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렐리아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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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렐리아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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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렐리아의 광기
2023.07.17.
이른 아침부터 넷트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 위를 바쁘게 내달렸다.
렐리아는 멀리 보이는 황궁을 눈에 담으며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곤 가슴 위를 꽉 움켜쥐었다.
어제저녁 황후를 만난 후부터 시작된 가슴 통증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그게 못내 괴로워 날이 밝기 무섭게 하녀와 마부를 재촉했다.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나 버린 것만 같았다. 황후와의 만남을 그나마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돌아왔는데도 그랬다.
이 불안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건 리우리안뿐이었다. 그를 보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제 두 눈에 양껏 담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줄곧 꽉 막힌 것 같은 숨통도 조금이나마 트일 것 같았다.
“……전하.”
렐리아는 언제나 익숙했던 그 호칭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도 없이 말했던 단어이고 호칭인데, 오늘따라 그 말을 뱉은 입 안이 지나치게 까슬했다. 그게 순간 너무 서러워서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아니야, 아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지레 겁먹지 마.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다, 잘될 거야.”
렐리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곤 눈에 힘을 주었다. 울분이 치밀었지만, 울 수 없었다. 이대로 울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은 황후에게 내쳐진 것도, 리우리안에게 버림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울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참지 못하고 이대로 눈물을 떨어트린다면 태자비에게 결국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겠지.
렐리아는 이를 사리물었다. 핏발 선 눈자위로 독기가 한가득 서렸다. 그런데도 눈물을 삼키는 게 쉽지 않아서 부러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한층 가까워진 성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다. 저곳에 그가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남자, 리우리안이.
어서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껏 그가 간절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랬다.
리우리안이 너무 간절했다.
***
“레이튼!”
산책 중이던 이벨리아는 멀리서 보이는 반가운 얼굴에 서둘러 그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전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아버지께서 갑자기 레이튼을 데려가셨다고 해서 놀랐어. 사병들 훈련 문제는 잘 마무리된 거야?”
“……네. 그 문제는 별 탈 없이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며칠씩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야, 레이튼. 다른 일도 아니고 아버님 부탁으로 자리를 비운 건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이벨리아가 다정하게 레이튼을 다독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한층 더 밝아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와 달리 레이튼은 어딘지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
이벨리아는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거니와 제 뒤로 페일린을 비롯한 다른 시녀들이 있었다.
“날씨가 무척 좋아서 산책을 나온 길인데, 괜찮으면 레이튼도 함께하지 않을래?”
이벨리아는 모르는 척 레이튼에게 동행을 청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함께 따뜻한 바람을 쐬다 보면 그의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레이튼은 대답 대신 그녀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언제나 그가 지키던 자리였다. 동행하겠다는 대답이나 다름없는 움직임이었다.
이벨리아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감아올렸다. 그러곤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포근한 날씨가 그녀를 어루만지듯 감싸 안았다. 그 느낌이 못내 좋아서 그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리우리안에게 함께 걷지 않겠냐고 청이라도 올려 볼 걸 그랬단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이벨리아는 괜스레 주변을 살폈다. 산책이라 해 봐야 언제나 태자비궁 정원만을 거닐었는데, 오늘은 태자비궁을 나서 황궁의 정원을 누비는 중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완벽한 날씨만큼이나 기적 같은 행운이 따라 준다면 우연히 그를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쩐지 오늘이라면 지금껏 없던 요행이 그녀를 찾아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바람을 가슴 한가운데에 품은 채 이벨리아는 경쾌한 걸음을 내디뎠다. 산책을 위한 움직임인지, 기다리는 누군가를 찾기 위한 움직임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모호함 속을, 이벨리아는 한참을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걸음이 경직된 채 우뚝 멈추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심상치 않게 건네 오는 인사에 이벨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앞에 멈춰 선 건 렐리아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달리 한껏 상한 렐리아의 얼굴이 형언하기 힘든 음산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녀의 인사에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영애군요.”
“어딜 가시던 길이신지요.”
“아닙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은 듯해 산책을 나온 길입니다.”
경직된 이벨리아의 대답에 렐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곤 날씨가 좋다던 그녀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 새파란 하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네요. 날씨가…… 무척 좋네요.”
렐리아가 억양이라곤 실리지 않은 단조로운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소름 끼치도록 음험하게만 들려서, 이벨리아는 더 이상 렐리아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딜 가던 길인 것 같은데, 내가 괜히 걸음을 붙잡은 것 같네요. 나도 마침 연못가에 가는 길이었던지라 인사는 이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이만.”
어딜 가는 길이냐고 묻던 렐리아의 질문에 대답했던 것과는 상충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렐리아를 피하고 싶었다.
아주 잠깐 그녀를 마주했을 뿐인데 거대한 폭풍우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불길한 기운이 몰려왔다. 직전까지만 해도 설렜던 기분을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렐리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벨리아는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막 렐리아의 곁을 지나치던 때였다.
줄곧 조용하던 렐리아가 바짝 굳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전하께선 얼굴이 활짝 피셨네요.”
이벨리아는 발목이 붙잡힌 듯 멈춰 섰다. 그러곤 렐리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영애, 지금 뭐라고…….”
“그러실 만도 하지요. 하루아침에 상황이 완전하게 달라졌으니, 이깟 날씨에도 행복한 듯 웃으실 수 있는 거겠지요.”
이벨리아의 녹안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렐리아의 말은 어조는 물론 내용까지 명백히 비꼬는 투였다.
“영애님, 전하께 너무 무례하신……!”
“페일린.”
이벨리아의 뒤를 지키고 있던 페일린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벨리아는 그런 페일린을 단호하게 막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페일린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대는 넷트 후작가의 렐리아였다. 페일린이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건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제가 아무리 허울뿐인 황태자비이고, 그녀의 무시가 하루 이틀 이어진 일이 아니라지만, 시종들이 보는 앞이었다.
이번만큼은 이벨리아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영애, 말이 지나치군요.”
“그랬나요? 고작 전하의 얼굴이 피셨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인데, 그게 지나친 거군요.”
렐리아가 눈동자의 초점이 풀린 채로 실소를 흘렸다. 순간 이벨리아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너무 괴기한 모습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흐리멍덩한 낯의 렐리아가 너무 위험해 보였다.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은 전부 잊은 모양이군요. 분명 언행에 경각심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이벨리아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라도 렐리아의 정신을 일깨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긴커녕 렐리아의 눈동자는 점점 더 광기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예, 그러셨지요. 전하께서 분명 제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제 언행이 곧 황태자 전하의 안목이 될 테니 경각심을 기울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그걸 기억하면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란 말입니까.”
이벨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단호하고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하던 렐리아의 정신을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오늘도 전하께선 절 탓하시네요.”
“영애.”
“그럼 전하께서 말씀해 보세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는지. 전하께서 제게 바라는 게 대체 뭔지.”
렐리아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벨리아와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세차게 밀려오는 분노에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위로 자꾸만 리우리안의 얼굴이 겹쳐졌다. 황후의 얼굴이 겹쳐졌고, 자신을 향했던 그들의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울렸다.
네가…… 다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없었더라도……!!
렐리아는 순간 폭주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벨리아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영애, 도대체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를…….”
“대체 뭘 어떻게 하셨기에!!”
상상도 하지 못한 분노가 폭발한 순간, 렐리아가 이벨리아의 손목을 거칠게 부여잡았다.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그 찰나 그녀의 손목 위로 렐리아의 손톱이 파고들며 상처를 냈다. 알싸한 통증이 이어졌지만, 이벨리아는 전혀 느끼지 못한 얼굴로 렐리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셨기에 황태자 전하는 물론 황후 폐하의 마음까지 움직이신 거냔 말입니다.”
이벨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리우리안의 마음과 황후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였다는 말인가. 리우리안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니 그를 언급한 것까진 이해하더라도 황후의 이야기는 도통 납득할 수 없었다.
이벨리아는 짙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렐리아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그녀를 제지해야 했다. 허울뿐이라고 하더라도 황가의 일원으로서 황실을 향한 모함을 더는 용인할 수 없었다.
다부지게 마음을 다잡고 렐리아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곤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날 선 눈빛을 보냈을 때였다.
“보자 보자 하니 더는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군, 렐리아.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별안간 상상도 하지 못한 냉랭한 목소리가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