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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무도하고 잔인한 (48/94)


  • 48화. 무도하고 잔인한
    2023.07.18.


    이벨리아는 놀란 얼굴로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알 것 같았다.

    유난히 눈에 익은 우직한 뒤태는 리우리안의 것이었다.

    “영애,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전하.”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더 반복해야 하지?”

    리우리안이 렐리아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에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짝 굳어 안쓰러울 정도로 가련하게 떨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우리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아우라는 잦아들 줄을 몰랐다.

    이벨리아는 황급히 리우리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렐리아를 배려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대로 그냥 뒀다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았다.

    “전하, 아무래도 렐리아 영애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에요. 안색만 봐도 그렇잖아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테니, 이만 저와 함께 가세요. 네?”

    이벨리아가 애원하듯 리우리안에게 매달렸다. 붙잡은 팔로 언뜻 잔떨림이 일었다. 제 말에 흔들려 그런 건지, 렐리아를 향한 분노가 점점 더 들끓어 그런 건지 헷갈렸다. 밀려오는 초조함에 그의 옷깃을 좀 더 힘주어 붙잡았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엔 연못가의 풍경이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아서 그쪽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좋은 풍경을 보고 나면 분명 전하의 기분도 한결 나아지실 거예요. 그러니까 저랑 가세요, 전하.”

    그의 마음이 움직이길 간절하게 바라며 그를 미약한 힘으로 흔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하지만 곧 묵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다리가 선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방향을 잡았다. 최대한 빨리 렐리아와 멀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달라지기 전에, 시한폭탄 같은 렐리아의 입이 다시 터지기 전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렐리아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찰나 리우리안의 익숙한 살 내음이 렐리아의 코끝을 맴돌았다.

    “하.”

    렐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악착같이 참고 있던 눈물이 발아래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오는 길 내내 절대 울지 않겠노라 이 악물고 다짐했던 것도 이젠 다 의미가 없었다.

    리우리안이 태자비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당연했던 리우리안의 옆자리를, 이벨리아가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나란히 선 두 사람에게서 작은 빈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렐리아의 마음은 물론 이성까지 완벽하게 무너트렸다.

    “비 전하께선 언제나 이런 식이군요. 제 앞에선 고상한 척 가증스럽게도 훈계를 하시더니, 황태자 전하의 앞에선 그저 순진한 얼굴만 하시네요.”

    절망에 잠식된 목소리가 판단력을 완전히 잃은 채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이 자리를 벗어나던 두 사람의 발을 꽉 붙잡았고, 매섭게 날이 선 리우리안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영애, 지금 뭐라고 했지?”

    리우리안이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탁하게 죽어 버린 렐리아의 눈동자는 오로지 이벨리아만을 응시했다.

    “비 전하께선 언제나 저와 황태자 전하를 위하는 척 제게 훈계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나타나시기 전에도 그랬고, 지난 승전 파티 때도 그러셨지요.”

    “…….”

    “그런데 승전 파티가 있던 날도, 그리고 오늘도. 어째서 자꾸만 제게서 황태자 전하를 빼앗아 가시는 건지요.”

    렐리아가 이벨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벨리아는 기어이 닥쳐온 최악의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향한 태도는 물론 건네 온 말까지 전부 너무 위험했다. 결국 그녀에게 독이 될 선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옆에 선 리우리안에게서 다시금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영애, 오늘은 그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날 다시 만나 듣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이벨리아는 렐리아를 향해 고개까지 저으며 지금이라도 멈추란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렐리아의 눈에 그것이 보일 리 만무했다.

    렐리아는 표독스럽게 입술을 씹어 물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고집스레 리우리안을 담았다. 자신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살기로 일렁였다.

    자신을 향해 그런 눈빛을 쏘아 보낼 수도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살기 어린 시선마저 거부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끌어안기 위해 발악했다.

    그거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다 못해 다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리우리안을 태자비에게 뺏긴다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태자비 전하와 가시면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태자비 전하는 전하께서 원하시는 걸 드릴 수 없어요. 전하도 아시잖아요.”

    렐리아는 자존심도 다 버린 채 구차하게 매달렸다.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리우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래? 그 말은 꼭 내가 원하는 걸 영애는 줄 수 있다는 듯이 들리는군.”

    그가 같잖다는 투로 렐리아를 향해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황태자를 둘러싼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꽃이 만개한 황궁의 정원은 순식간에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었다. 따뜻한 바람 속에 숨어 있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며 위험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제힘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녀뿐 아니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두가 곧 폭풍이 몰아닥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유일한 한 사람, 렐리아만을 제외하고.

    “물론이에요, 전하. 전 할 수 있어요. 제가 해 드릴게요. 전하께서 원하는 모든 걸 안겨 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지 마세요. 어서, 어서 제게 와 주세요.”

    “그래? 그렇게까지 확신을 하다니, 영애가 내게 줄 수 있다는 게 뭔지 궁금해지는데?”

    싸늘하게 조소한 그가 이벨리아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내곤 렐리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말해 봐, 영애. 영애가 내게 줄 수 있다는 게 뭐지?”

    사리문 잇새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이토록 비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렐리아는 바로 앞에서 그를 마주할 수 있어 그저 황홀한 듯이 보였다.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를 물려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그 과정에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전부 전하께 안겨 드릴 거예요.”

    렐리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가 다시 제 앞으로 와 주다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리우리안이 태자비와 제게 등을 보이고 멀어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렐리아는 어서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 주길 기다렸다. 그러면 직전까지 받았던 상처쯤이야 깡그리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에게 준다는 것이 고작 그것인가.”

    “저, 전하.”

    “영애의 눈엔 내가 그저 그런 얼간이로밖에 비치지 않는 모양이군. 일개 후작 영애의 도움이 없이는 황위도 계승 받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전하,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순간 당황한 렐리아가 본능처럼 항변의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든 리우리안의 행동에 멈추어야 했다.

    “아, 그럼 태자비를 그리 하찮게 대한 이유도 결국 그래서였나?”

    순식간에 고요해진 사위로 리우리안의 실소가 음산하게 울렸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그의 기운을 감지한 렐리아가 경직된 채 리우리안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줄곧 궁금하던 차였거든. 고작 후작 영애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번번이 제국의 태자비를 무시하는 건지 말이야.”

    “전하…….”

    “그런데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얕게 고개를 끄덕인 리우리안이 일순 매섭게 렐리아를 직시했다. 그러곤 나직이 뇌까렸다.

    “나도 우습게 보는 영애인데, 그런 영애의 눈에 나의 비는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어. 안 그런가?”

    “저, 전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영애가 나는 물론 나의 비까지 그토록 우습게 봤다니, 무척 유감이야.”

    “전하, 오해세요. 전하를 우습게 보다니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십니다!”

    전에 없이 당황한 렐리아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리우리안에게 결정적 계기만 되어 줄 뿐이었다.

    “그래? 그 말은 나의 비를 하찮게 본 건 사실이란 의미인가?”

    리우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빈틈을 파고들었다. 순간 렐리아는 덫에 걸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발이 벌벌 떨렸다. 자신을 꿰뚫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냉혹하고 무정했다.

    “저런, 대답을 못 하는군. 하긴 아니란 말은 할 수 없겠지. 영애가 태자비에게 대드는 거로 모자라 감히 태자비의 몸에 상처를 낸 꼴을 본 사람이 오늘만 해도 이렇게 여럿이니 말이야.”

    리우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자신을 향한 시종들의 시선을 기껍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한 질타와 원망으로 짙어질 때마다 렐리아가 떨어지게 될 구렁텅이 역시 아득하게 깊어져 갔다.

    그 깊이가 혼자의 힘으론 어떻게도 빠져나올 수 없는 지점이 되었을 때, 리우리안은 다시금 렐리아를 응시했다.

    그녀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동정심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이런, 나의 렐리. 가련하게도 떨고 있군. 하지만 어쩌겠어. 이토록 많은 이의 앞에서 그대가 보란 듯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말이야.”

    “…….”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황족을 하찮게 생각한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가 렐리아의 뺨을 쓸어내리며 친절하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럽게 빛이 났다.

    “뭐 하고 있나? 영애를 당장 감옥으로 끌고 가지 않고.”

    그는 지체 없이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를 향해 말했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던 렐리아가 다급히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 전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제 말을 좀 들어 주세요! 전하! 전하!!”

    억울한 외침이 정원을 세차게 울렸다. 마지막 절규까지도 어리석은 울분으로 가득했다.

    리우리안은 멀어져 가는 렐리아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처참하게 짓밟는 이의 낯이라기엔 너무나도 무도하고 잔인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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