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최악의 상황 (44/94)


44화. 최악의 상황
2023.07.14.


“각하.”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에드윅의 뒤로 불시에 인기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예상이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에드윅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래,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예. 생각보다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습니다.”

에드윅의 근처까지 다가온 레이튼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에드윅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많은 걸 기대하고 지시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 아이가 아직 후작령에 남아 있기는 한 것 같더냐.”

“……아닙니다. 영주민들도 칼리프란 자의 행방에 대해선 잘 모르는 듯하였습니다.”

레이튼의 말에 에드윅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무거운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자의 아비가 영지 내에서도 소문난 주정뱅이였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셨는데, 그때마다 아이에게 폭력을 가했다고 합니다.”

“…….”

“맨정신일 때도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했습니다. 늘 상처를 달고 다녔고, 잘 먹지도 못하는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서 인근에 사는 영지민들이 돌아가며 아이들 돌봐 주었던 모양입니다.”

“하아…….”

에드윅의 잇새로 고집스레 참고 있던 숨이 묵직하게 새어 나왔다. 레이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벨리아를 업고 왔던 남루한 소년이 선명해졌다.

제국의 황태자와 어디 하나 다르지 않게 생겼던 그 아이가.

에드윅이 절망스러운 낯빛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온통 새까매진 시야 위로 십수 년 전 보았던 심상찮은 장면이 떠올랐다.

황후가 긴 산고 끝에 황태자를 생산한 날이었다. 줄곧 황제궁 알현실에서 전전긍긍하던 황제를 황후궁으로 모셔다드린 이후 걸음을 돌리던 찰나, 에드윅은 똑똑히 보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천을 뒤집어쓴 수상한 자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가넷 공작의 모습을.

[어떻게 됐는가.]

[무사히 황궁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뒤탈 없이 깔끔하게 제거되어야 할 것이네.]

[단단히 일러뒀으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게 아닌 이상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변수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어떤 이유로도 일이 틀어져선 안 돼. 어떻게든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이네.]

[곧장 뒤따라가 직접 확인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복면을 쓴 남자가 공작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확실한 마무리를 약속했다. 그제야 공작이 안심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에드윅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이대로 공작을 마주해 봐야 곤란한 상황만 생길 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길만 한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황급히 그쪽을 향해 걸음을 떼는데, 불현듯 공작의 목소리가 다시금 에드윅을 발목을 붙잡았다.

[아, 그리고 입단속 똑바로 해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네는 물론 이번 일과 관련된 자네의 수족 모두 오늘 보았던 쌍생아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야 할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쌍생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드윅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지고, 묵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골이 얼얼했다.

그런 와중에도 공작의 발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에드윅은 서둘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딘가로 향하는 공작의 걸음엔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다행히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에드윅은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뒤늦게 공작과 마주하고 있던 복면 쓴 사내의 존재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 역시 소리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후우.”

그날의 기억을 되새겼을 뿐인데, 에드윅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더욱이 진하게 밀려오는 두통에 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순간 핑 도는 어지럼증에 창틀을 짚은 그가 레이튼을 향해 재차 물었다.

“전달할 내용은 그게 전부인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야기하게.”

“칼리프란 자의 아비인 드윗 자작이 습관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

에드윅이 거침없이 물었다. 하지만 창틀을 짚은 그의 손은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던 레이튼이 묵직한 한숨과 함께 입술을 움직였다.

“집안이 몰락한 게 다 그 아이 때문이라고…… 돈 몇 푼 챙기려다가 재수 없는 애를 떠맡게 됐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어진 레이튼의 말에 에드윅의 몸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곁에 서 있던 레이튼이 기다렸다는 듯 후작을 부축했지만, 그는 고집스레 손길을 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아니길 바라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

다음 날 정오.

이벨리아는 창틀 앞에 서서 인상을 쓴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진짜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에 낯익은 햄스터 한 마리가 비쳤다. 이젠 이 햄스터가 그냥 햄스터가 아닌 펠릭스란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왜 매번 짧은 다리로 그루밍을 하며 귀여운 척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젠 하나도 안 귀엽거든요? 그만하고 나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면 빨리 보고 가요.”

이벨리아는 새침하게 등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펠릭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지 않은 티를 너무 대놓고 내는 거 아니야?”

그가 퍽 불퉁스럽게 투덜거렸다.

“안 반가워요. 이러다 또 전하께서 오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난. 황태자궁을 지키나 여기에 있다 리우리안에게 들키나, 어차피 녀석은 날 가만두지 않으려고 할걸?”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저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이벨리아는 테이블 쪽으로 향하던 걸음도 멈추곤 불만스럽게 펠릭스를 보았다.

“그건 펠릭스의 입장이잖아요. 난 아니에요. 펠릭스가 받는 그런 대우를 받고 싶지도, 전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무척 단호한 태도였다. 그 탓에 멋쩍어진 건 펠릭스였다.

“이거야, 원. 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디 살 수나 있겠나.”

“펠릭스!”

“알았어, 알았다고. 네 말이 맞아. 이벨리아,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그럼 얼른 물어보고 돌아가요.”

이벨리아가 미간까지 좁히곤 제 뜻을 확실히 표현했다. 무안해진 펠릭스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곤 그녀의 뒤를 따라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마주 보고 앉자 경계하는 듯한 이벨리아의 표정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당최 이렇게까지 할 건 또 무엇인지. 괜한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대 말처럼 본론만 하고 갈 테니까 그 표정 좀 어떻게 해 보지 그래? 누가 보면 내가 그대한테 해코지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런 불평불만 대신 바로 본론을 꺼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쳇, 틈을 안 주는구만. 딱 그 황태자에 그 황태자비야.”

“펠릭스, 본론만 하라는 말, 더 해야 해요?”

“알겠어.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혹시 말이야.”

“네.”

“혹시 어렸을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거나…….”

말을 잇던 펠릭스의 눈동자가 일순 아연하게 흔들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 때문이었다. 책등에 적힌 ‘트리탄’ 세 글자가 무척 익숙했다.

이벨리아가 트리탄에 대한 책은 왜…….

생각에 잠겼던 펠릭스가 곧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 순진한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펠릭스?”

“…….”

“펠릭스!”

“아.”

넋을 놓았던 펠릭스가 짧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곤 다시금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어느덧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패 있었다.

정신을 잡기 위해 눈을 빠르게 끔벅이던 그가 의미 없이 벌어져 있던 입술을 재차 달싹였다.

“아,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어렸을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나 그런 게 없었냐고. 응, 그게 묻고 싶었어.”

가까스로 질문을 건넨 펠릭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미 멸망해 사라진 왕국에 대해 이벨리아가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퍽 이상했다.

쓸데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 의미 없이 보고 있던 게 분명했다.

펠릭스는 흐리멍덩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갑자기 내 어렸을 적 얘기는 왜 물어요?”

“그냥, 궁금해서.”

“별게 다 궁금하네요, 정말.”

이벨리아가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펠릭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었다.

“없어요, 그런 거. 그냥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법한 평범한 유년 시절이었어요.”

“잘 생각해 봐. 정말 별다른 일 같은 건 없었어?”

“글쎄요.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게 없어요. 어릴 땐 몸이 약해서 자주 아팠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요양차 영지에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군.”

“요양이요?”

반쯤 넋을 놓은 채 대화를 이어 가던 펠릭스가 일순 눈에 힘을 주었다. 실수였다. 이벨리아가 요양차 영지에 있었다는 건 칼리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아, 미안. 말이 헛나왔어.”

펠릭스는 태연한 척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다행히 이벨리아는 별 의심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가만.

본능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 펠릭스가 다시금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몸이 안 좋았다면서 요양을 가거나 그런 적은 없던 거야?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았던 건 아닌가?”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칼리프에게 듣기론 허약한 이벨리아가 요양차 캐롤라인 후작령에 오면서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벨리아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요양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약했던 건 맞는데, 영지로 요양을 가진 않았어요. 그때도 아버지께선 황제 폐하의 보좌관으로 계셨던지라 영지로 가게 되면 저만 보내야 하는데, 차마 걱정이 돼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래?”

“네. 근데 전 혼자라도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쉬고 싶었던 것 같긴 해요.”

“……왜?”

“꿈을 되게 자주 꿨거든요.”

“꿈?”

“네.”

이벨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그런 이벨리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부에 있는 영지에서 즐겁게 지내는 꿈을 되게 자주 꿨어요.”

분명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임이 분명한데, 칼리프의 기억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였다.
 

16893378286291.jpg

1689337828630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