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58/94)


  • 58화.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2023.07.28.


    이른 아침, 날씨가 유난히 청명했다. 일찌감치 침소를 빠져나온 페일린이 다른 날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이벨리아에게 향했다.

    최근 제 주인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그럴 만도 했다. 궁 안에 그녀를 둘러싼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이토록 파다한데, 그 마음이 어떻게 편할 수 있을까.

    더욱이 흉흉한 소문은 이벨리아뿐 아니라 그녀의 하나뿐인 남편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게 이벨리아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제국의 태자비가 된 이후 언제나 마음고생만 하던 이벨리아였기에 최근 밝아진 모습을 보며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는데, 고생한 시간에 비해 너무 빠르게 찾아온 비극이었다. 그 사실이 페일린의 마음까지 덩달아 무겁게 만들었다.

    페일린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새파란 하늘이 잠깐이지만 답답하던 마음을 뻥 뚫어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했다.

    “속도 모르고 너무 맑네.”

    페일린은 야속한 눈으로 애꿎은 하늘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 핑곗거리는 될 것 같았다.

    줄곧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제 주인을 정원으로 발걸음 하게 하기 좋은, 그런 핑계.

    ***

    페일린은 익숙하게 태자비 침실로 들었다. 원래였다면 불면증이 심한 제 주인의 상태부터 살폈을 텐데, 얼마 전부턴 곧장 창문을 여는 것이 그녀의 첫 번째 일이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창가 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런데 막 침대 옆을 지나치려던 찰나, 닫혀 있는 캐노피 사이로 낯선 실루엣이 비쳤다.

    순간 놀란 페일린이 창가로 향하던 것도 멈추곤 급히 침대로 향했다. 캐노피를 조심스레 걷자 낯선 실루엣의 정체가 곧장 드러났다.

    “저, 전하!”

    페일린은 놀란 눈으로 침대 한가운데를 보며 입을 가렸다. 잠들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이벨리아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부름을 듣고서야 무릎 사이에서 빠져나온 얼굴은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난밤 보았던 얼굴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밤새 한잠도 자지 않고 울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전하, 어, 얼굴이 왜 이러세요.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페일린은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이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기 무섭게 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피부에 닿는 이벨리아의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온기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 감기라도 걸린 건가 싶어 서둘러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 페일린에겐 그 정도 여유를 갖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감기라면 큰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이벨리아는 요양을 다녀온 후부터 제법 건강해져 잔병치레는 하지 않았지만, 이따금 한 번씩 크게 앓곤 했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곳 없으세요? 몸이 무겁다거나, 미열이 나는 것 같다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데가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페일린은 걱정이 만연한 얼굴로 이벨리아와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말만 한다면 당장 황궁의에게 달려갈 기세였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은 채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그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페일린은 제 주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페일린은 이벨리아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마에선 느껴지지 않는 열감이 혹 목덜미에선 느껴질까 조심스레 손을 대 보기도 하고 어딜 다친 건 아닐까 잠옷 아래 숨겨진 피부도 훑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줄곧 한숨만 내쉬던 이벨리아가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페일린.”

    “네, 전하!”

    페일린은 곧장 대답했다. 반사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나 혼자 있고 싶어.”

    겨우 새어 나온 목소리는 생기가 없음은 물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제야 페일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주인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임을.

    “전하, 무슨 일이세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네?”

    페일린은 이벨리아의 손을 부여잡고 다른 의미의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 말라 가던 그녀인데, 하룻밤 사이에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페일린은 어서 말해 보라 눈빛을 보냈지만, 이벨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설명할게, 페일린. 그러니까 우선은…… 나 좀 혼자 내버려 둬.”

    그녀는 길지 않은 말을 뱉는 것조차 힘겨운 듯 두 번이나 호흡을 골랐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그녀를 혼자 둘 수가 있을까.

    페일린은 이벨리아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없이 그녀의 손만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곁에만 있게 해 달란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것조차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제발, 페일린…….”

    “…….”

    “……부탁이야.”

    다시금 힘겹게 말을 전한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정말이지 완강한 거절이었다.

    페일린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제가 옆에 있는 게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인 것 같았다.

    자신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라고, 습관처럼 그 말을 뱉기 위해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이벨리아에겐 그 형식적인 말조차 큰 부담이 될 것 같았다. 결국 페일린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침실을 빠져나갔다.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해 줬을 뿐인데, 숨 막히는 정적은 금세 침실 가득 내려앉았다. 고압적이기까지 한 공기 속에서 이벨리아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그저 숨만 내쉬었을 뿐인데, 어느덧 느리게 끔벅이는 그녀의 눈꺼풀 사이사이로 물기가 가득 배어나기 시작했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의 이름이 왜, 왜…….]

    [나는, 그대가 아는 황태자가 아니니까.]

    [저, 전하께서 황태자가 아니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통 이해가 안 가요. 혹시라도 농이시라면 이제 그만하세요. 이런 거, 이런 거 싫어요.]

    횡설수설하면서도 그에게 애걸하며 매달렸다. 그가 하는 말을 통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런 와중에도 불길한 예감은 선명하게 밀려왔다.

    황태자의 얼굴을 하고도 황태자가 아니라는 말만이 계속해서 귓전을 맴돌았다.

    기껏해야 전장 속을 누비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그리워졌더라는 사연을 예상했는데, 이건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그가, 그녀가 알고 지내 온 리우리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니.

    그 생각이 머릿속을 그득 채우고 나서야 이벨리아는 줄곧 뒤얽고 있던 손이 낯설어졌다.

    그의 손을 놓은 채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최소한 장난은 아니란 의미였다.

    그럼, 도대체…….

    [언제, 부터였어요?]

    […….]

    [언제부터 황태자 전하 행세를 한 거예요? 하, 전하가 정말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면, 어, 얼굴은 왜 이렇게 똑같은 거고, 그럼 진짜 황태자 전하는요. 진짜 전하는 어디 계신 건데요?]

    혼란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그러니 무슨 말이든 어서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제발, 무슨 말이든 좀 해 보세요……!]

    이벨리아는 무섭게 밀려오는 두려움에 내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자석에 이끌리듯 그와 순식간에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아는 그의 얼굴이 맞았다. 어느 한구석 틀린 곳이 없는데, 왜 아니라는 거야. 어떻게 아닐 수가 있다는 건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그녀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모습을 오롯하게 마주하던 그가 일순 무거운 한숨을 내뱉더니 고통스럽게 미간을 구기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

    [내 얼굴도, 내 이름도……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

    [정말 나는 아주 짧은 순간으로도, 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건가?]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애달프게 물어 왔다. 그럴수록 그녀의 혼란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는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눈동자 깊숙이 담을 때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뿐 아니었다. 심한 어지럼증이 몰아닥친 것처럼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대로 침실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침대 위로 올라왔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실컷 울고 나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했고, 무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답답했다. 동시에 그에게 들었던 이름이 머릿속에 각인된 듯 떠올랐다.

    “칼리프, 드윗…….”

    이벨리아는 그 이름을 나직이 속삭여 보았다.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낯설어서 그런 것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렇게 저릿한 것일까.

    낯선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 왔다.

    “하.”

    묵직한 한숨이 본능처럼 새어 나왔다. 너무 답답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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