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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예상치 못한 제안 (24/94)


  • 24화. 예상치 못한 제안
    2023.06.24.


    “아무래도 그대는 이만 쉬는 게 좋겠어.”

    리우리안은 태자비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이벨리아를 앉히며 걱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벨리아가 단박에 도리질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더 전하와 함께할 수 있어요.”

    “신발 때문에 발이 불편한 거 아니었나?”

    리우리안이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예리한 지적이었다.

    이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한참 전부터 발이 불편했다. 드레스에 맞춰 착용한 신발이 말썽이었다.

    처음 신어 길이 들지 않은 뻣뻣한 가죽에 여린 살갗이 그대로 벗겨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이벨리아가 아연하게 물었다. 놀란 얼굴이 꼭 토끼를 닮아 있었다. 그게 퍽 귀여워서, 리우리안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한 번씩 내 팔을 꽉 붙잡더군. 그때마다 발이 불편했던 거겠지.”

    이벨리아가 말없이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자신이 그랬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랬다고 해도 여전히 놀라웠다.

    팔을 꽉 붙잡은 거로 발이 불편한 걸 눈치채다니, 대단한 관찰력이었다.

    “좀 쉬고 있어. 어차피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중요한 인사들과는 대부분 인사를 나눴으니, 지금부턴 나 혼자 해도 괜찮아.”

    “그래도…….”

    “그대가 팔을 붙들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꼴을 봐야 말을 들을 건가?”

    리우리안이 단호한 제지를 퍽 다정하게도 말했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럼 조금만 쉬고 있을게요. 괜찮아지고 나서 전하께 가는 건 괜찮죠?”

    “물론이지. 하지만 정말 괜찮아지고 난 후여야 할 거야.”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리우리안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등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걸음을 멈춰 선 그가 연회장을 휘 둘러보았다. 행선지를 결정한 건지 곧 다시 뗀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이벨리아는 그 뒷모습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제국을 이끄는 재상들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근사해 보였다.

    그런 그가 직전까지 제 곁을 지켰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자꾸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냥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전하.”

    이벨리아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지척으로 다가온 건 에드윅 캐롤라인, 그녀의 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뵙는 전하인데, 파티가 끝날 때까지 인사도 못 드리는 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에드윅은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피워 올리며 오랜만에 만나는 딸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아니었다. 부친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죄송해요, 아버님. 아버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는데, 제가 생각이 짧아 먼저 인사드리지 못 했어요.”

    “아닙니다. 이렇게 뵈었으니, 그거로 된 것이지요.”

    에드윅은 개의치 말라는 듯 딸의 손을 포근하게 잡아 주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에드윅을 따라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겝니까?”

    “무슨 일이라니요?”

    “입장이 늦어지신다 싶었는데, 황태자 전하와 함께 나타나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에드윅의 말에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하듯 허공을 맴돌았다.

    무어라 답을 돌려줘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저조차도 갑작스레 겪게 된 상황이 아니던가. 그녀는 잠시 고민 끝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비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건 아니시겠지요?”

    “그런 건 절대 아니니 걱정 내려놓으셔요.”

    이벨리아는 근심으로 가득한 부친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국혼 이후 단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부친이었다.

    추후 리우리안과 나눌 대화의 방향이 어찌 될지 장담할 순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더는 부친에게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늙은이의 기우일 뿐이라면 다행인 일이지요. 전하께서 친히 괜찮다고 하셔서 그런지 입궁하신 이래로 오늘이 가장 밝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에드윅의 근심은 진심 어린 딸의 웃음 앞에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만에 아버님을 뵙는 것인데, 제가 어찌 밝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가끔은 태자비궁도 찾아 주시어요.”

    “……자식을 향한 아비의 그리움이 전하께 화가 될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지요.”

    에드윅이 애타는 마음을 에둘러 전해 왔다. 그런 부친의 마음에 대해서라면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더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나마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그게 왜 이렇게도 어려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벨리아의 안색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에드윅이 어색하게 한 톤 높인 목소리로 이벨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 소개하고 싶은 영애가 있습니다. 그 영애라면 분명 아비를 대신해 전하의 적적함을 달래 줄 수 있을 겝니다.”

    “적적함을 달래 줄 수 있는 영애라면…… 친우를 만들어 주고 싶으시단 말씀이신가요?”

    이벨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놀튼 백작가의 여식입니다. 듣기로는 전하께 무척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놀튼 백작을 통해 전하와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었답니다.”

    “저와, 자리를요?”

    이벨리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친이 소개해 주는 영애라면 그 의도가 불순하진 않겠지만, 썩 이해가 되진 않았다.

    이벨리아 캐롤라인이 황궁의 허울뿐인 황태자비라는 건 귀족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누가 그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의심은 금세 허물어졌다.

    “마침 저기 있군요.”

    주변을 살피던 에드윅이 밝아진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벨리아는 부친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단정한 차림의 영애가 보였다.

    부친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놀튼 영애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영애를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하지요.”

    “아…….”

    부친의 다정한 제안에 이벨리아는 짧은 침음만을 흘렸다. 친우가 생기는 게 싫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아버님께서 소개해 주시는 영애라니, 분명 성품이 훌륭한 분이겠지요. 아버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해 주신 자리이니 기쁘게 응하고 싶어요.”

    이벨리아는 잠시 고민 끝에 제 어색함보다는 부친의 마음을 먼저 살피기로 했다. 누구보다 제 처지에 대해 잘 아는 부친이었다. 그러니 제게 누군가를 소개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진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이 뒤따랐을 터였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아비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군요.”

    에드윅은 지금까지 중 가장 환한 얼굴로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지체 없이 놀튼 영애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짧게 인사를 주고받는 듯하던 두 사람은 금세 이벨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태자비 전하, 처음 인사드립니다. 놀튼 백작가의 여식, 디아나 놀튼입니다.”

    “반가워요, 놀튼 영애. 뜻깊은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 나눌 수 있어 무척 기쁘네요.”

    이벨리아는 해사한 미소로 화답하며 디아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디아나가 무척 기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뵙게 되어 너무 영광이에요, 전하.”

    “나 역시 그렇습니다. 아버님께 듣기로는 영애가 나와의 자리를 무척 갖…….”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가던 이벨리아가 순간 달싹이던 입술을 멈추곤 디아나의 뒤를 바라보았다.

    달갑지 않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습관처럼 몸이 경직되었다.

    “전하?”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디아나가 조심스레 이벨리아를 채근했다. 그럼에도 대답이 없던 이벨리아는 얼마쯤 더 지나고 나서야 자못 당혹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버님께 듣기론 놀튼 영애가 나와의 자리를 무척 갖고 싶어 했다고 하시더군요.”

    “네, 맞아요. 전하와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아 저희 아버지를 통해 후작님께 부탁을 드렸답니다.”

    “그렇게까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니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이를 어쩌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자리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대신 빠른 시일 내에 영애를 태자비궁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태, 태자비궁으로요? 물론입니다! 저는 너무 좋아요, 전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디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리아는 그런 디아나를 보며 예의상 미소를 한번 보이곤 다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조만간 놀튼 백작가로 초대장을 보낼게요. 그럼 남은 파티도 부디 기쁘게 즐겨 주시기를.”

    이벨리아는 디아나를 향해 형식적인 인사말을 남기곤 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부친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급한 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렐리아였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것 같았다. 필시 신경전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 모습을 부친에게 보일 순 없었다.

    이벨리아는 최대한 부친과 멀리 떨어진 자리로 황급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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