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황후의 아킬레스건
(28/94)
28화. 황후의 아킬레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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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황후의 아킬레스건
2023.06.28.
점심 무렵.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놀튼가로 보냈던 초대장에 백작 영애가 직접 태자비궁을 찾았다.
이벨리아는 놀란 얼굴로 놀튼 영애를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영애, 나는 분명 언제든 영애가 편한 시간을 답장에 적어 보내 달라고 한 것 같은데……. 혹시 혼란이 될 만한 내용이 있었던가요?”
“아니요, 전하. 편지엔 전하의 말씀대로 제가 태자비궁을 찾을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여쭤보시는 내용만 담겨 있었어요.”
“그런데 어찌…….”
이벨리아는 놀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바로 답장만 받아 보아도 기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침 오늘 어떤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아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마침 누군가 답장 대신 직접 전하를 찾아뵈면 크게 기뻐하실 거라고 조언을 해 주기도 했고요.”
“조언이라고요?”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놀튼 영애의 뒤에 선 페일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본인이 조언자였음을 인정하는 의미였다.
“혹 갑작스러운 제 방문이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어 드렸나요?”
“그럴 리가요. 이렇게 와 줘서 반가울 뿐이에요.”
이벨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놀튼 영애의 손을 감싸 잡았다.
“영애만 괜찮다면 응접실에 가서 함께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전하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디든 영광일 따름이에요.”
흔쾌한 대답에 이벨리아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곤 페일린을 향해 명을 내렸다.
“페일린, 디저트와 차를 준비해 주겠니?”
“물론이에요, 전하. 바로 준비해 올릴 테니, 두 분께서는 천천히 응접실로 오시어요.”
페일린은 기쁜 마음으로 걸음을 돌렸다.
황태자비 책봉 이후, 처음으로 태자비궁에 웃음꽃이 만연히 피어오른 날이었다.
***
칼리프는 소화 중이던 일정을 끝으로 급히 황후궁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갑자기 소식을 전해 온 황후 때문이었다.
자신을 찾는 이유야 뻔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라 당혹스럽진 않았으나, 황후의 낯을 봐야 한다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마음과 달리 황후궁에 도착하기까진 금방이었다. 앞을 지키고 있던 황후의 시녀장이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 오셨습니까.”
“어머님께서 심한 두통을 앓고 계신다더군.”
“예? 그, 그것이…….”
시녀장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눈알을 이리저리로 굴렸다. 두통이 핑계일 줄은 알았지만, 고작 어제의 일로 거짓말까지 해서 자신을 찾다니. 황후의 대단한 자존심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적당한 대답을 고르는 듯 보였던 시녀장이 결국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하곤 그의 걸음만을 재촉했다.
칼리프는 기꺼이 궁 안으로 걸음을 디뎠다. 서둘러 황후의 침실로 들어서자 침대 위로 불룩한 실루엣이 보였다. 제대로 연기를 할 참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보지도 않았다.
그게 퍽 어이가 없었지만, 칼리프는 기꺼이 리우리안의 탈을 쓰곤 황후의 앞에 섰다.
“어머니.”
“왔구나, 리우.”
억지로 꾸며 낸 목소리가 귓구멍 가득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그게 못내 거북했지만, 칼리프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심한 두통을 앓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그게 두통이 된 모양이야.”
“많이 불편하신 거라면 서둘러 황궁의를 데려오라 이르겠습니다.”
칼리프는 그녀를 걱정하는 척 완벽한 매뉴얼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리기라도 한 건지 유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부여잡더니, 한숨과 함께 칼리프를 바라보았다.
“리우.”
“예, 어머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유스티아가 제법 나긋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곤조곤한 투였다. 하지만 칼리프는 알고 있었다. 그것까지도 황후의 연기일 뿐이라는 걸.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선 이미 상의드린 일이지 않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칼리프는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의 의도에 대해서라면 이미 진작 파악이 끝났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변명을 하는 건 오히려 황후의 의심만 더 살 게 분명했다.
짐작이 맞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행동에 황후의 눈매가 좁아졌다.
“리우, 분명히 지난번에 내게 이야기할 땐 태자비와 함께 참석하겠다고만 하지 않았니?”
“그래서 어제 태자비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인지요. 분명 어머님께서도 동의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리프는 황후를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가능한 한 황후의 눈에 멍청하게 비쳐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태자비와 참석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까지 허락한 적은 없다. 더욱이 렐리아도 있는 자리에서 몬트롤 백작의 비매품이라고 공공연히 알려진 그 목걸이를 태자비에게 선물해 나타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란 말이야!”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유스티아가 결국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역정을 냈다. 칼리프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는 유스티아 음색의 톤이 최고조로 올라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움찔 떨었다. 유스티아의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지극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실수를 인지하곤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기 위해 안면 가득 힘을 줘 보지만, 도리어 점점 더 기괴해져만 갔다.
결국 유스티아는 한숨을 묵직하게 내쉬었다.
“하, 리우. 그러니까 어미의 말은…….”
“아버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어머니의 눈엔 그렇게 비쳤을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칼리프는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그러자 유스티아가 밤새 심한 두통을 앓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무력하게 처박힌 아들의 머리통을 품에 안고 어깨를 다독이며 두드렸다.
“오, 리우.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다만, 다만 이 어미는…….”
“캐롤라인 후작 세력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태자비를 완벽하게 꾸며 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유스티아는 아들을 제 품에서 떼어 내곤 볼을 감싸 잡아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하게 헤매는 아들의 새빨간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황태자에게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불운의 황태자비라고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
“함께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의아하게 생각은 할 테지만, 확실한 한 방이 있어야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초석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칼리프는 미리 준비해 놓은 핑계를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함께 토해 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나 유스티아가 진심을 읽어 낼 경우를 대비해 최대한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리우, 네게 그런 뜻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 그저 파티의 주인공은 너인데, 모두가 태자비에게 집중하는 것 같아 못내 속이 상하더구나. 더욱이 렐리아도 있는 자리였잖니. 영애까지 내게 와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니, 이 어미의 마음이 더욱 편할 수가 없었어.”
유스티아는 아들의 손을 꽉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제의 일로 화가 났었단 사실 같은 건 까맣게 잊은 모습이었다.
칼리프는 연기를 이어 가면서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유스티아에게 리우리안이 아킬레스건과 같은 존재라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꼼짝 못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아들을 사랑했구나. 너무도 맹목적인 사랑에 리우리안은 머저리가 될 수밖에 없었겠구나. 그런데, 그런데 왜…….
칼리프는 머릿속에 피어오른 달갑지 않은 의문에 어금니를 꽉 물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정에나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럴 가치도 없는 문제가 원인이라면 더군다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안개 걷힌 또렷한 적안이 잠깐이지만 위험한 예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감추곤 다시금 리우리안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유스티아를 마주 보았다.
“어머니.”
“그래, 리우.”
“저는 꼭 아버님의 뒤를 잇는 훌륭한 황제가 될 겁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꼭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리우…….”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을 훌륭한 황제가 돼서 그런 제 모습을 어머니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칼리프는 준비했던 마지막 말을 매끄럽게 내뱉는 거로 황후궁에서의 계획을 실수 없이 완수해 냈다.
리우리안을 지극히 생각하는 유스티아의 태도에 잠시 감정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유스티아에게서 다른 낌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제 아들의 몇 마디 말만으로도 무척 흡족한 듯 보였다.
그것까지도 못내 우스워 비웃음이 다 날 것 같았지만, 칼리프는 악착같이 참아 냈다.
모든 걸 다 밝힐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분명 이런 엿 같은 기분조차도 더는 참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날을 위해 지금의 이 감정은 아껴 두고 싶었다.
부디 황후를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그날이 가능한 한 빨리 오길 바라며.
***
“어젠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다음을 기약해서 너무 미안했어요, 영애. 많이 당혹스러웠을 텐데 이해해 줘서 너무 고마웠고요.”
이벨리아는 페일린이 준비해 준 향긋한 차를 놀튼 영애에게 권하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놀튼 영애는 찻잔을 막 손에 쥐었다는 것도 잊고 서둘러 고개부터 내저었다.
“아니에요, 전하. 전 아무렇지 않으니 개의치 마셔요.”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예의가 아닌데, 어제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어요.”
“이해해요. 아무래도, 그분 때문에 그러셨던 거죠?”
“그분이요?”
너무 포괄적인 표현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놀튼 영애가 언뜻 곤란한 기색을 하면서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넷트 후작가의 렐리아 영애님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