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고백
(57/94)
57화. 고백
(57/94)
57화. 고백
2023.07.27.
이벨리아는 맞닿은 입술 사이에 힘을 주었다. 겨우 잦아든 눈물이 차오르고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순간이 오늘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며칠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 그와 지금처럼 행복하고 싶은데.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게 지극히 그녀를 위한 욕심뿐이란 걸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불안하게 심장이 뛰는 건 물론 전신에 잔떨림이 이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무거운 적막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이벨리아는 목구멍에서 힘을 풀지 못한 채 겨우 숨을 내쉬었다.
너무 힘들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견디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배어들기 시작했다.
“…….”
“…….”
이벨리아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시야에 마주 잡고 있는 남녀의 손이 가득 들어왔다.
힘없이 늘어진 가녀린 손가락을 뼈마디 굵은 남자의 손이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언뜻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손을 보고 나자 이벨리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위태로이 매달려 있던 눈물이 그녀의 눈매를 따라 후드득 떨어졌다. 진작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던 마음의 둑은 작게 난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간의 감정을 와르르 쏟아 내었다. 뒤늦게 마음을 추슬러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지만,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며 흐느낌만큼은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새붉은 입술 위로 잇자국이 깊게 팼다. 한계의 한계까지 짓눌린 입술은 더 이상의 압력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고통을 호소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입술이 터지고 피가 배어날 것 같았다. 그 찰나, 나란히 걸음을 떼던 그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자리에 멈춘 이벨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 버렸다.
길지 않은 그 짧은 숨조차 고통에 젖어 있었다. 그게 그에게 어떤 신호가 되어 주기라도 한 건지, 맞잡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벨리아는 경기를 일으키듯 어깨를 떨며 멀어지기 시작한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반대편 손까지 가져와 그의 손목을 힘껏 붙들었다.
이대로 그를 놓치고 나면 죽도록 마주하기 싫은 그 마지막 순간을 직면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잠깐이어도 좋으니, 그게 고작 한 시간이라고 해도 좋으니, 아니 10분. 그것도 안 되면 단 1분이어도 좋으니 조금만 더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 순간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음색이 그녀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브.”
그가 그녀를 불렀다. 그에게선 처음 들어 보는 애칭이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가 잔인할 정도로 귓속을 헤집고 심장을 파고들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울음이 차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흐느낌이 새지 않도록 더욱 애써야 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손길 앞에선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얼굴이 엉망이 됐군. 이렇게 울리고 싶지 않아서 그간 그렇게까지 노력했던 건데.”
“하…….”
그녀의 잇새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에 뿌예진 시야와 함께 자꾸만 그의 얼굴까지 흐릿해졌다. 1분 1초 소중한 시간인데, 이런 식으로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지만, 이벨리아는 눈에 힘을 주곤 빠르게 깜박였다.
그녀의 노력에 한결 선명해진 시야로 그의 얼굴이 다시 비쳤다. 시야가 흐려진 건 잠깐이었을 뿐인데, 그사이 그는 한결 초연해져 있었다. 강렬한 적색을 뿜고 있는 그의 눈동자만큼은 애달픈 감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게 꼭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는 듯이 보여서 이벨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바랐지만, 역시나 오늘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마지막 순간이 오려나 보다.
그렇다면 이젠 그녀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가 이 이상 더 곤란해지지 않도록.
이벨리아는 목 끝에 고여 있던 숨을 탁 내뱉었다. 그러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태자비궁은 산책하기엔 정원이 너무 작은 것 같아요. 이대로 산책을 마무리하기엔 너무 아쉬운데.”
“…….”
“전하의 궁 뒤뜰로 가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중앙 분수가 있는 미로 정원도 좋고, 그것도 아니면…….”
어딘지 차분한 듯하면서도 횡설수설한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그 말을 하며 정처 없이 헤매는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칼리프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의 뺨 위에 올린 엄지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였다. 보드라운 살결을 조심스레 쓸어내며 그녀의 시선이 다시 제게 닿길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바라던 대로 놀란 듯 커진 녹안이 그를 빼곡하게 담았다. 여전히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한 눈동자가 그를 향해 말했다.
‘우리,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요?’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동자가 더없이 간절하게 진심을 실어 보냈다. 그게 칼리프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왜 안 되겠어. 그대가 바라는 일인데.’
그는 애끓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곤 말없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어디든 좋아.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가자.”
***
“디아나는 고고학에 무척 관심이 많은 영애예요. 지난번엔 함께 황궁 도서관에 가서 고대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너무 재밌었어요.”
“그러다 곧 고고학자가 되겠다고 나설 기세군. 어지간히 재밌었나 봐. 표정이 딱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를 닮았어.”
그가 퍽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딘지 그녀를 짓궂게 놀리는 어조였다.
이벨리아는 입술을 한번 삐쭉거리고 말았다. 놀리는 게 분명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의 눈빛만큼은 시종일관 다정했으니까.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디아나와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눴다. 영양가라곤 없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표정만큼은 전에 없이 환하게 빛이 났다. 어떤 걱정도 없이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연인의 모습 같았다.
그토록 바랐던 행복을 마음에 가득 품은 채 이벨리아는 새벽이 깊도록 황태자궁의 정원 뒤뜰과 중앙 분수가 있는 미로 정원 그리고 황궁 이곳저곳을 그와 함께 거닐었다. 그러고 나서야 둘의 걸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줄곧 종알종알 이야기를 쉬지 않던 이벨리아가 불현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멀리서 태자비궁이 보였다. 이제 더는 뒤로 미룰 수도, 피할 수 없는 그 마지막 순간이 목전이란 걸 직감했다.
다시금 마음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씩씩한 척 미소를 휘어 올렸다.
마지막 모습은 환하게 웃는 얼굴이고 싶었다. 여기까지 자신을 배려해 준 그를 위해서라도 웃으며 인사하고 싶었다.
“전하.”
이벨리아는 씩씩한 척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꽂혔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하게 울렸다. 하지만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거로 애써 위안 삼아 보았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저 때문에 오래 걸으셨잖아요.”
“그대는 오래 걸어서 피곤한가?”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너무 좋았어요. 전하랑 나란히 걸을 수 있어서.
그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순간 목구멍이 틀어막힌 느낌에 온전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렸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눈가가 홧홧해졌다.
이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그게 왜 이리도 어렵기만 한 건지.
이벨리아는 부득불 마음을 다잡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곤 내쉬는 숨에 그를 올려다보곤 환하게 웃었다.
“정말 좋았어요. 그냥 전하와 같이 산책한 것뿐인데도 이렇게 좋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전하께 같이 산책해 달라 졸라 볼 걸 그랬나 봐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바보처럼 지금껏 그러지 못했을까요.”
가볍게 후회하는 척 말했지만, 진하게 남는 아쉬움이 가슴에 사무쳤다. 정말 왜 못 했을까.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어 버린 일이란 걸 알았다. 이럴수록 마음만 더 힘들어질 뿐이란 것 역시 잘 알았다.
이벨리아는 다시금 차분하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곤 조금은 성급하게 입술을 떼었다.
이젠 인사를 고해야 할 것 같았다. 끝내 억누르지 못한 구질구질한 미련이 애써 용기 낸 마음을 붙잡기 전에.
“그래도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오늘의 기억을 아주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다시 전하와…… 이전처럼 돌아간다고 해도요.”
“…….”
“그러니까 이젠 얘기해 주세요. 왜 갑자기 제게 다정해지신 건지. 오늘이 전하의 이야기가 간절히 듣고 싶은, 바로 그날인 것 같아요.”
이벨리아는 그를 향해 힘껏 웃어 보였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그를 다시금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한결 마음이 편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그를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 곧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거침없이 뒤흔들었다.
“글쎄, 다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
“줄곧 그대를 그리워했고, 또 줄곧…… 그대를 사랑해 왔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 음색에 마음이 아프기보단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줄곧, 사랑해 왔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리우리안 페트로프는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은 마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듯 들렸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잠깐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이어진 말이 그녀의 생각을 완벽히 대변했다. 이벨리아는 불현듯 덮쳐 온 혼란에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머릿속에 수천 개의 구슬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난,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아니라…….”
“…….”
“……칼리프 드윗이니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의 말에 굵게 고인 눈물이 그녀의 볼 위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