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녀가 행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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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그녀가 행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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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그녀가 행복할 수 있다면
2023.07.16.
늦은 밤, 펠릭스의 초조한 걸음이 황태자 침실 안을 누볐다. 평소와 달리 산만한 모습이었다. 보다 못한 칼리프가 미간을 좁히곤 으름장을 놓았다.
“적당히 하고 앉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종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오전에 만난 황후 때문이었다.
원래도 달갑게 여겨 본 적 없는 인물이었지만, 오늘은 그 거부감이 더욱 극에 달했다. 감히 저 몰래 이벨리아를 불러낸 여자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역겨워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곤 그대로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그 후론 줄곧 이 상태였다. 가라앉은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보다 빨리 침실을 찾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쉴 수도 없었다. 펠릭스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그는 초저녁부터 넋이 나간 얼굴로 침실 안을 정신 사납게 돌아다녔다.
더는 한계였다. 말로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진정시킬 작정이었다. 제 무력이 빌어먹을 펠릭스의 이능을 이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이야.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짓 그만하고 앉든지 자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칼리프가 사납게 뇌까렸다. 하지만 펠릭스는 여전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표정만 더욱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참다못한 칼리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펠릭스의 어깨를 거칠게 부여잡았다.
그게 전부였다. 펠릭스의 어깨를 붙잡은 것. 그런데 펠릭스의 분주한 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아.”
어느덧 초점이 또렷이 잡힌 펠릭스의 눈동자가 칼리프를 직시했다. 그에 칼리프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태도는 물론 이어진 말까지, 전부 다 뜬금없었다.
“가짜 황태자가 되길 자처한 이후로 상황이 복잡하지 않았던 적은 없어.”
“그래, 그랬지. 근데 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상황인 것 같다고.”
“하, 정말 피곤하군.”
칼리프는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펠릭스의 말이 너무 함축적이었다. 수수께끼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결코 좋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하지 말고.”
칼리프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통 짜증으로 가득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펠릭스의 눈에는 그의 상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오후에 이벨리아를 만나고 왔어.”
펠릭스가 오후에 있던 일을 실토하듯 말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고스란히 칼리프의 심기를 자극했지만, 그는 짙은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화를 내는 게 이젠 지겹다 못해 너무 지쳤다.
“하, 넌 내가 한 경고를 단 한 번도 귀담아듣는 법이 없군.”
칼리프가 펠릭스를 향했던 시선까지 거둔 채 진저리를 냈다. 그답지 않은 반응에 순간 조바심이 인 펠릭스가 칼리프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네가 하지 말란 짓을 한 건 미안해. 사과하지. 하지만 나한테도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해 주면 안 되겠나?”
“그 빌어먹을 사정이란 게 대체 무엇인데.”
“어, 그건…….”
펠릭스는 감정에 호소하던 것도 잊고 난감하게 멈춰 섰다. 칼리프의 눈엔 그저 핑계를 떠올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됐어. 더 듣고 싶지 않군.”
“잠깐만! 잠깐만, 칼리프! 기분이 상한 건 알겠지만, 지금이 별거 아닌 일에 꽁해 있을 때가 아니야!”
“별거 아닌 일? 꽁해 있어? 도대체 누가 별것도 아닌 일에 꽁해 있다는 거지?”
칼리프의 미간이 걷잡을 수 없이 구겨졌다. 이런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당황한 채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던 펠릭스가 냅다 입 안에 담고 있던 말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이벨리아의 기억이 잘못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아.”
“뭐?”
“이벨리아의 기억 말이야!”
“하, 진짜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겠군.”
칼리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심하다는 반응이었다. 열성적이기까지 했던 말에 돌아온 반응이라기엔 전혀 성의가 없었다.
펠릭스가 미간을 좁히곤 칼리프를 붙잡았다.
“우선 내 말 좀 들어 봐. 넌 분명 나한테 그랬잖아. 이벨리아를 만나게 된 게 그녀가 요양차 영지에 내려오면서부터였다고.”
“그래. 근데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거지?”
“이벨리아는 영지에 갔었던 걸 모르고 있어.”
펠릭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칼리프는 그런 펠릭스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도리어 이상한 문제에 꽂혀 이러는 그가 갑갑할 뿐이었다.
“그녀가 기억 못 하고 있다는 걸 여태 모르고 있었나? 도대체 그게 왜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군.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야. 그러니 영지에 있었던 것 역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머물렀던 기간이 길지도 않았으니.”
“그게 무슨 속 편한 소리야!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펠릭스가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색까지 하며 칼리프를 보았다.
“단순히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와 함께 보냈던 시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어. 그녀는 요양이고 뭐고 어릴 때 영지에 갔던 적이 없는 거로 알고 있다고!”
뭐……?
칼리프의 안색이 처음으로 의미심장하게 굳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영지에 온 적이 없다니.
“자세히 말해 봐. 영지에 갔던 적이 없는 거로 알고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 이제야 내 말이 들리기 시작한 모양이군.”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칼리프가 경직된 얼굴로 일갈했다. 펠릭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상 이벨리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니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알아야 할 일이었다. 칼리프라면 더더욱.
“이벨리아가 그랬어.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건 맞지만 요양차 영지에 갔던 적은 없다고. 다만, 영지에서 즐겁게 놀았던 꿈을 자주 꿨다더군.”
“허.”
칼리프의 잇새로 허탈한 숨이 터져 나왔다. 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이벨리아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런데 그걸 꿈이라고 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에게 알려 줘야 해. 영지에서의 일이 꿈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걸. 그것부터 인지를 해야 너도 기억할 수 있어.”
펠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칼리프의 귀엔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허망했다.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수십 번을 회귀하며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문득 이벨리아에게 제 정체를 밝혔던 과거의 순간이 떠올랐다.
결국 그래서였던 것인가.
[……칼리프 드윗?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봐요. 전하, 장난을 치시는 것이지요? 어서 그냥 해 본 말이라고 해 주세요. 어서요……!]
그래서 내 이름을 듣고 그토록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던 것인가.
칼리프는 입 안에 겹겹이 쌓이는 숨결을 토하듯 내쉬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목구멍은 자꾸만 좁아지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숨은 너무 거칠었다.
아팠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자꾸 밀려왔다. 마음은 물론 온몸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거세게 밀려오는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이벨리아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네가 진짜 리우리안이 아니라 칼리프란 사실을 말이야.”
칼리프가 자조 섞인 미소를 감아올렸다. 그런다고 달라질 상황이었다면, 지금까지 회귀가 이어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아직도 내 말을 이해 못 한 거야? 이벨리아는 널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네 존재에 대해 인식 자체를 못 하고 있는 거라고!”
“무슨 소린지 알아. 충분히 이해도 했고.”
“하, 근데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설마 아무런 시도도 안 하고 이대로 그냥 두겠단 소리인가?”
펠릭스가 미간을 거칠게 찌푸렸다. 그럼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칼리프가 이내 초연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미 해 봤잖아.”
“칼리프.”
“내가 리우리안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 봤자 그녀를 힘들게만 할 뿐이야.”
“지금은 그때가 아니잖아. 그때랑 비교하면 회귀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시간도 훨씬 길고! 이번엔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어. 이벨리아가 널 기억해 낼 수도 있다고!”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 그렇다면 그녀는 또 충격에 시름시름 앓게 될 테고. 겨우 좁혀 놓은 거리도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질 거야. 그렇게 되면 또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거고.”
“하, 그래서 시도도 해 보지 않겠다는 말인가? 네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지긋지긋한 삶을 계속 반복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상관없어. 회귀하기 전에도 삶이 지긋지긋했던 건 마찬가지니까.”
“맙소사. 칼리프, 제발!”
펠릭스가 읍소하듯 칼리프를 만류했다. 그럴수록 칼리프의 낯빛이 점점 더 무감각하게 식어 갔다.
펠릭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칼리프가 너무 안타까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칼리프의 인생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가혹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만 굴러가는 인생이라니, 이게 무슨 잔인한 장난질이란 말인가.
펠릭스는 칼리프가 행복하길 바랐다. 당장은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언정 언젠가는 그에게도 찬란한 행복의 순간이 다가오길 바랐다.
그런데 그가 너무 고통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행복과는 지나치게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어. 그러기 위해 내 정체도 계속 숨겼던 게 아닌가.”
“…….”
“그녀만 행복해지면 돼. 그녀가, 이벨리아가 행복할 수 있다면…….”
“…….”
“나 같은 건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애처로운 혼잣말에 펠릭스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칼리프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