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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가장 잔인한 벌 (52/94)


  • 52화. 가장 잔인한 벌
    2023.07.22.


    빛 한 점 들지 않는 음습한 감옥 안, 렐리아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흐느끼는 모습은 가련하기까지 했다.

    감옥에 들어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그녀는 두려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내게…….”

    넋두리하듯 늘어놓는 말소리가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렐리아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우리안의 명령으로 이곳에 갇혔다는 사실이.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를 물려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그 과정에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전부 전하께 안겨 드릴 거예요.]

    [영애의 눈엔 내가 그저 그런 얼간이로밖에 비치지 않는 모양이군. 일개 후작 영애의 도움이 없이는 황위도 계승 받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의 황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그간 수도 없이 해 온 말이었다. 그때마다 리우리안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더없이 따뜻한 손길로 자신을 품어 주었다.

    그 말을 꺼낸 건 그래서였다. 그가 어서 제게 달려와 이전처럼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길 바랐다. 자신이 바란 건 단언컨대 그것뿐이었다.

    “하, 얼간이로밖에 비치지 않는 모양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렐리아는 새삼 또 한 번 밀려드는 서러움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리우리안의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지게 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잠깐이라도 그 얼굴을 지우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그 후에 이어진 리우리안의 행동은 태자비를 감싸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아, 그럼 태자비를 그리 하찮게 대한 이유도 결국 그래서였나?]

    [그렇지 않아도 줄곧 궁금하던 차였거든. 고작 후작 영애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번번이 제국의 태자비를 무시하는 건지 말이야.]

    [나도 우습게 보는 영애인데, 그런 영애의 눈에 나의 비는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어. 안 그런가?]

    [영애가 나는 물론 나의 비까지 그토록 우습게 봤다니, 무척 유감이야.]

    내뱉는 말마다 언급되던 이벨리아를 향한 호칭에 렐리아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마음이 태자비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게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어느덧 독이 바짝 오른 렐리아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렐리아는 이벨리아가 정말 싫었다. 한 번도 그녀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언제나 그녀를 향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가 싫었다. 그런데 이젠 그녀가 숨 쉬는 것조차도 소름 끼칠 만큼 증오스러웠다. 그녀가 제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싶었다.

    그러기 위한 방법이 그녀의 죽음뿐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제발 죽어 버려. 죽어 버려……! 죽어 버리라고……!!”

    렐리아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누군가 본다면 그녀의 죄질이 더욱 무거워질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렐리아는 그 위험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허공만 노려보았다. 마치 그 끝에 이벨리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저주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그럼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비참해져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던 찰나, 별안간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감옥 안으로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렐리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힘껏 웅크리곤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그녀의 귓속으로 예기치 않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영애.”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음색에 렐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번진 눈동자 위로 비친 건 놀랍게도 가넷 공작가의 드웨인 공작이었다.

    렐리아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무릎걸음으로 쇠창살 앞까지 다가갔다.

    “고, 고, 공작님.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저 좀 여기서 꺼내 주세요. 네?”

    쇠창살 사이로 뻗은 손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드웨인은 가엾게도 떨고 있는 손을 한번 바라보곤 렐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사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영애.”

    “고, 공작님, 제발 저 좀 여기서 빼내 주세요. 네? 그게 아니라면 저희 아버지라도, 아버지라도……!”

    “그래, 후작이 영애의 걱정으로 근심이 많은 듯 보이더구나.”

    “하아.”

    드웨인의 말에 렐리아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며 울음을 토했다. 드웨인은 그 가련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렐리아의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묵묵하게 기다렸다. 그녀의 안에서 한껏 격양되었을 감정이 전부 토해져 나오기만을.

    결코 짧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렐리아의 흐느낌도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그제야 드웨인은 다리를 굽히고 앉아 렐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영애.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묻고, 싶은 것이요?”

    일순 긴장한 렐리아의 낯을 보며 드웨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곤 줄곧 입 안에만 담고 있던 말을 넌지시 꺼내었다.

    “전하께 듣기론 네가 황위와 관련된 말을 입에 담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냐.”

    “……그, 그건.”

    드웨인이 평소답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도 렐리아는 눈에 띄게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웨인은 이미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가 굽혔던 무릎을 천천히 폈다. 무겁게 차오르는 한숨과 함께 욕지기가 치밀었다. 나이보다 순진한 편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드웨인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멸시로 가득한 눈으로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차갑게 내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저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를 승계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

    “정말이에요! 전, 전 정말 그렇게만 말했어요! 믿어 주세요, 공작님!”

    다급하게 이어진 변명엔 당혹감, 억울함, 초조함 같은 감정들이 너저분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차갑게 식은 공작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드웨인은 렐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혀를 쯧쯧 찼다. 렐리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그런 렐리아를 직면하고도 드웨인은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그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말 자체를 입에 담지 말았어야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생각을 해.”

    “하, 하지만 이전에 전하께 같은 말씀을 드렸을 땐 늘……!”

    “멍청하게 구는 건 이미 충분하니 그쯤 하도록 해, 렐리아. 여기서 나를 더 실망시켜 네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드웨인은 듣기 싫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고작 그뿐인데도 렐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드웨인의 눈엔 그토록 한심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건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감히 제 앞에서 그 표본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다니.

    드웨인은 한숨을 푹 내쉬곤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줄곧 눈치만 살피던 렐리아가 참지 못하고 공작을 붙잡기 위해 소리쳤다.

    “고, 공작님! 제발 이대로 가지 마세요. 저 좀 여기서 꺼내 주세요, 네? 공작님, 제발……!”

    “며칠은 걸릴 게다. 그때까지 네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반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이 순간 렐리아에게 가장 잔인한 벌이 선고되었다. 렐리아는 멀어지는 공작을 향해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영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손발이 주체할 수 없이 벌벌 떨렸다. 그때마다 렐리아는 이를 악물며 견디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를 향한 증오심을 땔감 삼아 마음속 분노를 활활 태웠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가만두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렐리아는 밀려드는 두려움과 설움을 힘겹게 억눌렀다.

    ***

    이벨리아는 초조한 얼굴로 응접실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페일린을 통해 만남을 청한 부친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심장이 불규칙한 박자로 두근두근 뛰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불안이었다. 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렐리아가 투옥되고 며칠 사이 빠르게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전하, 황궁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오시기 전까진 전갈을 보내지 않으시는 것이 어떠실지…….]

    어제 저녁 무렵,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황태자궁으로 나서던 페일린이 처음으로 만류의 뜻을 내비쳤다.

    그간 봐 온 페일린이라면 괜한 일로 그러는 게 아닐 터였다. 조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들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페일린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가넷 공작님께서 매일 황후 폐하를 알현하고 계신다고 해요.]

    [아무래도 렐리아 영애 문제 때문에 그런 거겠지.]

    [네. 그런데 문제는…….]

    말끝을 흐린 페일린의 표정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벨리아는 긴장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서 대답해 보란 의미였다.

    [렐리아 영애님께서 투옥되신 날에만 황태자 전하를 찾으시고, 그날 이후로는 줄곧 황후 폐하만 뵙고 가신다고 합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거야? 전하께서 다른 일로 바쁘신 걸 수도 있잖아. 가넷 공작님께서 꼭 전하와 함께 폐하를 알현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벨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럼에도 페일린은 단호했다.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묵직한 한숨과 함께 목 끝에 고여 있던 말을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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