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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강제로 취하여 생긴 아이 (59/94)


  • 59화. 강제로 취하여 생긴 아이
    2023.07.29.


    드웨인은 맞은편의 유스티아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알현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유스티아는 인이 박인 시선에도 본능처럼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시간을 더 드려야겠습니까.”

    “……고, 곧 해결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두려움에 취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고작 유스티아의 애처로움이 드웨인 공작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드웨인 공작이 미간을 무자비하게 구긴 채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넷트 후작이 어젯밤 나를 찾아와 사흘 안에 렐리아를 출옥시켜 주지 않으면 본인도 대책을 강구하겠다 협박을 하더군.”

    “…….”

    “네까짓 계집이 기어이 내 체면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말았지. 감히 제국의 제일가는 공작가의 가주인 이 드웨인 가넷의 체면을 말이다!!”

    드웨인은 분을 이기지 못한 채 꽉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끔찍할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다. 유스티아는 속절없이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스티아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따뜻한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고, 무엇을 하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녀가 아기티를 벗은 이후부턴 체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의 체벌이었다.

    끔찍한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유스티아는 드웨인을 아버지가 아닌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황후로 만들어 놨더니 감히 날 우습게 만들어?”

    “아, 아버님, 그런…….”

    “이따위로 무능하게 구는 주제에 감히 날 보고 아비란 말이 뻔뻔하게도 나오는구나.”

    드웨인이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빈정거렸다. 유스티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붉어졌다.

    “그새 네 주제를 잊기라도 한 모양이지?”

    “…….”

    “네게 분명 이야기했었다. 내게 딸로 인정받고 싶다면 똑똑하게 굴어야 할 거라고 말이야.”

    “…….”

    “황후가 되겠다기에 약은 구석은 있는가 보다 했는데, 하는 짓거리마다 덜떨어진 머저리가 따로 없어.”

    드웨인은 험한 폭언 끝에 혀를 쯧쯧,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그 소리가 유스티아의 귓전에서 뎅뎅 울렸다. 그게 안 그래도 수치심에 몸을 떨던 그녀를 한계로 몰아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드웨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천한 가랑이 사이에서 난 티를 어떻게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했건만, 역시나 천한 네 어미의 피는 속일 수 없는 게지.”

    드웨인이 혼잣말인 양 내뱉은 말이 유스티아의 마음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힘껏 짓씹은 그녀의 입술이 모욕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진동했다.

    드웨인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그녀를 깎아내리는 거로 모자라 그녀의 친모까지 모독했다. 그 저급한 행동은 친모가 명을 달리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유스티아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외치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말하는 그 여인이 한때는 당신이 마음에 품었던 여인이자 갖지 못해 안달을 냈던 사람이라고.

    드웨인은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스티아는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스티아가 열 살이 되던 무렵 몹쓸 병에 걸린 그녀의 친모가 공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유스티아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또렷했다. 공작은 그녀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더러운 오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훑어 내렸다.

    [공작님. 제발, 제발 우리 유스티아를 거둬 주세요.]

    [허, 이제 와서 네 딸년을 나한테 거둬 달라? 낯짝이 두꺼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제발 부탁드려요. 저마저 떠나고 나면 저 어린 것 혼자 남을 텐데,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어린 여자아이 혼자 이겨 내라고 이리 모질게 구신단 말입니까.]

    [네게 정부가 되어달라 청했을 때, 그 청을 받아들였다면 이제 와 내게 이렇듯 부탁해야 할 일도 없었겠지. 네 딸은 당연히 나의 딸로서 자랐을 테고. 결국 이 상황을 자초한 건 너야.]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한낱 비천하기만 한 모녀에게 더는 베풀 아량 따위 남아 있지 않다고.

    공작은 굳이 덧붙이지 않은 그 말을 표정으로써 완벽하게 전달했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거로 할 테니 두 번 다시 날 찾아오지 말아야 할 게다.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와 곤란하게 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명줄마저 앞당기게 될 게야.]

    [……지금껏 공작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입 꾹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녕 공작님의 핏줄을 이리 외면하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이어진 친모의 말이 퍽 의미심장했다. 어린 유스티아는 둘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네가 감히 지금 나를 협박이라도 하려는 게냐.]

    [제발 유스티아만 거둬 주세요. 그럼 지금까지 그랬듯 죽는 그날까지 공작님의 부정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의 실랑이는 조금 더 이어졌다. 하지만 유스티아는 더 이상 문 앞을 서성이지 않았다. 흉포하게 언성을 높이는 공작의 목소리가 꼭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몰래 엿듣고 있었단 사실을 들키면 경이라도 칠 것 같았다. 도망치듯 침대 위로 올라간 그녀는 한참이나 이불 속에서 벌벌 떨다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유스티아는 가넷 공작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녀의 친모 역시 함께였다. 비록 마구간이나 다름없는 작은 처소였지만, 이전처럼 추위에 떨거나 배를 곯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마주치는 공작부인의 살기 어린 시선만큼은 꿋꿋하게 견뎌야 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친모가 유명을 달리하고 나서야 그날 공작과 친모의 대화에 담긴 진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스티아는 드웨인 공작이 신분은 천하지만 몹시도 아름다웠던 여인을 강제로 취하여 생긴 아이였다.

    제 아이를 품은 여인이라니. 드웨인은 그 후 아리따운 여인을 향한 마음을 더욱 애틋하게 키워 갔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딸이란 걸 안 순간 가차 없이 여인을 버렸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유스티아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숨을 죽이고 공작저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버텼다.

    마구간이나 다름없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고 배를 곯지 않을 수 있는 곳은 그녀에게 가넷 공작저가 유일했다.

    그곳에서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버틴 지 6년쯤 지났을 무렵, 유스티아는 처음으로 가넷 공작에게 알현을 청했고 그 자리에서 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과감히 꺼내었다.

    [황후로 만들어 주세요. 그럼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입 다물게요.]

    [허, 이젠 별 같잖은 애송이에게까지 협박을 당하는군.]

    [혹 저를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시라면 그 생각도 접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정도 준비도 없이 공작님을 찾아뵌 게 아니니까요.]

    공작을 마주하기 전 유스티아가 마련한 대비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작의 앞에서 잠깐이나마 주눅 들지 않을 배짱만 준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작은 순순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어렵지 않게 그녀를 황후로 만들어 주었다.

    유스티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제국 최고의 여인이 된 거로 모자라 공작저에서 지내던 처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궁이 제 보금자리로 하사되었다.

    하루하루가 달콤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황후로 즉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부터 공작은 온갖 문제로 그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강도가 어찌나 지독한지, 어느 순간부터는 타인과 대화하는 공작의 목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만큼 신경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야 유스티아는 절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이 길이 공작이 쳐 놓은 끈끈한 거미줄로 내달리는 길이었단 사실을.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훗날을 기약하며 이를 가는 것뿐이었다.

    그 끝이 이제야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기서 지쳐선 안 되었다. 자신을 가축 새끼 취급이나 하던 드웨인에게 사실은 호랑이 새끼였음을 보란 듯이 보여 줘야 평생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스티아는 테이블 아래 숨긴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드웨인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일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흘이다. 사흘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황제를 알현하여 어떻게든 내 선에서 마무리 지을 테니, 내게 그나마 사람 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그 안에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게다.”

    드웨인은 더 이상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예우도 갖추지 않은 채 뒤로 돌았다.

    유스티아는 드웨인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먼저 일어나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드웨인은 마지막까지 그 괄괄한 성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가 끔찍이 여기는 네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 이상 날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게야.”

    그 말까지 내뱉고 나서야 드웨인은 미련 없이 알현실을 떠났다.

    유스티아는 드웨인이 나간 알현실 문을 매섭게 노려보며 새빨간 입술을 질끈 물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번 문제는 리우리안이 하명한 일인 만큼 해결 또한 그가 해야 맞았다. 자신이나 황제가 나선다면 황태자로서의 체면이 깎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황제가 되어야 할 아들이 인정을 받긴커녕 그런 식으로 우스워지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하, 그런데 계속 고집만 부리고 있으니…….”

    유스티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침음을 흘렸다. 도대체 뭐에 그리 심기가 틀어진 건지 리우리안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태자비에게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설마 진짜 그런 거라면……?”

    불현듯 유스티아의 입매를 타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지 못한 방법이 번뜩 떠오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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