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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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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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첫걸음
2023.07.21.
일순 가넷 공작의 미간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퍽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것도 같잖은 황태자에게서 말이다.
덜떨어진 머저리 주제에 지금 나와 장난이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공작의 입매가 비열하게 휘어 올라갔다.
“그럼 전하께 다시 묻지요. 무슨 이유로 넷트 영애를 투옥하라 명하셨습니까.”
정중하게 되물었지만, 표정과 태도에 괄시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칼리프는 그 시선을 잠깐도 피하지 않으며 가소롭다는 듯이 조소했다. 아무리 제국의 제일가는 공작가의 가주라지만, 그래 봐야 제 눈엔 하룻강아지일 뿐이었다.
고작 하룻강아지인 주제에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이리 날뛰다니.
“황족을 대하는 영애의 태도가 몹시도 불손하기에 그리하라 했습니다.”
“영애의 태도가 불손했다고요?”
“그냥 불손한 정도가 아니라 몹시도 불손하더군요.”
칼리프가 가볍게 받아쳤다. 사안의 심각성이라곤 조금도 배 있지 않은 투였다.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럼 영애의 어떤 모습이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요.”
가넷 공작이 팔걸이에 올린 손을 힘껏 움켜쥐며 물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명백히 황태자를 향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유스티아가 황급히 부친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님, 우선은 제가 리우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선 이만…….”
“황후!!”
유스티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작이 사납게 역정을 냈다.
순식간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공작은 황태자에게서 유스티아로 시선을 옮기곤 붙잡힌 손을 힘주어 뿌리쳤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을 가져와 유스티아에게 잡힌 손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꼭 더러운 오물을 닦아 내는 손길이었다.
공작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유스티아가 수치심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에도 유스티아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길은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지금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 중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끼어들지 마시지요.”
제국의 황후를 향한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오만한 투였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분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도 공작을 향한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칼리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관망하듯 지켜보았다. 원래였다면 리우리안인 척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고민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도 널 기억해 주지 않잖아. 넌 모든 걸 다 기억하는데, 저들은 네가 한 노력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아. 그런데 왜 넌 계속 노력해야 하는 거지?]
[…….]
[칼리프, 제발 이번 한 번뿐이어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지겨운 삶을 또 반복해야 한다고 해도 후회 한 점 남지 않을 수 있도록.]
이곳으로 오기 직전 펠릭스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한 번뿐이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라던 그의 말이.
그래, 어차피 또 벼랑 끝까지 온 거라면 한 번쯤은 그렇게 해 봐도 나쁘지 않겠지.
칼리프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공작을 향해 들린 그의 얼굴에선 그런 감정은 실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이미 엉망이 된 공작의 심기를 더욱 가열하게 헤집어 놓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전하. 영애의 어떤 모습이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요.”
“오늘 보았던 영애의 모든 태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모습이…….”
“가만 듣고 있으려니 점점 도를 지나치는군요, 공작.”
칼리프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안 그래도 강렬한 적안이 금방이라도 공작을 씹어 삼킬 듯 응시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공작에게 다 설명해야 합니까?”
“…….”
“꼭 심기가 상하는 것까지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군요.”
비아냥대는 입술이 일순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공작을 향한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공작은 전혀 생각지 못한 황태자의 태도에 분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전에 없던 황태자의 기세가 못내 당혹스러운 탓이었다.
그럴수록 칼리프는 더욱 여유작작하게 공작을 응시했다. 그는 공작과 시선을 한번 맞추곤 아직까지도 비비적거리고 있는 공작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다음은 안절부절못하는 황후의 얼굴이었다.
그 모든 걸 충분히 바라본 후에야 다시 공작과 눈을 맞추었다. 그런 그의 입가로 빈정거림이 가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영애의 태도가 꼭 지금의 공작을 닮았었네요.”
“…….”
“제아무리 가넷 공작가가 황실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함께해 온 명망 있는 가문이라지만, 그래 봐야 공작가는 공작가일 뿐일 텐데 말이에요.”
말끝에 피식거린 칼리프가 팔걸이에 올리고 있던 손을 들어 턱을 쓸어내렸다. 무엇 하나 공작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공작이 이를 사리문 채 잡아먹을 듯 칼리프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 말이 어려웠습니까? 무척 쉽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내가 공작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봅니다.”
“저와 말장난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작이 뭐라고 나의 말장난 상대씩이나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
분을 참지 못한 가넷 공작이 버럭 역정을 냈다. 그럼에도 칼리프에게선 움츠러드는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흉흉한 기세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습니까? 원하시니 대답해 드리지요.”
“…….”
“공작이면 공작답게 그에 걸맞은 태도부터 갖추라는 말입니다. 나는 제국의 황태자이지, 공작이 부리는 하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지켜야 나도 공작과 대화란 걸 해 볼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공작의 생각은 어떤가요?”
칼리프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공작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의 입가로 어느덧 선명한 비웃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공작은 치욕스럽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황태자를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칼리프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들은 모양이군요. 자, 그럼 이제 대화란 걸 한번 시작해 볼까요?”
칼리프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의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떼어 내곤 테이블 위로 양손을 깍지 껴 잡았다.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이만 대답해 주시지요. 영애의 어떤 태도 때문에 영애를 투옥시키신…….”
“아니요. 질문은 내가 하겠습니다.”
칼리프는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공작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에 공작의 미간이 더욱 구겨지는 게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공작의 생각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렐리아 영애의 처분 말입니다.”
일순 공작이 혀를 날름거리며 바짝 마른 입 안을 축였다. 처분이란 말의 어감이 몰고 오는 긴장 때문이었다.
공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제게 그걸 물으시려거든 영애가 전하께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부터 말씀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렇지요. 이번만큼은 공작의 말씀이 옳은 것 같군요.”
칼리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보여 왔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공작은 더욱 긴장의 끈을 조이며 황태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입가에 번진 음산한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영애가 황궁 정원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태자비의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태자비 전하,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내게 그런 말도 하더군요? 태자비는 내게 주지 못하는 걸 영애는 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공작의 눈살이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찌푸려졌다. 이벨리아에게 상처를 냈다는 말에 심드렁하게 반응했던 것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칼리프는 헛웃음이 다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꾹꾹 눌러 참곤 남은 말을 마저 이어 붙였다.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태자비는 주지 못하지만, 영애는 줄 수 있다는 그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영애가 내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칼리프가 재밌는 동화를 구연하듯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공작의 긴장은 더욱 배가될 뿐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정적에 공작이 참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칼리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황위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어진 말에 공작이 아연실색하며 입을 벌렸다. 제국의 황태자에게 일개 후작 영애가 황위를 운운했을 거라곤 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칼리프는 공작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피식거렸다. 물론 렐리아가 제게 황위를 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무사히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을 뿐.
하지만 칼리프에겐 황위 계승을 위해 돕겠다는 말이 그렇게 들렸다. 아니, 그렇게 들렸다고 입장을 취할 생각이었다.
말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던가. 무슨 말이든 상대가 듣기 나름이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신중하게 입에 담았어야 할 말이 황위였다.
그걸 공작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럼 이제 공작께서 대답해 보시지요. 제가 어찌해야겠습니까? 내게 감히 황위를 운운한 영애를 용서해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칼리프는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기껍게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잠시 삼켰던 말을 가차 없이 뱉었다.
“그에 합당한 가혹한 벌을 내려야 할까요.”
이것이 그가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아닌 칼리프 드윗으로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