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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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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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굴욕
2023.07.15.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저녁.
유스티아는 언짢은 기색으로 황후궁 응접실을 지켰다. 렐리아가 만남을 청해 온 탓이었다.
원래라면 그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찾았을 응접실이지만, 오늘은 도저히 속 좋게 침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리우,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네. 말씀하세요.]
[혹시 말이다. 정말 혹시 말이야.]
[네.]
[네 마음이 태자비에게 기울기라도 한 거니?]
그 말을 하던 순간에 어찌나 심장이 불안하게 뛰던지, 유스티아는 아직까지도 그 기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1분 1초가 억겁 같았다. 야속할 정도로 뜸을 들이던 아들은 한참 후에야 미간을 구기며 되물어 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네 마음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저도 여쭙는 거예요.]
리우리안이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게 유스티아를 안도하게 하기도, 더욱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거세게 밀려드는 불안을 이기지 못한 유스티아가 결국 이실직고했다.
[렐리아가 그러더구나. 네가 태자비에게 꽃을 선물하는 걸 보았다고.]
[하, 렐리가 말입니까?]
[……설마 영애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거니?]
유스티아는 리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생긴 아들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선택한 내 아들이 절대 나를 실망시킬 리 없어.
유스티아는 리우리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요. 말씀대롭니다. 태자비에게 꽃을 선물했어요. 그런데 그걸 어머니께 이야기했다는 게 당황스럽네요.]
[……뭐라고?]
유스티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제 아들이 태자비에게 마음이 기울기라도 한 것인가. 정녕,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런 표정 하실 거 없어요. 어머니께 누차 말씀드렸잖아요. 캐롤라인 후작 세력의 환심을 사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리우리안이 퍽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 탓에 유스티아는 도통 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의 속내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녀에게 혼란을 안겨 준 리우리안은 답답하다는 듯 눈살만 찌푸릴 뿐이었다.
[하, 인정받는 황제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 중인데 어머니까지 절 믿어 주시지 못하니 정말 지치네요.]
리우리안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고스란히 유스티아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유스티아는 발작하듯 어깨를 떨며 단박에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어느덧 혼란의 기색은 완전히 가신 모습이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리우. 내가 왜 널 믿지 못하겠니. 다만 네가 전과 달리 렐리아는 멀리하고 태자비만 찾는 것 같으니 영애가 속이 상한 모양이더구나.]
[그렇다면 렐리아에게도 정말 실망이 크네요. 결국 렐리도 저를 믿지 못해 어머니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리우,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구나. 내가 괜한 말을 꺼낸 모양이야. 방금 전의 말은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어미와 차라도 한잔…….]
[아니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간 어머님의 마음까지 상하게 해 드릴 것 같아서요.]
늦게나마 아들의 마음을 달래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리우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스티아는 더욱이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하, 감히 후작가 영애 따위가 나와 리우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단 말이지.”
유스티아가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뇌까렸다. 도저히 렐리아가 용서되지 않았다. 유순하기만 하던 아들이 제게 냉정히 등을 보이게 하다니. 아무래도 조건 없는 사랑이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다.
“오늘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유스티아가 새빨간 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그 모습이 그토록 표독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렐리아가 도착한 건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서였다.
응접실에 도착한 렐리아는 애써 밝은 척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속내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폐하, 어찌 먼저 자리하고 계시어요. 도착하면 폐하께 말씀 올려 달라 부탁을 드렸을 것인데요.”
후작가에 돌아간 후에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건지, 렐리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밤새 울기라도 한 것 같았다.
원래라면 그 모습에 애틋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스티아에겐 그런 렐리아의 모습조차도 가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 전에 영애가 걸음을 더욱 서둘렀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네?”
“오겠다고 한 것이 벌써 두 시간도 더 전의 일인 것 같은데,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같구나.”
유스티아가 자비 없는 눈초리로 렐리아를 응시했다. 매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궁에 들어도 좋다는 폐하의 답을 받고 곧장 출발한 것인데…….”
렐리아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언제나 예쁨만 받을 줄 알던 영애가 이런 냉대를 겪게 될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유스티아는 적당히 봐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렐리아의 모습이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영애는 부지런히 날 보러 왔는데, 내가 괜한 트집이라도 잡는다는 말이니?”
“아, 아닙니다, 폐하. 괜한 트집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셔요.”
“영애의 말이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비꼬는 게 명백한 유스티아의 말과 동시에 응접실 안으로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렐리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당황하다 못해 잔뜩 겁에 질린 듯이 보였다.
그 모습을 관망하듯 지켜보고 있으려니 유스티아는 실소가 다 나올 것 같았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이 꼴을 보일 거면서 감히 제게 기어오를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폐하. 어떤 경우에도 감히 폐하를 기다리게 해 드려선 안 되는 것인데.”
렐리아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횡설수설 말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한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이전이었다면 안쓰러웠을 모습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스티아는 더 이상 렐리아가 예쁘지 않았다.
이 마음이 오늘에서 그칠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리우리안과 저 사이에서 간 크게 이간질한 렐리아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이제라도 영애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내게 보자고 한 거니?”
“……그냥, 폐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래? 내게 또 리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폐하…….”
계속되는 비아냥에 렐리아가 기어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럼에도 유스티아의 눈길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냉랭하게 날이 서 있었다.
렐리아는 숨 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언제나 제 편이던 황후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도통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달라지기 시작한 리우리안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왜 황후까지 제게 이런단 말인가.
당혹감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혹 제가 폐하께 실수한 게 있는지요. 그런 게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렐리아는 고개를 처박다시피 아래로 숙였다. 이마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취해 본 적 없는 자세에 굴욕감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따위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후의 신임을 잃어선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끝이 날 것 같았다. 당연히 제 것이라 생각했던 리우리안은 물론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던 미래의 황비 자리도 완전히 놓치게 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황후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차마 황후의 허락 없이 들 수 없어 여전히 처박고 있는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게 느껴졌지만, 렐리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견뎌야 했다. 원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선 어떻게든 참아 내야 했다.
기다리던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영애, 됐으니 이만 고개를 들거라.”
“아니어요, 폐하.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똑바로 뵐 수 있겠습니까.”
“그만하면 되었대도.”
유스티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와중에 다행이랄 게 있다면 냉담한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셨다는 사실이었다.
렐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스티아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앞으로는 리우가 하는 일에 영애는 그 어떤 참견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참견이라고 하신다면…….”
되묻는 렐리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 탓에 렐리아는 입꼬리에 힘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황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달게 듣는 척을 해야만 했다.
“영애, 리우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야. 그 애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일엔 언제나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란다. 그게 리우가 태자비를 찾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리우의 앞길에 영애, 네가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니?”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으세요. 다시는 그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유념하겠습니다.”
렐리아는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사리물었다.
결국 또 이벨리아였다. 빌어먹을 제국의 황태자비. 그녀가 이번에도 자신을 주저앉히기 위해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