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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1/94)


21화.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023.06.21.


이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무척 정신이 없었다. 저녁 무렵에 열릴 승전 파티 때문이었다.

정신없는 준비는 점심이 훌쩍 지나고도 느슨해질 줄을 몰랐다.

“전하,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제 생각엔 이 드레스가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

분주하게 움직이던 페일린이 상기된 얼굴로 이벨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손엔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한 붉은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그건 너무 화려하지 않아?”

이벨리아는 조심스레 부담스럽단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이미 잔뜩 기합이 들어간 페일린은 쉬이 흥분감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치만 다른 드레스는 전부 너무 수수해요. 명색이 황태자 전하를 위해 열리는 파티인데, 전하께서 너무 수수하면 그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드레스는…….”

“게다가 파티 시작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방문하실 예정이라고 황태자궁에서 전갈까지 보내왔다고요! 무려 전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요!”

페일린이 이벨리아의 손까지 부여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어찌나 부담스러운지 절로 뒷걸음질이 쳐질 정도였다.

“늘 렐리아 영애님과 함께하시던 전하시잖아요. 그런 분께서 에스코트를 위해 직접 태자비궁까지 오시는 거라고요. 그런데 수수한 드레스라니요. 안 돼요, 절대!”

“페일린…….”

“보란 듯이 황태자 전하 옆에서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주세요. 제 소원이에요, 전하.”

호들갑을 떨던 페일린이 종국엔 완전히 진중해진 눈으로 이벨리아를 마주 보았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엔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 가득했다.

페일린은 자신이 황태자비로 지내며 겪었던 온갖 수모와 고초를 옆에서 줄곧 지켜본 아이였다. 그러니 느닷없는 황태자의 행보에 저만큼이나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전갈 내용을 곱씹다가 감당할 수 없이 들떴을 테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잔뜩 기합이 들어간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차마 페일린의 간청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하…… 그래, 알겠어. 그 드레스로 하자.”

한숨과 함께 내놓은 대답에 페일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잠깐 사이에 주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이벨리아의 옷시중을 들었다.

이벨리아는 얌전히 페일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입고 있던 연분홍 드레스가 벗겨지고, 강렬한 붉은 드레스가 몸에 휘감겼다.

아직 거울로 모습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제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세상에, 전하.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가만히 서 있던 이벨리아가 문득 고개를 든 건 페일린의 감탄이 들려왔을 때였다.

페일린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제 모습이 이토록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못 봐줄 정도로 이상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화려한 디자인인데,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놀라웠다. 붉은 원단의 광택이 비쳐서인지 얼굴이 생기 있고 화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벨리아는 달라진 제 모습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느닷없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토록 화려한 드레스라니. 내 파트너로서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하긴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제법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이벨리아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멀지 않은 자리에 리우리안이 서 있었다.

“……전하.”

당혹스러웠다. 며칠 전의 일도 그렇고 아직 그를 볼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리우리안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얼굴로 서슴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내 말 같은 건 깔끔하게 무시하고, 또 재미없는 드레스나 골랐을 줄 알았는데.”

“…….”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얌전한 선물을 준비할 걸 그랬어. 물론 지금 차림에도 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그가 피식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벨벳 상자 하나를 내밀어 열어 보였다.

상자 안을 내려다본 이벨리아는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이게…….”

당혹감이 세차게 밀려왔다. 녹안을 가득 채운 건 셀 수도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로 연결된 목걸이였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것 같더군.”

“…….”

“이 정도면 재미없는 드레스를 입었다고 해도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

그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벨리아는 그런 리우리안과 그의 손에 들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이 선물을 렐리아가 아닌 자신에게 내미는 것인지, 습관이나 다름없는 의문들이 머릿속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도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건 누군가 제게 남기고 간 말 때문이었다.

[식사 거르지 말고 건강부터 챙겨. 네가 아프면 너보다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이 있으니까.]

[리우리안을 너무 미워하진 마. 그 녀석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니까.]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 그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러니 너무 미워하진 말라고.

그간 자신이 알아 온 리우리안을 두고 생각하면 어떻게도 연결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까짓 말 몇 마디쯤은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겨야 하는데…….

그런데 그러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지난밤 보았던 리우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

[이런 나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벨리아는 말없이 리우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그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언뜻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완벽히 상반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어쩐지 그 두 개의 표정이 하나로 겹쳐 보였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결국 기반이 되는 그의 감정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듯이.

“…….”

“…….”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러곤 가슴 위로 손을 모았다.

진작 다 찢어진 줄만 알았던 그녀 안의 풍선이 미련하게 또 부풀어 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볼까 한다던 그 말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기대였다.

“준비한 성의가 있는데, 계속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건가?”

“아…….”

상념에 잠겨 있던 이벨리아가 잔잔히 스며든 목소리에 짧은 침음을 뱉었다.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로 시선을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곧 페일린을 바라보았다.

“페일린.”

“네, 네. 네, 전하!”

“이것 좀.”

이벨리아 못지않게 놀란 페일린이 허둥지둥하며 리우리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리우리안이 재빠르게 한발 뒤로 물러나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내가 직접 채워 주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리우리안의 적안이 온통 온기로 가득했다. 그 안에 비친 거라곤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는 그녀의 얼굴만이 유일했다.

허락을 기다리는 남자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듯 파고들었다.

이벨리아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느닷없는 현기증이 몰아닥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제 뒤로 리우리안이 바짝 붙어 서 있었다.

허전하던 목 위로 금속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때마다 목걸이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리우리안의 손가락이 살갗을 스쳤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게 정말 현실이 맞는 건지, 혹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만 의심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손길이 너무 따뜻했다.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 모두가 그대를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겠군.”

별안간 귓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벨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길이 느껴졌다.

힘에 이끌려 돌아본 시야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들어왔다. 드레스만으로도 무척이나 화려하던 자태에 영롱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빛을 더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파티에 참석한다면 모두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아름다워, 이벨리아.”

머리 위로 더운 입김이 쏟아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거울을 통해 리우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가녀린 목에 걸린 목걸이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곧 거울 속 그녀를 응시했다.

“제국에 딱 한 점밖에 없는 목걸이라고 하던데, 그 가치가 이제야 제대로 발하는 것 같군. 이제야 진짜 주인을 찾았어.”

익숙지 않은 칭찬에 이벨리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목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국에 딱 한 점밖에 없는 목걸이.

언젠가 참석했던 티파티에서 렐리아와 그 친우들이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몬트롤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보석상에 전시된 목걸이 중 전유물처럼 팔지 않는 물건이 있는데, 온통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으며 제국에 딱 하나뿐인 목걸이라고.

그 이야기를 나누며 허영심에 눈을 반짝이던 렐리아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그 물건이 지금 제 목에 걸려 있었다. 그것도 리우리안에 의해서 말이다.

이벨리아는 숨을 홉 들이마셨다. 정신을 차리려고 무던히 노력하는데, 이미 흐트러진 이성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어깨에 닿은 리우리안의 손끝에 다시금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어느 때보다 진중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정중하게 청하지.”

“…….”

“이벨리아, 잠시 후 있을 파티에 나의 파트너로 참석해 주겠어?”

싱그러운 녹안이 큰 폭으로 너울졌다. 가슴이 속절없이 쿵쿵 뛰었다. 스스로가 이토록 바보처럼 느껴질 수가 없었다.

셀 수도 없이 상처를 입고, 숱하게 고통받아 왔으면서. 다신 믿지 않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을 거라고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으면서.

그런데 결국 또 제자리였다.

“……네.”

그의 다정한 미소 한 번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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