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불길한 예감 (49/94)


  • 49화. 불길한 예감
    2023.07.19.


    “하아…….”

    태자비 궁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놀란 페일린이 곧장 곁으로 다가왔지만, 이벨리아는 괜찮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리우리안이 렐리아를 하옥시키다니,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렐리아의 절규가 아직까지도 이명처럼 선명하게 울렸다.

    [전하! 전 억울해요! 억울해요, 전하!]

    그녀는 오열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쏟으며 기사들에게 처참히 끌려갔다. 그런 렐리아를 보고도 리우리안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간 미뤄 두었던 묵은 일을 해결한 사람처럼 후련해 보였다.

    주변의 모두가 그를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 온 렐리아와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테니 그들의 눈엔 리우리안이 더없이 잔인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가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이 눈동자에 선명히 박힐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냉혹한 그의 미소가 그녀의 눈엔 고통에 찬 울분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이 보였다.

    “전하…….”

    이벨리아는 연거푸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나직이 그를 불러 보았다. 아스라이 새어 나온 음성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씨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지나치게 불안했다. 어떻게도 진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만이 본능처럼 밀려왔다.

    이벨리아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곤 힘이 빠진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 페일린 안 되겠어. 아무래도 전하를 만나 봬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려 달라고 하셨잖아요.”

    헛발질하며 자리에 주저앉길 반복하던 이벨리아가 애끓는 눈으로 페일린을 보았다.

    [당분간은 그대를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래도 갈게. 그대에게 최선을 다해 빨리 갈 테니, 그때까진 되도록 태자비궁 밖으로 나오지 말고 기다려 줘.]

    렐리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제 앞으로 다가온 그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제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렐리아를 향했던 냉혹한 살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동안 느꼈던 것보다 훨씬 다정한 눈을 하곤 놀란 자신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더욱 그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렐리아를 하옥시킨 사실이 궁 안에 퍼진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극으로 치달아 갈 것이 분명했다.

    렐리아가 누구던가. 황후 세력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넷트 후작의 여식이었다. 그 이유만으로 황후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영애였다.

    그런 영애를 하옥시켰으니, 타인의 눈엔 황태자가 황후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황후라고 다를까?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황후도 리우리안이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곧 황후의 뒤에 숨은 진짜 세력인 가넷 공작을 향한 반기가 될 터였다.

    “아니. 안 될 것 같아. 못 기다릴 것 같아. 전하를 봬야 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페일린…….”

    페일린을 향한 이벨리아의 시선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페일린은 차마 그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우선 이벨리아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시트 위에 그녀를 앉히곤 무릎을 굽힌 채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황태자궁에 다녀올게요.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신다고 말씀드리고 올 테니 일단 전하께선 놀란 마음부터 추스르고 계세요. 아셨죠?”

    페일린이 이벨리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제야 초점이 돌아온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페일린을 향했다.

    이벨리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선은 페일린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

    “뭐라고? 누가 누굴 하옥시켜?”

    여유롭게 차를 즐기던 유스티아가 별안간 이어진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의 노여움을 감지한 시녀장이 몸을 움찔 떨었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렐리아 영애님을…….”

    “그게 무슨 말이야! 리우가 렐리아를 하옥시키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유스티아가 역정을 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리우가 갑자기 왜 렐리아를 하옥시킨단 말인가.

    어제 오전에 보았던 아들이 잔뜩 심기가 틀어진 채 황후궁을 나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렐리아를 하옥시킨 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하루아침에 후작가 영애를 하옥시킬 만한 명분이 무어란 말인가.

    “이유가 무엇이라던가.”

    “예……?”

    “리우가 렐리아를 하옥시킨 이유 말이야!”

    유스티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제야 의미를 알아챈 시녀장이 서둘러 입술을 움직였다.

    “화, 황족 모독죄라고 하옵니다.”

    “뭐? 황족 모독?”

    유스티아의 미간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묵직하게 밀려오는 한숨에 목 끝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렐리아가 기어이 리우리안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하, 그래서 지금 리우리안은 뭘 하고 있지?”

    “그것까지는 저도 들은 바가…….”

    “그럼 당장 알아봐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예, 예, 폐하. 당장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급히 걸음을 물리는 시녀장을 보며 유스티아가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하, 도대체 무슨 실수를 저질렀길래 황족 모독이란 말까지 나오냔 말이야!”

    렐리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히스테릭하게 중얼거렸다. 리우리안이 괜히 렐리아를 하옥시킨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었다.

    이 일이 부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유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벌써부터 분개한 가넷 공작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상황 파악이 시급했다. 시녀장에게 리우리안의 동태를 살피라 명한 것도 잊고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장이 리우리안 쪽을 살피는 사이 자신은 렐리아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곤 막 출입문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폐하, 가넷 공작님과 넷트 후작님께서 드셨습니다.”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알림이 유스티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

    “이 상황을 제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폐하.”

    알현실에 자리한 넷트 후작이 유스티아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 옆의 가넷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작, 우선 상황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면…….”

    “황태자께서 태자비의 역성을 들기 위해 렐리아 영애를 하옥시켰다고 하더군요.”

    줄곧 침묵하고 있던 가넷 공작이 유스티아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그런 건 유스티아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공작의 설명만이 유스티아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우가 태자비의 역성을 들기 위해 렐리아를 하옥시키다니요.”

    “소식이 이리 늦으셔서 되겠습니까. 궁 밖에 있는 나도 알고 있는 일을 아직까지 파악도 못 하고 계시다니요.”

    “아닙니다. 듣기론 황족 모독으로 영애를 하옥시켰다고 했는데…….”

    “폐하, 후작도 계시는 자리입니다.”

    공작의 따끔한 지적에 유스티아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유스티아는 반사적으로 넷트 후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를 싣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말실수했음을 깨닫곤 서둘러 정정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란 뜻입니다. 렐리아 영애가 황족을 모독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황태자께서 기어이 저지르신 모양이군요. 황태자가 그러고 있는 동안 폐하께선 대체 뭘 하고 계셨습니까.”

    공작이 거칠게 미간을 구긴 채 황후를 향해 일갈했다. 그러면서도 후작은 은근하게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유스티아는 가슴이 갑갑했다. 천하의 공작도 눈치를 살펴야 할 정도로 넷트 후작은 공작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어쩌면 공작에겐 저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넷트 후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후작의 심기가 단단히 뒤틀리고 말았으니.

    유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선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최대한 빨리 정확한 경위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렐리아는 그때까지 계속 감옥에 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후작,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영애를 꺼내 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내게도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영애는 황족 모독을 이유로 하옥이 되었어요. 황족 모독은 반역만큼이나 무거운 죄고요.”

    유스티아가 차분히 설명했지만, 후작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도리어 더욱 창백하게 질린 후작이 불거진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밀려드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유스티아는 차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공작과 후작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후작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최대한 빨리 영애를 꺼내 보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우선은 돌아가 계시지요. 일이 해결되는 대로 렐리아 영애 역시 후작저로 안전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잠잠히 유스티아의 말을 듣던 공작은 아직까지도 미간의 주름을 펴지 못했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일단은 폐하의 말대로 하시지요, 후작. 나 역시 영애를 빨리 후작저로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넷트 후작은 공작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유스티아는 참았던 숨을 옅게나마 내쉴 수 있었다.
     

    1689768145417.jpg

    168976814541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