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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비 (22/94)


22화.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비
2023.06.22.


또각또각, 걸음을 내디뎠다. 발끝이 떨리고 다리가 위태로이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맞물린 남자의 손에 힘이 실리며 그녀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다.

“후…….”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짙은 숨을 내쉬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파티에 참석하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데뷔탕트를 앞둔 소녀처럼 심장이 울렁거렸다. 이유는 모순되게도 살면서 가장 원했던 남자의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많이 했군.”

다정한 말소리가 불시에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저와는 달리 그는 제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무척 태평해 보였다.

그게 퍽 얄밉다가도, 둘 중 한 명이라도 평온해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잇새로 새어 나왔다.

“……전하와 함께 연회장으로 가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래서 걱정되는 건가?”

“걱정……이요?”

“가령 그대에게 쏠릴 게 분명한, 어머님과 렐리아, 그녀의 친우들의 시선 같은 것 말이야.”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황후와 렐리아. 언급만으로도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거부감이 짙게 밀려왔다.

본능처럼 손끝에 힘이 실리고 뻣뻣하게 구부러졌다. 그런 그녀의 손을 리우리안이 더욱 힘주어 붙잡았다.

“분명 그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거야.”

“……그렇겠죠.”

“별안간 내 손을 잡고 나타난 거로 모자라 제국에 하나뿐인 목걸이까지 착용했으니, 곱게 보려야 곱게 볼 수가 없겠지.”

이벨리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껏 알아 온 황후와 렐리아의 성품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터였다.

“목걸이의 출처가 몬트롤 백작이란 건 알고 있나?”

“……그렇다는 소문은 들은 적 있어요.”

“몬트롤 백작이 어머님의 사람이란 것 역시 알고 있을 테지. 그러니 금세 알아차리실 거야. 그대에게 그 목걸이를 선물한 게 나라는 걸.”

“…….”

“만에 하나 파티 도중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대를 죽일 듯 노려보신다고 해도 개의치 마. 내가 계속 그대 곁을 지킬 테니까.”

이벨리아는 홀린 듯 리우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전혀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무심하게 툭 건네곤 여전히 태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탓에 되레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건 이벨리아였다.

“제가 정말 이 목걸이를 하고 연회장에 가도 되는 건가요?”

“안 될 이유는 뭐지?”

“전하의 말씀처럼 황후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게 분명하니까요. 그건 저뿐만 아니라 전하를 곤란케 할 수도 있는 일이니…….”

“젖먹이 어린애도 아니고, 비에게 선물하는 것까지 어머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

“그거야……!”

거침없는 리우리안의 대답에 순간 당황한 이벨리아가 어이없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선물하는 것까지 눈치를 봐야 하느냐고?

눈치 보기를 자처한 건 그였다. 전장에 나가는 그날까지 그는 기꺼이 황후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어미가 주는 것만 받아먹고, 어미가 원하는 일만 하며, 어미의 안락한 품 안에서 언젠가 황제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황후를 향해 불만을 표하는 소리를 하다니. 당혹스럽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벨리아는 떨리는 눈으로 리우리안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꾸만 감정이 동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달라진 그의 태도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젠 희망의 빛이라도 본 것처럼 마음이 그를 향해 발돋움을 시도했다.

그 길이 안심하고 가도 되는 안전한 길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여기저기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인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후.”

묵직하게 차오른 숨을 툭 내쉬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대로라면 위험했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부나방처럼 무작정 그를 향해 뛰어들 순 없었다.

그러니 물어봐야 했다. 물어서 확인받아야 했다.

“이 목걸이, 렐리아 영애가 무척 가지고 싶어 하던 거였어요. 알고 계셨나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하나?”

“알고 계셨다면 좋았겠죠.”

“어째서?”

“렐리아 영애가 무척 원하던 목걸이니까요.”

이벨리아는 전에 없이 뻔뻔한 얼굴로 리우리안을 마주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 듣는다면 남편과 정부의 사랑을 응원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리우리안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그대의 말은 그 목걸이를 그대가 아닌 렐리아에게 선물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날카롭게 사선을 그린 눈썹이 불편한 그의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겁먹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영애께서 무척 기뻐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그 목걸이를 렐리아에게 선물해 그녀를 기쁘게 해야 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

정확한 요지가 낮은 목소리를 타고 새어 나왔다. 이벨리아는 침묵했다. 그렇다는 긍정의 표시였다.

요지를 파악하고도 그는 말이 없었다. 기다림은 점점 더 길어졌다. 그사이 스멀스멀 피어난 불안이 이벨리아의 마음을 차츰차츰 좀먹어 가기 시작했다.

“그대가 무얼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난 렐리아에게 그 목걸이를 선물할 생각이 없어.”

“…….”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완벽한 대답이었다. 이보다 더 확신을 안겨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미 마음을 그득 채운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확신이 좀 더 필요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째서요?”

“뭐가 어째서지?”

“어째서 이 목걸이를 영애에게 선물할 생각이 없다고 하시는 거냐고요.”

되묻는 이벨리아의 목소리에 제법 감정이 실렸다. 그런데도 리우리안에게선 일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그사이 더욱 차분해진 눈빛이 이벨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그대이길 바라니까.”

“그러니까 왜……!”

습관처럼 그의 말에 반문하던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모두가 주목하길 바라. 내 옆에 선, 아름다운 그대를 말이야.”

“…….”

“그리하여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처럼 그대 역시 제국의 하나뿐인 태자비란 사실을 모두가 알길 바란다.”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 그리고 제국의 하나뿐인 태자비.

이벨리아는 리우리안의 말을 곱씹으며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던 사고가 완전히 멈춘 기분이다. 그 자리를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이 메웠다.

쿵쿵쿵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힘차게 뛰기 시작한 확신의 울림만이 그녀의 맥을 타고 흘렀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느닷없이 함께 연회장에 가자고 한 이유가 자신의 입지를 다져 주기 위함이라는 건가?

이벨리아는 가슴 위 옷깃을 부여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거칠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게 정말이라면 더는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자신을 위한 이유가 아니라면 그가 이토록 뜬금없이 제게 파티에 함께 가자고 청할 이유가 없었다.

황후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진 황태자에겐 황태자비의 입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벨리아는 떨리는 눈으로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달라졌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

“전하가 이전과 많이 달라지셨다는 거, 이젠 알겠어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

“갑자기 이렇게 바뀌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말끝에 감았다 뜬 눈꺼풀 사이로 투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불순물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그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이 크게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무모했던 그의 선택을 그녀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것 역시 그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파티를 앞두고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기다리면 말씀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야.”

“…….”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는 기꺼이 이벨리아가 원하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이깟 승전 파티 따위 뒤로 미루고 당장에라도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에 앞선 선택은 언제나 최악의 결말로 향하는 쾌속선일 뿐이었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이벨리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

“전하께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때마침 이벨리아의 심지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는 말이었다.

리우리안은 속절없이 미소를 감아올렸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까?”

부드러운 채근이 이벨리아의 귓가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웅장해 보이는 연회장의 문이 코앞에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금 매섭게 몰려왔다. 하지만 그게 마냥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맞잡고 있는 리우리안의 손 때문이었다.

이벨리아는 크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리우리안이 문지기를 향해 눈짓했다.

황태자의 명에 연회장의 문이 지체 없이 열렸다. 그러자 곧 어둡던 복도에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와 우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뒤섞인 채 쏟아졌다. 그러나 장내를 가장 떠들썩하게 울린 건, 황태자 부부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알림과 함께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연회장의 입구로 쏠렸다.

황태자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라니.

이질적인 그림에 다들 당황한 듯했지만, 곧 하나둘 입구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박수갈채를 보내며 황태자 부부의 등장을 환영했다.

이벨리아는 그렇지 않아도 긴장감에 뻣뻣해진 목덜미가 더욱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닌 척 턱 끝을 당겨 올리곤 힘차게 걸음을 뻗었다.

오늘만큼은 허울이 아닌 제국의 황태자비로서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던 리우리안의 노력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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