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현명한 어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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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현명한 어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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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현명한 어미라면
2023.06.23.
“전하, 영광스러운 귀환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제국 최고의 기사로 인정받는 경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군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전하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실력이지요.”
인자한 인상의 하멜드 경이 입매를 겸손하게 휘어 올렸다.
“태자비 전하께선 오늘따라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셨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리우리안에서 이벨리아로 시선을 옮긴 하멜드 경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제 부인을 바라보았다.
우아한 자태로 곁을 지키던 백작 부인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벨리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정말 아름다우셔요, 태자비 전하. 전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다니, 무척 영광입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환대에 이벨리아는 수줍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너무 얼떨떨했다. 이런 파티에선 언제나 구석에 있는 자리만 유령처럼 지키곤 했는데, 오늘은 리우리안의 말처럼 꼭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 때문인지, 리우리안의 옆을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를 주시하는 시선 속에 부러움이 그득 담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전하의 파트너로서 누가 되진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속도 없이 기쁘네요.”
이벨리아는 황태자비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해맑은 모습으로 백작 부부에게 친근히 다가갔다. 다행히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백작 부부의 입가엔 흡족한 미소만이 만연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선 내게 누가 되다니, 나의 비께선 겸손하기까지 하군요. 아니 그렇습니까, 경.”
“예, 아무래도 비 전하께선 겸손의 미덕까지 고루 갖추신 모양입니다.”
하멜드 경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훈훈한 분위기였다.
“경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승전을 기념해 파티에 참석해 준 이들이 많아 오늘은 이만해야 할 것 같군요.”
“늙은이가 눈치 없이 전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경과 함께해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경께서 괜찮다면 머지않은 시일에 만찬 자리를 만들어 보도록 하지요. 물론 태자비와 함께 말입니다.”
“언제든 초대해 주신다면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전하.”
하멜드 경이 충직하게 예의를 차렸다. 리우리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이벨리아를 보았다.
뜬금없는 만찬 계획에 이벨리아는 퍽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곱게 눈매를 휘어 접으며 리우리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쨌든 공적인 자리였다. 더욱이 이렇게까지 하는 리우리안의 노력이 자신의 입지를 다져 주기 위함이란 걸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 없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당혹감 때문에 이 기회를 흐지부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제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제 좁은 입지 때문에 페일린과 태자비궁의 몇몇 시종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만큼은 저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곤 리우리안에게 팔짱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저들 부부를 향해 쏟아진 수많은 시선 중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있던 리우리안이 흘끔 이벨리아를 보았다.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군.”
“……전하의 파트너로 처음 참석하는 파티잖아요. 혹시나 실수할까 봐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셔요.”
“우리를 기다리는 이들이 저리 많은데 그렇게 긴장해서 다 만나 볼 수나 있겠어?”
리우리안이 퍽 짓궂은 톤으로 말했다.
“그러는 전하께선 계속 저와 함께 움직이셔도 괜찮으신 거예요?”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하멜드 경과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황후 폐하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신 듯하여 여쭙는 것이어요.”
이벨리아는 곁눈질로 황후 쪽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저를 향한 시선이 어찌나 매서운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다 흐르는 기분이었다.
“신경 쓰지 마. 오늘 일로 그대에게 피해가 가는 일 없도록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
리우리안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 때문인지 퍽 가볍게 들렸다. 그런데 그 말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런. 어머님도 어머님이지만, 베렌티노 후작의 눈알 역시 곧 튀어나오게 생겼군. 아무래도 다음 차례는 베렌티노 후작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장난기 가득한 리우리안의 말에 이벨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황급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긴장도 잊은 해맑은 웃음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베렌티노 후작의 눈이 황후 못지않게 강렬했다.
“마음 같아선 그대가 속 편히 웃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후작의 눈알이 정말 튀어나올 것 같군. 이번엔 그대가 양보해야겠어. 후작의 눈알을 지켜 주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리우리안은 답지 않게 능글거리며 이벨리아의 걸음을 재촉했다. 이벨리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참으면서도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어느덧 긴장이 많이 덜어진 모습이었다.
***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거세게 씹어 물었다. 시선은 한곳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고, 표정은 갈수록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녀의 곁에 선 친우들은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으로 묵묵히 자리만 지킬 따름이었다.
“입이 귀에 걸렸네.”
렐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이벨리아의 환한 낯이 담겨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어찌나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했는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뿐 아니었다. 몬트롤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보석점의 비매품으로 알려져 있는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완벽한 자태였다. 리우리안의 파트너로 곁에 선 이벨리아에게서는 작은 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렐리아의 속을 끓게 했다.
“그런데 저 목걸이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보석점에 전시해 놓고도 팔지 않는 귀한 물건이라고 못을 박으시더니, 몬트롤 백작께서 태자비 전하께 목걸이를 판 걸까요?”
“과정이야 어찌 됐든 팔았으니 저렇게 당당히 목에 걸고 나오신 거겠지요.”
렐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하고 있던 영애들이 결국 간지러운 입을 참지 못하고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도대체 얼마의 값을 치르셨을까요? 그간 보여 온 백작님의 고고함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을 것 같은데.”
“허울만 근사한 황태자비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보란 듯이 저 목걸이를 손에 쥐신 걸 보니.”
“후작가에서 압박을 했을지도 모르죠. 태자비 전하의 부친인 캐롤라인 후작님께선 황제 폐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분이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태자비를 주제로 한 영애들의 대화 소리가 렐리아의 심기를 자극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리우리안은 자신의 남자였다. 제국 전역엔 태자비의 남편으로 알려졌을지 몰라도, 제 남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궁 안의 사람들은 물론, 리우리안과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둘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걸까.
렐리아는 입술을 악문 채 황후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떨어져 있긴 했지만, 저 못지않게 어두운 황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오늘은 황후를 찾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파티에 참석한 다른 이들이 저와 황후를 두고 뭐라고 떠들어 대든, 우선은 지금의 울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렐리아는 친우들의 시선도 외면하곤 황후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근처에 다다르자 인기척을 느낀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영애, 와 주었구나.”
“황태자 전하의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인데 어찌 제가 불참할 수 있겠어요.”
렐리아는 검은 속내를 완벽히 감춘 채 평소와 다름없는 해맑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런데도 황후의 낯은 펴질 줄을 몰랐다.
“어려운 걸음을 해 주었는데, 내가 차마 영애를 볼 낯이 없어.”
“아니어요, 폐하. 이게 다 전하를 위한 일인데,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질투심을 아무렇게나 내보일 순 없는 일이었다.
렐리아는 최선을 다해 진짜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같은 감정을 가진 상대에게는 그것까지도 눈에 빤히 보일 따름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영애의 마음이 상했으리라는 거 모르지 않아. 리우를 위한 일이란 생각에 선뜻 허락해 놓고도 나 역시 속에 천불이 이는데 영애는 오죽하겠니.”
유스티아는 렐리아를 어르고 달래며 그녀의 마음을 돌보는 척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고작 그것만으로 렐리아의 감정이 동요하는 게 훤히 보였다.
제법 속을 많이 끓인 모양이었다.
유스티아는 눈썹을 모으곤 고심했다. 렐리아도 렐리아지만, 저 역시 더는 태자비의 해사한 낯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유스티아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곤 렐리아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황태자의 모후이나, 영애 역시 내 자식이 아니라 여긴 적이 없어.”
“…….”
“무릇 현명한 어미라면 자식 모두를 공평히 대해야 하는 게 아니겠니?”
“폐하. 그 말씀은…….”
조용히 유스티아의 말을 경청하던 렐리아가 순간 아연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유스티아의 뜻을 단박에 알아챈 것이었다.
유스티아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우의 체면을 구기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난 뭐든 용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애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적당한 선만 지킨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이벨리아에게 분풀이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