞은편 자리의 남자에, 리우리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칼리프에 쏠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너무도 격렬하게 뛰었다. 감당이 되지 않아 얼굴이 붉게 상기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배덕감에 괴로워하면서까지 붙잡고 있을지언정 칼리프에게 들켜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고개를 팍 숙였다. 어떻게도 그가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줄곧 침묵하던 그가 별안간 말을 건네 왔다. 너무도 의미심장했다. 이벨리아는 부러 처박았던 고개를 다시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되물어보면서 생각이 그의 말에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 기껏해야 리우리안을 어딘가에 가둬 놓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칼리프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그게 아닐 것 같단 강한 확신이 밀려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감금했을 경우를 배제했을 때 리우리안의 행방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설마, 죽이기라도 한 거예요?”

이벨리아는 말을 뱉으면서도 충격적인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어야 했다. 리우리안을 죽인 이유가 자신의 행복을 지켜 주기 위함이라면 더더욱 그런 상황은 없어야만 했다.

하지만 칼리프는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침묵하는 것으로 그녀의 짐작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하.”

이벨리아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당혹스러웠다. 당혹감이 더해질 때마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혼란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쳤다.

당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한 남자를 기쁘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게 아니면 저를 핑계로 살인을 저지른 죄인으로 대해야 할까.

확실한 건 진짜 황태자인 리우리안이 죽었다는 사실이었고, 제 앞의 남자는 가짜란 걸 들키는 순간 재고의 여지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란 거였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을 뿐인데, 이벨리아는 숨도 쉴 수 없이 가슴이 아파 왔다.

도무지 그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리우리안을 죽였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는 제 남편을 죽인 살인자임이 분명한데, 그 사실이 충격이기보단 칼리프의 앞날만이 걱정이 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리우리안이 아닐 거란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어젯밤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우리안 페트로프였다. 그런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다. 그런데 그가 리우리안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도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그녀를 너무도 괴롭게 했다. 더는 그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생각해 봤어요. 칼리프 드윗이란 이름을 수도 없이 중얼거리면서 도대체 당신이 말한 그 기억이라는 게 무엇일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고요.”

“…….”

“근데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칼리프 드윗이란 이름도, 내가 뭘 기억 못 하는 건지조차,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이벨리아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듯 거칠어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동자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혼란하게 허공을 헤맸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날부터라고 한다면, 그는 한순간도 제게서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했고,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그 사실은 리우리안인 척 매몰차게 굴었던 때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그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란 거였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목숨까지 내건 그의 행동은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억 속을 아무리 훑어봐도 제 머릿속엔 칼리프 드윗이 없었다.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칼리프 드윗이란 이름도, 그의 얼굴도, 리우리안을 만나기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난 아무것도 기억하질 못하는데…… 근데 당신은 왜 그런 날 위해서 목숨까지 걸고 이러고 있는 건데.”

이벨리아는 괴로운 듯 눈살을 일그러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잇새로 기어이 울음이 토해져 나왔다.

이런 때일수록 평정을 찾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하는데, 이 남자와 관련한 일 앞에선 언제나 그게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이어진 칼리프의 말을 들은 순간, 이벨리아는 지금껏 느꼈던 절망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대가 기억하지 못해도 난 기억하니까.”

그가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순간 이벨리아는 흐느끼고 있던 것도 잊은 채 얼굴을 가린 손을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선명하게 다 기억해.”

“…….”

“처음 그대를 봤던 순간,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런 그대를 보며 내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뛰었는지. 그날 불었던 바람의 온도와 그 안에 실려 있던 꽃향기까지도…….”

“…….”

“그대가 있던 순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가 않아. 누군가 내 머릿속에 새겨 넣은 것처럼 잠깐도 흐려질 줄을 모르더군.”

“…….”

“그대와 함께한 시간은 볼품없는 내 인생에 유일하게 눈부셨던 순간이야. 그런 그대를 위한 일인데, 이까짓 목숨 따위가 별거일까.”

그의 눈동자가 아련한 빛을 한껏 머금은 채 그녀를 향했다. 마치 그가 기억한다던 처음 순간의 그녀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게 이벨리아를 너무도 미치게 만들었다. 멈춘 것 같던 눈물이 다시금 차오르고, 빠르게 볼 위를 적셨다.

이벨리아는 다시금 기억을 되짚었다. 이미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순간을 되돌린 후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그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기억하고 싶었다.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눈부셨던 순간이라던 그날들을. 그에게 그토록 소중한 시간이었다면, 제게도 소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리우리안인 줄 알았을 때도,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나서도 제 심장은 변함없이 그에게 반응하지 않던가.

그러니 최선을 다하면 분명 그와 관련한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부디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뜯으며 노력해도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 진짜…….”

이벨리아는 무능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길지 않은 한마디에 온갖 괴로움이 다 묻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로라도 하려는 건지 칼리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내민 손을 꽉 움켜쥐어야만 했다.

“이브.”

“……아무래도 더 같이 있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이벨리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그의 손이 보였다. 그래서 더욱이나 이 이상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제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마주하고 있을 자격조차 없는 건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소중한 마음을 이토록 잔인하게 짓밟은 저인데, 그런 제게 무슨 자격이 있을까.

이벨리아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다급히 말했다.

“먼저 일어날게요.”

그러곤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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