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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그녀의 부탁 (62/94)


62화. 그녀의 부탁
2023.08.01.


남자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기어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굽혀 땅에 대었다. 그러곤 피가 배어나기 시작한 그녀의 손을 잡아 행커치프로 상처 위를 감쌌다.

“아아…….”

지혈하기 위해 꽉 움켜쥔 힘이 고스란히 통증으로 이어졌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을 뿐인데, 강렬한 그의 시선이 곧장 그녀를 꿰뚫듯 응시했다.

이벨리아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하지만 미간에 들어가는 힘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녀의 귓가로 약속이나 한 듯 뜨거운 한숨이 스며들었다. 칼리프는 행커치프로 감싼 그녀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곤 고개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저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칼리프가 유스티아를 향해 단호하게 일갈했다. 어찌나 냉랭한지 유스티아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은 반드시 렐리아의 출옥을 이루어야 했다. 훗날 가넷 공작을 향한 달콤한 복수를 위해서라도.

“리우, 난 태자비에게도 이 상황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렐리아 영애의 투옥에 태자비의 의견은 조금도 더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벨리아가 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태자비는 너와 함께 장차 제국의 황후가 될 몸이야. 즉 네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태자비 역시 황후가 될 수 없는 법이지.”

“…….”

“그러니 태자비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 시종들 사이에서 네 입지가 얼마큼 흔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유스티아는 말을 뱉기 무섭게 혀를 콱 물었다. 제 입으로 아들의 입지를 운운하는 날이 오다니, 못 견디게 속이 쓰렸지만 버텨 내야 할 시련이었다.

이런 식으로나마 태자비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제 아들은 절대로 렐리아의 출옥을 명하지 않을 테니.

“렐리아의 투옥은 불손했던 영애의 태도에 대한 합당한 처사였습니다. 그걸 두고 시종들이 그렇게 떠든다니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하여 흔들릴 입지라면 애당초 제게 황태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부터 따져 봐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헛소리는 이쯤에서 집어치우라고. 칼리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흔들림 없는 제 생각을 씹듯이 뱉었다.

늘 이런 식으로 이벨리아를 이용하려고 들다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차 이야기해 왔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

“저는, 렐리아의 투옥에 대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괜한 수고로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칼리프는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유스티아를 빈틈없이 바라보았다. 그에 유스티아의 기가 조금씩 꺾이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예기 띤 눈동자가 이벨리아를 향했다.

“태자비도 리우와 같은 생각인가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마주친 황후의 눈길이 무척이나 고압적이었다.

숨이 탁 막혔다. 마치 모든 상황이 제 결정 한 번에 극과 극으로 치달을 것 같았다. 그게 견디기 힘든 부담감으로 와닿았다.

그때 칼리프에게 잡힌 손가락으로 무언의 힘이 느껴졌다. 저절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안 돼. 황후의 뜻대로 해 줘선 절대로 안 돼.’

오롯이 마주한 적안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벨리아는 입 안에 쌓인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렐리아를 투옥시키고 황후를 비롯한 가넷 공작과 정면으로 부딪치려고 하는 걸까.

이벨리아는 칼리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선 황후의 뜻대로 해 줘선 안 된다는 내용 말곤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잇새로 묵직한 숨이 새어 나왔다. 황후가 제게 질문을 건넸으니, 무슨 대답이든 해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가 곧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

“저는, 전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행커치프에 감싸인 손가락에 재차 힘이 실렸다.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뜻을 바꾸지 않은 채 칼리프를 오롯하게 마주 보았다.

“전하, 영애의 투옥이 그날 제게 보였던 무례함 때문이라면, 부디 바라건대 명을 거둬 주셨으면 좋겠어요.”

“…….”

“영애가 제게 무례를 범하고 상처를 낸 것이 맞긴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멈추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입술을 움직였다.

“저를 위해서라도 제발, 명을 거둬 주세요.”

태자비로서 그에게 처음으로 올린 간절한 청이었다.

***

“하아…….”

유리온실을 빠져나온 이벨리아가 참았던 숨을 거칠게 터트렸다. 내도록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은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안정은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등 뒤에 박힌 남자의 시선 때문이었다.

“…….”

“…….”

이벨리아는 제게 박힌 시선을 느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모르는 척 걸음을 떼었다.

그녀를 따라 페일린을 비롯한 몇몇 시녀들이 함께 움직였다. 제법 많은 발소리가 뒤섞여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이벨리아는 오직 하나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저벅저벅, 그를 닮은 우직한 발소리가 그녀의 귓전에서 메아리쳤다. 그럴수록 이벨리아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아닌데, 낯선 남자일 뿐인데…… 그런데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그에게 반응했다.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를 처음 본 그 달밤부터 그랬다. 어쩌면 전장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리우리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그 사실이 자꾸만 그녀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제 남편이라고 믿었던 남자가 다른 사람이란 사실도 혼란스러웠지만, 그보다 더한 건 낯선 남자에게 자꾸만 사랑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일 줄 알고. 아는 거라곤 그의 이름뿐이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 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매몰차게 몰아붙여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발소리에 온몸의 감각이 쏠렸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지 않길 바랐다. 이런 식으로나마 함께 길을 거니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하…….”

본능처럼 새어 나온 한숨에 어느 때보다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벨리아는 고집스레 앞을 보며 나아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저도 모르게 발을 맞췄다. 그녀의 속을 다 아는 것처럼 그는 태자비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녀의 뒤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막 그녀가 궁 안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더없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

이벨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황후를 대하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음색이었다. 그게 또 속절없이 이벨리아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시간 좀 내줬으면 좋겠군.”

너무도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그에 페일린은 물론 시녀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마침 이벨리아에겐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줄 만한 일이었다.

“……페일린.”

“네, 전하.”

“응접실에 차 좀 준비해 줘.”

“차, 말씀이세요?”

페일린이 앞뒤에 서 있는 황태자 부부를 살피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이벨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처음으로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응접실로, 가시지요.”

***

이벨리아는 앞에 놓인 찻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와 응접실에 자리한 후 페일린이 차까지 준비해 줬지만, 잠깐이면 된다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탓에 적막으로 가득한 분위기가 그녀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

머리는 아직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치는데, 정작 마음은 불편한 분위기조차도 감수할 만큼 그와 함께할 수 있어 기쁜 것만 같았다.

정말 엉망이었다.

“렐리아가 출옥되면 분명 그대를 전보다 더 괴롭히려고 할 거야.”

불현듯 적막을 가르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벨리아는 긴장한 어깨를 움찔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지 모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안면 가득 근심이 가득했다. 황후의 앞에서 마지못해 렐리아의 출옥을 허하던 모습과 똑같았다.

“제법 오래 투옥되어 있긴 했지만, 그 안에 머물러 있기만 했던 것뿐이니 아마 반성은커녕 그대를 향한 분노만 곱씹었을 거야.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게 그대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는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렐리아의 출옥을 부탁한 건 자신인데, 그에 따른 책임은 전부 그가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벨리아의 마음을 더욱이 무겁게 했다.

지금 그가 걱정해야 할 건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건 기껏해야 렐리아뿐이었다. 하지만 진짜 리우리안이 아닌 그가 리우리안인 척 렐리아를 상대하다 정체라도 들키는 날엔 그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대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 보겠지만,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치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지금.”

이벨리아는 그의 말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러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 냈다.

“아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란 건,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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