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애달픈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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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애달픈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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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애달픈 미소
2023.07.26.
이벨리아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시선이 멈춘 자리에 그가 있었다. 태자비궁 바로 앞, 새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 사이였다.
“전하…….”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 안 가득 차오른 그 말을 입술 새로 내뱉었다. 그러곤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가 이 늦은 시각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몇 번을 감았다 떠도 그는 여전히 새빨간 장미 정원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아.”
줄곧 억눌렀던 감정들이 단박에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제야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이벨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정신없이 침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이어진 계단 앞에 섰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어서 그를 가까이에서 봐야겠단 생각뿐이었다.
망설임 없이 계단 아래로 다리를 뻗었다. 그러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었다. 그렇게 반 층을 내려오고 나서야 궁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리우리안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음은 더욱더 조급함에 들끓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달려가면 그에게 닿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걸음보단 달음박질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조심성 없이 뛰는 행동이 태자비의 품위를 훼손하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하!”
어느덧 계단을 다 내려온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리우리안을 힘껏 불렀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원래도 바닥났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이벨리아는 미련 없이 뛰어들었다. 저를 향해 활짝 열린 너른 품 안으로.
“전하, 하아.”
참았던 숨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미치게 그리워했던 그의 체취가 콧속을 빈틈없이 메웠다. 정말 그였다. 허상이면 어쩌나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그였다.
“내가 태자비궁에 올 때마다 위험하게도 뛰어나오는군.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타박하는 말소리에 언뜻 어울리지 않는 웃음기가 배 있었다. 고작 그뿐인데,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래도 결국 안전하게 전하 품에 안겨 있는 걸요.”
이벨리아는 간신히 대답하며 그의 목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형언할 수 없이 먹먹해진 속마음을 간신히 감추고 있었지만, 손끝의 떨림까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친 기색이 이토록 만연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돌덩이가 되어 마음속에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괜찮으세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을 힘껏 억누르며 걱정되는 마음을 성마르게 토해 냈다. 그러면서도 그와 오롯이 마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괜찮은 척 웃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면 그땐 겨우 참고 있는 눈물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숨넘어가겠군. 천천히 물어도 돼.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
그는 여전히 웃음기 밴 목소리로 장난치듯 말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장난은 울음을 삼키기 위해 숨까지 참고 있는 자신을 향한 배려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이토록 다정할 순 없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이벨리아는 힘껏 노력해 보기로 다짐했다. 산지옥이나 다름없었던 지난 며칠간의 시간을 그에게 절대 티 내지 않겠노라고.
“많이 바쁘셨어요?”
“그랬다고 대답하면 당장에 삐질 것 같은 목소리군.”
“조금 서운하긴 했어요. 저 대신 페일린이 몇 번이나 황태자궁에 다녀온 줄 아세요?”
이벨리아는 괜히 투정 부리듯 그에게 말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마음은 까맣게 지워지고 없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았다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투정 부리는 것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길일 것 같았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귓가로 번지는 더운 숨결에서 잔잔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것만큼은 괜찮은 척하기 위해 뱉은 웃음 같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 역시 그를 따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한참을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빈틈없이 껴안고 있었다. 그 끝에 그가 이벨리아의 팔을 붙잡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대가 나를 무척 그리워했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 이만 나 좀 놔주는 게 어때?”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이벨리아는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요.”
“잠깐도 나랑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군. 그대가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인 줄 몰랐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놔드릴 거예요.”
못내 밀려오는 부끄러운 감정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를 안은 팔에선 힘을 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이기지 못할 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그녀를 떼어 내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밀어를 속삭일 것처럼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 내내 잔잔하게 바람이 불더군. 그대가 좋아할 만한 바람이었어. 천천히 걸으면서 바람을 맞다 보면 분명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야.”
그러니 이만 안고 있는 팔은 풀고 함께 정원으로 나가 보자고.
자극적인 표현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니 이벨리아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절대 풀지 않을 것 같던 팔에서 사르르 힘을 빼곤 그를 마주 보았다.
“놔드리는 대신에 손잡아 주세요. 그러고 싶어요.”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 먼저 꺼내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녀 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용기가 마구마구 피어올랐다.
오늘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껴선 안 될 것 같았다.
때마침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피식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이벨리아는 애달프게 뛰는 심장 소리는 뒤로한 채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를 닮은 포근한 바람이었다.
칼리프는 이벨리아의 손을 고쳐 잡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바람에 섞인 그녀의 체취가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울렁거리듯 뛰어 뒷덜미가 당길 지경이었다.
“전하 말씀처럼 정말 바람이 좋네요.”
웃음기가 묻어난 보드라운 음성이 바짝 경직된 목덜미 근처를 간지럽히듯 배회했다. 그래서였을까. 칼리프는 괜스레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대가 좋아할 것 같더군.”
“이번에도 이유는 그냥인가요? 그냥 그럴 것 같단 느낌이 드신 거예요?”
이벨리아가 장난스레 물어 왔다. 칼리프는 슬쩍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말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벚꽃 가지를 주시면서는 그러셨잖아요. 왠지 제가 좋아할 것 같단 느낌이 드셨다고요.”
무슨 뜻이냐 되물은 것도 아닌데 이벨리아가 선뜻 말을 덧붙여 왔다. 그의 생각을 읽어 내는 것쯤이야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이.
칼리프는 눈치 빠른 그녀의 행동이 싫지 않아 나직이 피식거렸다. 그러곤 적당히 떠오른 말을 입 안에 담았다.
“이런 날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가만히 맞고 있다 보면 기분까지 절로 좋아지는데, 안 좋아하기 쉽지 않지.”
기대감에 젖은 눈을 보면서 말하기엔 퍽 싱거운 대답이었다. 역시나 그랬는지 그녀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차라리 그냥이란 대답이 듣기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저런, 내가 눈치가 없었군.”
유감이라는 듯 말했지만, 그에게선 실수했단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 이벨리아가 입술을 심술궂게 삐쭉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잔잔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날 다친 데는, 괜찮은 건가?”
문득 그가 붕대 감긴 이벨리아의 손목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지나간 건 손목인데, 그녀는 심장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괜찮아요. 그냥 조금 스친 정도예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요.”
이벨리아는 괜스레 팔을 뒤쪽으로 돌리며 손목을 감췄다. 상처가 나긴 했지만 많이 아프진 않았다. 그런 것치고 손목에 감긴 붕대는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거창하기만 했지만.
괜찮다는 말로 몇 번이나 만류했는데도 그때마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구는 페일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궁의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둬야 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이런 상처까지 입게 해서.”
별안간 예상치 못한 사과가 이어졌다. 둥그렇게 뜨인 눈이 그를 향했다.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위로 미안한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게 뭐라고 이벨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만 했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었다. 둥둥 울리는 고동 소리에 온몸이 울리다 못해 귀가 멀 것 같았다.
숨을 몇 차례나 크게 마시고 나서야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거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정말 많이 아프지 않아요.”
대답하는 그녀의 입가로 언뜻 애달픈 미소가 매달렸다. 그가 이토록 다정하게 자신을 걱정해 주다니,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가슴이 터질 듯 행복하기만 해야 맞는 것인데…… 그런데 이벨리아는 마냥 행복할 수가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서서 포근한 바람을 맞고 있고,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도 왠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행히도 이벨리아는 너무 잘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