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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그녀가 선택한 답 (33/94)


  • 33화. 그녀가 선택한 답
    2023.07.03.


    “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식이 적막 가득한 응접실을 웅웅 울렸다.

    이벨리아는 벌게진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호흡이 탁 막힐 때마다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지만, 그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온몸이 둥둥 울릴 정도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열기 어린 숨결이 아스라하게 쏟아졌다. 그게 그렇지 않아도 당황한 그녀를 더욱 미치게 했다.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머리로는 어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를 밀어낼 수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에게 붙잡힌 팔목이 뜨겁게 타다 못해 재가 될 것만 같았다.

    맥박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급기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팔목에 붙어 있던 불씨가 심장으로 옮겨 간 것만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은 메케한 연기를 타고 전신을 가득 채웠다. 더는 숨을 쉬는 게 곤욕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벨리아는 힘겹게 한 걸음 물러났다. 고작 한 걸음만큼 생긴 간격 사이로 여전히 그에게 붙들린 팔목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벨리아는 그 위에서 쉬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시선을 인식한 그가 팔목을 놓으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전에 없이 당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 실수했군.”

    “…….”

    “아직 전장에 있었을 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땐 살기 위해서 곁에 접근하는 자들은 전부 없애야 했으니까.”

    횡설수설 변명하는 게 전혀 그답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시선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싫었던 게 아닌데. 그냥, 그냥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가슴이 떨렸던 것뿐인데.

    이벨리아는 문득 며칠 전, 승전 파티가 끝나고 그와 함께 태자비궁으로 향하던 길목이 떠올랐다.

    [전하, 송구한 말씀이지만 제게 다시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극히 충동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연회장에서 그와 보낸 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파티가 끝난 후 그와 나란히 걸었던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그를 빌려준 것뿐이라던 렐리아의 무례한 언행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면서도 그와의 시간은 가슴 벅차도록 설레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냈다.

    [제가 전하의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질 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전하의 이야기는 그때 제게 해 주세요.]

    […….]

    [그때까진 전하와 딱 오늘처럼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렐리아가 그토록 제 앞에서 당당할 수 있던 건 리우리안과 저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정치적인 명분 때문이었다. 그녀가 친히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1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온 그가 느닷없이 제게 호감을 보이고 사랑해 보려고 한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그럼에도 쉬이 좁혀질 수 없는 게 저와 리우리안의 관계였다.

    그가 황후의 아들로 그 세력들을 발아래 두고 있고, 자신이 캐롤라인 후작가의 딸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더욱이 충동적으로 굴고 말았다. 조금만 더 즐기고 싶었다. 조금만 더 행복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아주 잠깐이라고 해도 좋으니 그와 함께하는 순간을 연장하고 싶었다.

    결국엔 그와 저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정치적인 명분 때문에 다시 남보다 못한 사이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아주 잠깐은 충동적이어도 되는 것 아니겠냐고 끊임없이 합리화했다.

    그런데 이벨리아는 이 순간 그날의 선택이 아주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

    “…….”

    조금 전까지 리우리안의 손이 닿았던 자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가 팔을 놓아주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부 위엔 홧홧한 열감이 남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커다란 손 모양이 낙인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왠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픈데, 그것마저도 행복했다. 그를 추억할 수 있는 흔적이 생긴 것 같아서.

    “얼마 전에 듣기론 태자비궁 정원에 꽃이 활짝 피었대요, 전하.”

    “…….”

    “마침 날씨도 산책하기에 딱 좋은 것 같은데, 저와 함께 걷지 않으시겠어요?”

    이벨리아는 이번에도 충동적일지 모를 제안을 건넸다. 아무래도 좋았다. 시간이 흘러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을 때, 오늘이 사무치게 후회가 된다고 해도, 그래도 이벨리아는 오늘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지금 이 순간 이벨리아가 선택한 답이었다.

    ***

    이벨리아는 손을 공손히 모아 잡곤 사뿐사뿐 걸음을 내디뎠다. 리우리안과 걷는 길목을 따라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개한 채 줄지어 이어졌다. 그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까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거기에 제 곁에 나란히 서 있는 리우리안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완벽한 장면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리우리안의 표정만 뺀다면.

    “전하, 아직도 기분이 많이 안 좋으세요?”

    이벨리아는 조심스레 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곧장 그녀를 향해 시선을 내린 그는 말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어깨 위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차라리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그래.”

    -그랬다간 너한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너라면 그렇게 하겠어?

    “그럼 네 발로 직접 걷기라도 하든가.”

    -아까 이벨리아의 응접실에서 나를 밟아 죽일 것처럼 달려들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가장 안전한 자리는 여기인 것 같아서 말이야.

    펠릭스가 살의 넘치는 리우리안의 태도에 이벨리아의 목덜미에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이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았다.

    이벨리아는 어색하게 입매를 휘어 올렸다. 이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다. 리우리안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내도록 숨죽이고 있던 펠릭스가 부득불 따라나서겠다고 우겼다. 데이트에까지 불청객이 끼어들다니, 그녀로서도 계산하지 못한 일이었다.

    리우리안이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햄스터로 변한 펠릭스의 움직임은 날렵했고, 리우리안이 잡으려고 할 때마다 이벨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따라 도망 다녔다.

    작정하고 펠릭스를 잡자니 자칫하다 이벨리아를 덮치듯 넘어질 것 같았다. 고집을 꺾지 않는 펠릭스에 이벨리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결국 리우리안의 마지못한 허락으로 세 사람의 불편한 산책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이분이 정말 전하의 친우가 맞으셨군요.”

    리우리안과 펠릭스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던 이벨리아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리우리안에게 친우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은근히 펠릭스의 말을 불신하고 있었는데,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나니 더는 의심할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일까. 리우리안이 미간을 팍 구긴 채 짧게 되물었다.

    “친우? 설마 저자와 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에요? 저번에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이벨리아가 난감한 얼굴로 제 어깨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제 목덜미에 완전히 붙어 선 펠릭스가 의도적으로 리우리안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지?”

    “펠릭스와 저 말씀이세요?”

    “빌어먹을 그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군.”

    “아…….”

    질문이 향한 건 이벨리아였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시선이 향한 건 펠릭스였다. 도대체 어느 틈에 이벨리아에게 접근을 한 것인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벨리아가 퍽 순진하게도 대답을 해 왔다.

    “알고 지냈다기보다는 딱 한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어요.”

    “정확히 어쩌다가?”

    “아, 햄스터 모습을 한 펠릭스의 목소리를 제가 듣게 됐거든요.”

    “어디서 펠릭스를 마주친 거지?”

    “그건 제 침실에서…….”

    “뭐? 침실이라고?”

    순간 발끈한 칼리프가 이벨리아 어깨 위의 쥐새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눈길이 어찌나 흉포한지 이벨리아는 저가 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러다간 그나마 아슬아슬 유지하고 있던 분위기도 깨질 것 같았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적당한 말을 고민하던 이벨리아는 문득 펠릭스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어떻게 햄스터로 변할 수 있는 건지, 정말 마법을 부리는 건지에 대해 말이다. 어쩐지 그 답을 리우리안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펠릭스는 마법사인가요? 책에 적혀 있기론 마법사는 고대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마법이 아니고서야 지금 이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이벨리아가 아이 같은 얼굴로 리우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그는 어려운 문제를 직면한 것처럼 머리가 아파 왔다.

    펠릭스에 대해 설명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전장 중에 우연히 찾은 동굴에서 갑자기 나타난, 스스로를 ‘이 땅의 신’이라 일컫는 자였다.

    물론 그는 펠릭스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몇 가지 이능을 부리는 걸 직접 목격하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곤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그냥 조잡한 능력 몇 가지를 가진 자야.”

    -뭐? 조잡한 능력?

    이벨리아에게 바짝 붙어 숨죽이고 있던 펠릭스가 고개를 번쩍 쳐들곤 발끈했다.

    -설마 내내 나를 두고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펠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탓에 또 난감해진 건 이벨리아였다. 하지만 정작 펠릭스를 충격에 몰아넣은 당사자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보지 그래. 넌 마법사인가? 이벨리아의 말대로 이제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 존재야?”

    매섭게 날이 선 적안이 펠릭스를 직시했다. 마치 이벨리아를 눈속임하기 위해 그렇다고 대답하면 당장에 ‘이제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 것 같은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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