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목전까지 다가온 비극 (14/94)


  • 14화. 목전까지 다가온 비극
    2023.06.14.


    칼리프는 순간 얼음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펠릭스의 말을 곱씹을 시간이, 그래서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전하.”

    칼리프는 애꿎은 눈동자만 이리저리로 굴리며 늘어져 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천천히 뒤로 돌았다.

    어느덧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이벨리아가 그의 눈동자 가득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머님의 온실에서 나오기 무섭게 쓰러진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쩍쩍 갈라져 아스라이 흩어지는 가녀린 목소리 뒤로 무심한 척 대꾸했다.

    곧장 탄식이 들려오고 칼리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자꾸만 펠릭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답지 않게 진중히 충고하던 그 목소리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녀에게 다가가 보는 건 어때?]

    [아직 네 진짜 정체를 밝힐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네 마음까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이벨리아에게 제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이 지긋지긋한 회귀를 반복하기 시작한 후로 단 한 번도 칼리프 드윗으로 살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처음으로 회귀라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 건 이벨리아가 황후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봐, 그 소문 들었는가? 얼마 전 승계하신 황후 전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더구만. 곧 국가장이 치러질 거라고 거리에 소문이 파다해.]

    [뭐라고? 황후 전하께서? 아니, 황후가 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단 말인가!]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태자비 시절부터 황제가 정부였던 지금의 황비만 끼고 살았다는데, 그 치욕을 견디기 힘드셨던 거겠지.]

    [쯧쯧. 나라가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 건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소문은 사실이 맞는 거야?]

    [사실이 아니면, 타살이라도 당하셨다는 말인가?]

    [혹시 모르는 일이지. 황제란 놈이 태자비를 맞이하고도 정부만 끼고 살았을 정도로 천인공노할 놈인데, 황비와 작심을 하여 독살하였을지 알게 뭐란 말인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동료로 지내던 자들이 나누는 신랄한 대화에 칼리프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황후의 죽음.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생각할 일이 있어서도 안 되었다.

    제국의 황후인 이벨리아 캐롤라인, 그녀가 누구이던가.

    지금껏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 품은 여인이었고, 세상 유일하게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 보았던 사람이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녀를 잃은 제 마음은 진작에 무너져 내려 가루가 되었다고 해도, 그녀만큼은 그러길 바랐다.

    그런데 그토록 행복하길 바랐던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칼리프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얼굴로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쯤 넋을 놓은 채 향한 곳은 황궁이었다.

    제 앞을 막는 황궁 기사들을 상대로 미친놈처럼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보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벨리아에게 향해야 했다. 정말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지. 아니, 정말 그녀가 죽은 게 맞긴 한 건지, 그녀의 시신을 제 두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소동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칼리프는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으며 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무작위로 베고 또 벴다.

    어떻게든 그녀를 봐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제 피부를 스친 고통 따위는 피를 토하면서도 악착같이 견뎠다.

    그렇게 더디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며 애타게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황후궁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찰나, 척추를 타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퍼져 나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가슴을 뚫고 나온 검 끝이 보였다.

    가야 하는데, 이벨리아에게 어서 향해야 하는데.

    본능처럼 떠오른 생각을 곱씹으면서도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다리는 물론 몸이 뻣뻣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순 ‘삐-’ 하는 이명이 귀를 울리고 꼿꼿했던 무릎이 찰나의 순간 힘을 잃고 툭 꺾였다. 느리게 눈을 끔벅였을 뿐인데, 시야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게 그가 맞이한 첫 번째 죽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개죽음을 당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그렇다고 해도 후회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참이었으니까.

    물론 그녀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 못내 가슴에 사무쳤지만, 다시 힘을 내기엔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죽음인 건가.

    그 생각을 하던 순간, ‘헉’ 하고 숨을 몰아 뱉으며 다시 눈을 떴다.

    5년 전, 미치광이 부친에게서 도망치듯 떠나 와 무작정 들어갔던 용병단의 침소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순간부터, 5년 전에 겪었던 일들이 차례로 반복되어 벌어지는데 믿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더욱이 5년 전과 다른 선택을 할 때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되었다. 그러곤 다시 5년 전 용병단 침소에서 또다시 눈을 떴다.

    그 같은 죽음과 회귀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죽지 않는 방법은 이전의 삶을 완벽히 반복하거나, 이벨리아를 위한 결정을 하는 것뿐이라는 걸.

    그녀를 만나기 위해 용병단에서 빠져나와 수도로 향한다거나, 그녀에게 향하기 위한 살생을 시도한다거나.

    이전과 같은 삶을 사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전제가 ‘이벨리아를 위한 일’일 때에만 뜬금없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숙명 같았다. 이벨리아가 살아야만 저 역시 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된 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5년 후, 자살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을 수 있도록.

    그렇게 결심한 그는 미련 없이 용병단을 나와 남부의 국경으로 향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저지른 살생은 리우리안 페트로프, 제국의 황태자였다.

    살생이라면 용병으로 지내며 수도 없이 저질렀던 일인데, 리우리안을 처리할 때만큼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과 함께 전신으로 소름이 끼쳤다.

    자신과 너무도 똑같은 얼굴을 한 그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갈 땐, 저 역시 함께 죽어 가는 기분까지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의구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문제를 깊이 골몰하기엔 그는 제 손으로 죽인 리우리안을 대신해 전장을 누벼야 했고, 이후에 생기는 변수들에 몇 번이나 더 죽음과 회귀를 반복해야 했으니까.

    1년간 이어진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벨리아를 만나기까지, 그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반복해야만 했다.

    끝도 없는 회귀와 그로 인해 반복되는 살생이 진저리가 나서 지치기도 했지만, 오로지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만을 떠올리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맞이한 자리가 바로 지금이었다.

    “전하.”

    불현듯 들려온 어여쁜 목소리에 칼리프가 눈을 끔벅였다. 그 위로 비친 건 어느덧 자리에 똑바로 앉은 이벨리아의 모습이었다.

    묵직한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바윗덩어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얼굴을 보기 위해 버텨 온 그간의 시간이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시간이었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펠릭스의 조언대로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벨리아를 이런 식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진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칼리프 드윗?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봐요. 전하, 장난을 치시는 것이지요? 어서 그냥 해 본 말이라고 해 주세요. 어서요……!]

    끔찍한 전쟁 끝에 이벨리아를 만났던 몇 번의 생 중 이미 정체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이벨리아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 종국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곤 그가 버틴 끔찍한 시간보다 훨씬 더 끔찍한 걸 마주한 듯이, 그를, 칼리프 드윗을 바라보았다.

    그저 시선을 받는 것뿐인데,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럼에도 제 상처를 돌볼 새는 없었다. 충격에 휩싸인 그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탓이었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다시 5년 전의 용병단 침소로 회귀해 지긋지긋한 시간을 반복해야겠지만, 그게 죽어 가는 이벨리아를 지켜보는 것보단 나았다.

    그 후로도 비슷한 경험은 몇 번 더 해야만 했다. 완벽한 리우리안이 되지 못한 그는 계획에 없던 실수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이벨리아는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바싹 말라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그래서였다.

    칼리프는 두려웠다. 잘못된 선택 한 번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끔찍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이벨리아의 비극적인 선택을 제 눈으로 오롯이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펠릭스의 말을 믿어 봐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정체는 숨길지언정, 그녀를 향한 제 마음만큼은 드러내도 되는 것일까.

    비록 여전히 리우리안 페트로프의 가면은 벗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전하.”

    “…….”

    “……설마, 계속 제 옆을 지키고 계시던 것은 아니겠지요.”

    여전히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를 향해, 이벨리아가 물었다. 간절한 바람을 품은 눈으로 그를 어여쁘게도 바라보면서.

    그 눈을 오롯이 마주하며, 칼리프는 예감했다.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비극적인 순간이, 어쩌면 목전까지 다가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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