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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는 이유 (20/94)


  • 20화.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는 이유
    2023.06.20.


    보름달이 찬란하게 떠오른 밤이었다.

    펠릭스는 창가에 걸터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정말 미쳐 가나 봐. 조금 전에 네가 말을 했다고 생각했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어.]

    [……설마, 너니?]

    떠오르는 목소리를 곱씹었을 뿐인데 미간으로 선명한 주름이 팼다.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들은 거지? 분명 몸이 나을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불어넣은 건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짙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도리가 없어 정체를 드러내긴 했지만, 어떻게 제 목소리를 들은 건지 그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물론 선택받은 자들에 한해 자신을 보고 들을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 땅에 신성과 마법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마법을 타고난 자들은 제국의 평화를 위해 재능을 바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신실한 마음으로 신을 숭배하며 이 땅의 평화를 간절히 기원했다.

    신은 그런 제 자식들을 갸륵하게 여기며 비옥한 땅을, 깨끗한 물을, 온난한 기후를 선물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강력한 악의 기운을 가진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화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제국 이곳저곳에서 흉흉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소란해진 틈을 타 악은 재빨리 이 땅에 뿌리내렸다.

    평화롭던 제국이 황폐해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을 보다 못한 몇몇 이들이 악을 토벌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토벌은 십수 년에 걸친 전쟁이 되었고, 신이 모든 걸 끌어안은 채 봉인이 되고 나서야 처참했던 싸움은 끝이 났다.

    그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 중에는 펠릭스를 보고 들을 수 있던 자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전쟁의 여파로 치명상을 입거나 황폐해진 환경에 배를 곯으며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신이 사라진 세상엔 더 이상 비옥한 땅도, 깨끗한 물도, 온난한 기후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다른 의미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나둘 그 땅을 떠났다.

    더는 누구도 신의 땅에 남지 않았다. 생명력으로 넘쳐나던 땅은 순식간에 황무지가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그 땅에 터를 잡아 살아가기 전까진.

    새순이 돋아나고 싱그러운 기운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봉인된 신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 땅에 사는 누구도 땅 아래 잠든 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전과 달리 신이 없이도 그들은 저들만의 세상을 훌륭하게 꾸려 갔다.

    그 사실은 봉인되어 있던 신이 다시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구도 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야 맞는데…….”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현생에 단 한 사람, 칼리프 드윗뿐이어야 했다.

    이 땅에 싱그러운 기운이 피어나고도 오랫동안 자신을 깨운 인간은 없었다.

    유일한 한 명, 칼리프를 제외하고는.

    영문은 알 수 없으나 신성력을 가진 칼리프가 자신을 긴 잠에서 깨웠고 이렇듯 소환까지 시켰다.

    “……설마 그녀도 칼리프와 비슷한 건가.”

    작게 읊조린 목소리가 언뜻 혼란하게 떨렸다.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나,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는 경우의 수였다.

    더는 신성력을 가진 자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찰나에 칼리프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벨리아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믿음을 완전히 가슴에 새기기엔 얼마 전 그녀가 크게 앓았던 일이 걸렸다.

    그녀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을 가진 존재라면, 불면과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맞았다.

    그 문제로 생기는 내상쯤이야 몸 안에 흐르는 신성력으로 충분히 자가 치유가 가능했을 테니까.

    “도대체 뭐지.”

    펠릭스는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꽉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

    “…….”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칼리프였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껏 지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복잡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칼리프를 보며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저런, 오늘도 하루가 많이 고되었나 봐?”

    “누구처럼 한량같이 지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까.”

    말끝에 칼리프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펠릭스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씰룩거렸다. 닥치라는 둥 시끄럽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다른 날과 비교하면 꽤 성의 있는 대답이었다.

    “오늘은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러운 모양인데?”

    펠릭스가 특유의 능글거리는 투로 물었다.

    칼리프는 폭신한 의자에 털썩 앉아 몸을 깊숙이 묻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몬트롤 백작이 은밀하게 만남을 청해 왔어.”

    “몬트롤 백작? 그자라면 네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인사 중 하나가 아닌가?”

    “맞아. 황후의 세력인 가넷 공작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지.”

    “황후의 사람이 어째서 황후가 아닌 너한테 은밀히 만남을 청한 거지?”

    “남부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더군.”

    “다이아몬드 광산이라고?”

    펠릭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그런 반응쯤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칼리프가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광산이지.”

    “그 광산이 있는 자리라면 전쟁 중에 엘리아 왕국에 빼앗긴 영토가 아닌가?”

    “그랬었지. 하지만 전쟁은 결국 발체로페의 승리로 끝이 났고, 빼앗긴 영토의 소유권은 다시 제국에게 돌아왔어.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지금이라면 엘리아 왕국과의 협상으로 얼마든지 광산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겠지.”

    칼리프는 피로로 묵직해진 눈두덩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해 주기로 했어?”

    “그럴까 해. 백작의 뜻대로 온전한 소유권을 넘겨주면 광산 수익의 40퍼센트를 내게 준다고 했으니 말이야.”

    “뭐라고? 광산 수익의 40퍼센트??”

    펠릭스가 경악하며 물었다. 그에 칼리프가 습관처럼 미간을 구겼지만, 곧 피식거렸다. 어쩐지 조금 전 봤던 백작의 얼굴이 겹쳐졌다.

    “조금 있으면 눈이 튀어나오겠군.”

    “이봐, 그 광산에 매몰되어 있는 다이아몬드의 양이 어느 정도인 줄 알아? 거기다 엘리아 왕국 영토에 뻗어 있는 나머지 광산까지 포함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다더니, 광산 사정에 대해 훤한 모양이야.”

    펠릭스는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정작 그 엄청난 협상을 하고 돌아온 당사자는 그저 피곤하다는 듯 성의 없이 손을 휘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을 평소 칼리프의 표현법으로 바꾸자면 이만 꺼지라는 신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굴하지 않고 더욱 성가시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괜찮은 거야? 몬트롤 백작은 황후의 세력이라고 했잖아.”

    “돈에 눈이 멀어 나를 찾아온 주제에 과연 황후에게 사실을 고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나를 은밀히 찾은 이유부터 상세히 고해야 할 텐데?”

    칼리프가 고민 없이 반론했다. 그제야 똥 마려운 개처럼 뒤만 졸졸 쫓던 펠릭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듯이 손뼉을 쳤다.

    “칼리프, 너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놈이었구나?”

    “그 말은 마치 그동안 날 무척이나 덜떨어진 놈으로 봐 왔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칼리프가 미간을 구겼다. 정말이지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려야 바라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설렁줄을 쥐었다.

    아무래도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더욱이 내일 있을 승전 파티를 생각해서라도 어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생각으로 막 손에 쥔 줄을 흔들려던 찰나였다. 조용하던 펠릭스의 목소리가 성가시게 들려왔다.

    “근데 어제까지만 해도 이벨리아의 선택에 따라 다시 회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칼리프의 적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설렁줄을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지고, 곧 짙은 한숨이 침실을 물들였다.

    “……그래, 그랬지.”

    “그럼 좀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아? 황궁에 돌아온 후로 네 안색이 몰라보게 나빠졌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보다 더.”

    펠릭스가 어울리지 않게 온기 가득한 걱정을 건네 왔다. 그래서일까. 칼리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요즘 그는 전장에서보다 더한 피로를 느끼며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다만 며칠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너무도 명확했다.

    “아직 그녀가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잖아.”

    “…….”

    “희박한 가능성이겠지만…… 어쩌면 그날 밤에 내가 했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담담히 대꾸한 말에 펠릭스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 모습을 보며 칼리프가 눈썹을 들썩거렸다.

    의외였다. 이벨리아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 당분간 만나지 말란 말로 속을 뒤집거나 그게 아니면 심심한 반응만을 보이곤 했는데.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머리 아픈 일투성이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멀리 보면 백작의 제안은 분명 수확이 맞지만, 당장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 늘어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쉴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활용하여 질 높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옳았다.

    “나는 어떻게도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어.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난 그다음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프가 미련 없이 설렁줄을 흔들었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펠릭스는 침실 문이 열리는 걸 확인하곤 입술을 꾹 맞붙였다.

    시중을 받기 위해 등을 돌린 칼리프가 겹겹이 입은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복잡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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