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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50/94)


  • 50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2023.07.20.


    칼리프는 황태자궁 한가운데에 멀거니 멈춰 섰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적안이 허공을 응시하고 그의 잇새로 참았던 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안개 낀 듯 흐렸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금세 유쾌하지 않은 피로감이 무섭게 몰아닥쳤다.

    처음부터 렐리아를 하옥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 이벨리아를 매섭게 노려보는 렐리아를 발견했고, 홀린 듯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영애, 도대체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를…….]

    [대체 뭘 어떻게 하셨기에!!]

    […….]

    [도대체 뭘 어떻게 하셨기에 황태자 전하는 물론 황후 폐하의 마음까지 움직이신 거냔 말입니다.]

    렐리아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이벨리아에게 소리 지르지만 않았어도, 그래서 이벨리아가 놀라 어깨를 움츠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이벨리아에게 상처만 내지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렐리아는 더없이 무례했고, 그로선 도저히 이성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말리던 이벨리아의 노력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벨리아를 함부로 대하는 렐리아를 어떻게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기어이 렐리아를 하옥시키란 명을 내렸다.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이전 생의 경험으로 칼리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그럼에도 멈출 순 없었다. 이제 와 그렇게 한 것이 후회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너무 지쳤다.

    “후우…….”

    칼리프는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속절없이 토해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칼리프.”

    펠릭스가 넌지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옅은 숨소리마저도 지친 기색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게 안 그래도 불편하던 펠릭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왔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이군.”

    칼리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펠릭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내게 어렵지 않은 일이란 거 알잖아.”

    “잘했어. 마침 설명하기 귀찮던 참인데.”

    그가 말끝에 나직이 웃었다. 다른 때였다면 장난스레 말을 받아쳤을 펠릭스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살짝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미 다 알고 있다니 간단하게 말할게. 더없이 엉망이 됐어. 아마 곧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칼리프…….”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버텼지. 네 말처럼 지난 생들과 비교하면 진척이 제법 많이 된 편이니까.”

    칼리프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피식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말이 쉬워 처음이지, 무려 5년이란 시간을 거스르는 거였다. 물론 생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5년을 2년으로, 또 3년으로 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더욱이 그중 1년은 진짜 황태자인 리우리안 페트로프를 대신해 가혹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칼리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코앞까지 드리운 불길함이 너무도 또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게 그를 너무나도 지치게 했다.

    “……과연 끝이 나긴 할까.”

    칼리프가 허탈하게 읊조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의 귓가로 불현듯 펠릭스의 말소리가 스며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마음이 가는 대로 계속 엉망으로 굴어 보는 건 어때? 다시 회귀할 것까지 감안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그렇게 해 봐도 상관없잖아.”

    제법 진지한 조언이었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털레털레 웃음만 나왔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보라고? 나조차도 내 마음이 원하는 게 뭔지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마음 가는 대로 하란 말인가.

    칼리프는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미 회의감에 절어 버릴 대로 절어 버린 마음은 어떤 의지도 피워 올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펠릭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곤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어차피 다시 회귀한다면 이번 생을 기억하는 건 너뿐일 거야. 오늘 네가 한 말과 행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이벨리아마저도 말이야.”

    “…….”

    “그러니 한 번쯤은 너도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면 안 되겠나?”

    펠릭스는 진심을 가득 담아 칼리프를 보았다. 부디 그가 그렇게 했으면 싶었다. 칼리프가 수도 없이 삶을 반복하며 얼마나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는지, 저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한 번쯤은 그가 이기적으로 굴었으면 싶었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널 기억해 주지 않잖아. 넌 모든 걸 다 기억하는데, 저들은 네가 한 노력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아. 그런데 왜 넌 계속 노력해야 하는 거지?”

    “…….”

    “칼리프, 제발 이번 한 번뿐이어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지겨운 삶을 또 반복해야 한다고 해도 후회 한 점 남지 않을 수 있도록.”

    내도록 허공만 응시하던 칼리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그시 눈이 마주쳤지만, 칼리프에게선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펠릭스는 알 수 있었다. 칼리프에게 제 진심이 무사히 잘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펠릭스는 응원의 마음을 가득 담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바삐 정원을 가로질러 왔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당장 황후궁으로 들라는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칼리프는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곁에 다가온 시종을 바라보았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의 대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

    유스티아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애꿎은 눈동자만 이리저리로 굴렸다. 넷트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당연히 공작도 함께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공작은 후작을 배웅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유스티아를 노려보았다. 절로 손가락이 곱아들 만큼 살벌한 기세였다. 금방이라도 제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당장 정신 나간 네 아드님을 부르지 않고 뭘 하는 거지?]

    일순 공작이 눈을 서슬 퍼렇게 뜬 채 일갈했다. 유스티아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 떨다가 서둘러 시종을 불렀다.

    공작의 바람대로 리우리안을 불러오라 명하긴 했지만, 어제의 일로 제게 마음이 상한 아들이 곧바로 와 줄지 의문이었다.

    유스티아는 한숨을 삼키며 리우리안이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길 간절히 바랐다. 공작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끔찍하리만치 숨 막혔다.

    간절한 바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곧 리우리안이 도착했단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어,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유스티아는 황급히 대답을 전하곤 알현실의 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내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리우. 일단 어서 앉거라.”

    칼리프는 유스티아와 공작을 한번 바라보곤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공작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렐리아의 일을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황후에게선 그저 반가운 기색밖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머릿속이 혼란해졌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으며 공작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잘 지내고 있었지요. 전하께서 렐리아 영애를 하옥시켰단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공작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시작부터 렐리아의 이야기를 언급한 거로 봐선 공작의 마음이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눈치챈 건 칼리프뿐만이 아니었다. 유스티아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말을 이어 붙였다.

    “그, 그래, 리우. 렐리아를 하옥시켰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니? 영애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유스티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들을 보았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렐리아를 하옥시켰을까 싶긴 하지만, 한편으론 시답잖은 이유일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공작이 지금껏 돌아가지 않은 게 그저 한가해서일 리가 없었다. 감히 장담컨대 직접 황태자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겠단 의지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공작이 판단하고자 하는 상황은 렐리아를 하옥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이 아닐 터였다.

    공작이 생각하는 황태자의 자질이란 것이 과연 리우리안에게 있는지, 그것을 판단하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전하. 폐하께서 영애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냐 묻지 않으십니까.”

    공작이 제법 날 선 목소리로 그를 채근했다. 그럼에도 칼리프는 그저 느리게 눈을 끔벅이기만 했다. 그 모습이 꼭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공작의 말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황태자의 시건방진 태도에 참다못한 공작이 테이블을 쾅 내치려던 때였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황태자의 입술이 서슴없이 벌어졌다.

    “그랬으니 그런 명을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설마 죄 없는 영애를 하옥시켰을까요.”

    “…….”

    “왜요, 공작의 눈에도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고만 치는 얼간이로 비치는 겁니까?”

    칼리프가 말끝에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명백히 공작을 향해 보내는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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