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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고고한 품격 (25/94)


  • 25화. 고고한 품격
    2023.06.25.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금세 이벨리아의 앞까지 다가온 렐리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소한 행동에서조차 불쾌한 가식이 느껴졌다.

    이벨리아는 황태자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인사치레 대신 무심하게 대꾸했다.

    “영애로군요.”

    “진작 인사드리고 싶었지만, 황태자 전하와 함께 바쁘신 듯 보여 이제야 인사 올리는 걸 용서하시어요.”

    렐리아가 애처로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영애 때문에 불편했던 적은 잠깐도 없으니 염려 마세요.”

    우아한 음성이 개의치 말란 말을 훌륭하게도 돌려 말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그녀의 품위가 선명히 드러났다.

    렐리아는 티 나지 않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이벨리아가 너무도 싫었다. 그 누구라도 절망할 법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황태자비로서의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하지도 않았다.

    태생부터 기품이 몸에 밴 듯 그녀는 매 순간 흔들림 없이 정도를 지켰다.

    그런 그녀를 망가트리고 싶었다. 그녀 등 뒤의 날개를 꺾어 제 발밑에 주저앉히고 싶었다. 가능한 한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말이다.

    그 충동은 오늘따라 극에 달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영애께서 그렇게 말해 주니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이렇게까지 화려하신 전하는 처음이라, 입장하실 때 다른 분인 줄 착각까지 했답니다.”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입장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이 있었나요?”

    “황태자 전하와 나란히 입장하시는 모습도 처음 뵙다 보니 더 낯설었던 것이지요.”

    해맑은 목소리에 담긴 가시가 이벨리아의 마음에 가차 없이 생채기를 내었다.

    이벨리아는 잠깐이지만 경직된 눈으로 렐리아를 보았다. 무려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관계에 대한 망발을 뱉어 놓고도 그녀는 어떤 문제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약이 오르기는커녕 웃음만 나왔다. 아무래도 이번 파티에서 리우리안의 옆자리를 뺏긴 게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영애의 말도 틀리지 않네요. 나를 몰라봤을 수도 있겠군요.”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뜻 렐리아의 말을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벨리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보다 알아보는 이가 훨씬 많아 이토록 과분한 환영을 받았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지요.”

    말끝에 이벨리아가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완벽한 승자의 모습이었다. 당연한 이치로 패자가 된 렐리아는 부글부글 끓는 분을 삭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듯 환하게 웃는 저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제 것을 잠시 빌려줬을 뿐인데, 그녀에게 전부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목걸이가 너무 예쁘네요. 이렇게까지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신 전하의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아요. 사치품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런가요? 너무 과해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영애가 그렇게 말해 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분명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바라던 반응은 티끌만큼도 돌아오지 않았다.

    렐리아 안의 파괴 본능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아무래도 오늘은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았다. 태자비 얼굴에서 가증스러운 미소가 걷히고 구슬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꼴을 말이다.

    “워낙 아름다운 전하이시니, 무엇인들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하.”

    “…….”

    “문득 우려되는 것이 있어 그러하온데,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감히 짧은 사견을 말씀드려 봐도 될까요?”

    일순 렐리아의 동공에 독기가 감돌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벨리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렐리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필 황태자 전하와 처음으로 나란히 입장하신 날, 다른 때와는 다르게 이토록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계시니 자칫 전하께서 황태가 전하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미인계를 뽐내는 것처럼 비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요.”

    말을 마친 렐리아가 순진한 낯으로 쭈뼛거렸다. 그러면서도 이벨리아의 반응은 놓치지 않고 살폈다.

    분하게도 어떤 표정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모여 있던 이벨리아의 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구부러졌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것만으로 렐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태자비의 자존심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이 간 것이리라.

    직전까지와는 달리 쉽게 돌아오지 않는 대답만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머, 전하. 제가 괜한 말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어요. 저는 그저 전하가 그런 식으로 비칠까 염려가 되어 말씀드린 것인데…….”

    렐리아가 울상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엇 하나 가식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벨리아는 그런 렐리아를 빤히 응시하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렐리아를 상대한 모양이었다. 이런 쓸데없는 말까지 듣게 된 걸 보니.

    “혹시나 제가 실수를 한 것이라면 넓으신 아량으로 부디…….”

    “아닙니다. 영애의 진심 어린 충고는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지요.”

    이벨리아는 허리를 곧게 펴곤 렐리아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끝까지 들어 봐야 질투에 눈이 먼 렐리아의 추악한 본성만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가치 없이 시간을 버리는 건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했다. 더는 의미도 없는 렐리아의 말씨름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영애, 내게 더 해야 할 말이 있나요?”

    “네?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이만 자리를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이벨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었다. 걸음을 떼기 쉽게 매무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렐리아는 서둘러 그녀의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다가갔다. 쌓인 분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이대로 이벨리아를 보낼 순 없었다.

    “전하, 혹여 제가 드린 말씀 때문에 심기가 상하셨는지요.”

    “아닙니다. 영애의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충고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 벌써 저와의 자리를 끝내려고 하셔요. 저는 오랜만에 전하와 나누는 대화가 즐겁기 그지없는데, 전하께선 그렇지 않으신 건가요?”

    렐리아가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렸다. 예전 리우리안에게 귀여움받던 행동 중 하나였다.

    이벨리아 역시 렐리아를 볼 때마다 제겐 없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져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렐리아의 순진한 얼굴 위엔 악랄한 심술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기괴함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이지 않습니까. 저들 중 영애에 대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터인데, 혹여 영애의 입장이 난처해지지는 않을까 염려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렐리아의 눈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태자비의 얼굴이 청아하게 빛이 났다.

    언제나 렐리아를 약 오르게 만들던, 그 얼굴이었다.

    “하필 전하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참석한 파티가 아닙니까. 그 자체만으로 이미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에게 흥미로운 대화거리를 던져 준 셈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영애와 내가 필요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까지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

    “그들의 흥미를 더욱 자극하는 꼴밖에 안 되지 않겠습니까.”

    렐리아의 입술이 아연하게 벌어졌다. 제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주변의 시선을 염려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앞에서 잘난 척하는 꼴이 못 견디게 얄미웠다. 황태자비 타이틀만 아니라면 그녀나 저나 같은 후작 집안의 영애일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저와 대단한 격차라도 있는 것처럼 굴다니, 할 수만 있다면 저 고고한 자존심을 있는 힘껏 짓밟아 주고 싶었다.

    “영애의 표정을 보니 충분한 설명이 된 모양이군요.”

    이벨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곤 곧바로 렐리아 옆을 지나쳐 걸었다. 이 넓은 연회장 안에서 조용히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이 되었지만, 우선은 렐리아의 곁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렐리아와의 거리가 제법 벌어졌을 때였다.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가 이벨리아의 등 뒤로 내리꽂혔다.

    “오늘 하루뿐입니다.”

    이벨리아는 급히 떼던 걸음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렐리아의 뒷모습이 눈동자에 선명히 박혔다.

    이벨리아는 의아하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를 빌려드리는 것 말입니다.”

    내도록 담담하던 이벨리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쯤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은 표현이었다.

    “많이 흥분한 것 같군요, 영애.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

    이벨리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렐리아를 저지했다. 그러자 줄곧 등만 보이던 렐리아가 천천히 뒤로 돌아 이벨리아에게 걸어왔다.

    한 발짝, 한 발짝. 마침내 걸음이 멈추고 눈이 오롯하게 마주쳤을 때, 이벨리아는 드레스를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처럼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와 황태자 전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요.”

    렐리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꼭 미쳐 날뛰기 직전의 광견처럼 보였다.

    이벨리아는 순간적으로 몰려온 긴장감에 본능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렐리아의 상태를 보아하니 괜히 자극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방자하게 구는 렐리아를 그냥 둘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곧 당황한 표정을 말끔히 지우곤 렐리아를 빈틈없이 응시했다.

    “그러니 영애는 더더욱 모든 언행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지요. 영애와 전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영애의 행동은 곧 전하의 안목이 될 테니 말이에요.”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벨리아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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